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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화목하라 (막 9: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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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화목하라 (막 9:38~50)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화목하라고 하는 동일한 제목으로 지난 연말에 함께 은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다시 동일한 본문에 동일한 제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릴 적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기 적의 예수님을 설명할 때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했고 다시금 예수님이 열두 살 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점만 봐서도 안 되고 사람의 입장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지만 동시에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을 받도록 살아갈 때 그 사람이 참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런 모습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와 하나 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용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이요 자기가 깨달은 대로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따르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냐. 그거 하지 말라고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더 굳게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을 가지고 나가서 실천하는데 있어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컷 공을 들이고 정성을 다 쏟았지만 마지막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와서 그 마음을 확 끌더니 자기가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정말 속상하죠. 아니 내가 그토록 공을 들이고 지금까지 그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애썼는데 어느 날 다른 사람이 와서 마치 남의 먹이를 가로채듯 그렇게 데리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등록을 시켰다고 할 때 속상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못하는 것 남이 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속상해할 것 없어요. 어쨌든 그 사람이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면 비록 마지막 결실을 내가 맺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 수고에 따르는 상급은 동일하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마무리 그건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마무리까지 다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훈련하고 그런 열정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던가 아니면 포기하면 됩니다. 나는 여기까지 그리고 마무리는 네가 하라 이렇게 한다면 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죠. 보십시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결국 문제는 꼭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크게 보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마무리를 누가 하느냐가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내가 그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일이 잘 마무리가 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면 상대방이 하지 못하는 일을 또한 내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또 하나의 측면은 우리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점입니다. 분명히 목적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렇다면 목적이 하나이면 당연히 그 목적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막상 해보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해서 그것을 궁금해 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하는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무슨 일을 한다고 할 때 우리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은 여럿일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먼저 화합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화합함으로 하나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업과 협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의 접근을 우리는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공동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우리가 생각을 해 봐도 밥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반찬을 만드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재료를 준비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각각의 재료들을 가지고 각각의 반찬들을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한 가지 반찬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업과 협력입니다. 그거 한 사람이 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럿이 일을 나누어서 하면 보다 쉽게 일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내가 했으니까 모든 공은 내가 다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면 누가 나를 알아준다고 더 우쭐 댈 것도 없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공을 하나님께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게 되면 거기에는 그 어떤 다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건 다 나 때문이라고 그렇게 내가 감당하고자 하면 그 사람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좋은 일에는 내가 먼저 나서서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며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좋은 일에는 모든 공을 다 다른 사람에게로 돌려주게 되면 거기에 어떤 불평도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뒤늦게 출발한 다른 교회가 더 커진들 어떻습니까? 우리가 묵묵히 씨를 뿌리고 못자리를 가꾼다고 할 때 못자리는 모든 모가 논으로 다 옮겨졌다고 해서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뿌듯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전도를 할 때도 팀 전도 전략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어떤 한 사람만의 수고로 다 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합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때 그 각각의 수고로 인해 더욱 열매를 맺기가 수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하나가 아닌 같은 목적을 이루어 나가기 위한 화합 내지는 협력입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말이 갖는 의미 역시 똑같은 것이 아니라 돕는 자 협력하는 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목적은 하나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요 그 일을 위해 각자의 은사와 재능을 따라 힘을 모으는 협력체계를 갖추게 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화합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평화롭던 에덴동산이 저주의 동산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주셨던 낙원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려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비로소 그들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요 불순종이 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왜요? 이미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불순종하도록 유혹한 악한 마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주님은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이라고 해서 조건을 붙여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사실인 즉은 손이나 발이나 눈은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손이 우리로 범죄하게 합니까? 결과는 손이 범죄의 하수인이 되지만 손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는 것은 손을 움직이는 생각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발이 우리로 범죄하게 합니까? 결과는 발이 죄악의 길로 가지만 그 발로 하여금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은 발을 움직이는 생각이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눈이 우리로 범죄하게 합니까? 결과는 눈으로 보았기에 죄질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하나 그건 마음의 문제입니다. 본다고 해서 다 죄질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 생각에 매여서 결국은 그 생각에 지고 만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싶다”는 마음이 “먹어야겠다”로 바뀌었고 그 결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싶다”는 마음이 “먹어야겠다”로 바뀌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손은 찍어버리면 되고, 발도 찍어버리면 되고, 눈도 빼버리면 되는데 그러나 마음은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마음을 없앨 수가 있나요? 뭔가 형체가 있어야 찍어버리든 빼버리든 할 것 아닙니까?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건 머리로 하는 것이니까 그럼 머리를 잘라버리면 될까요? 그럼 생각이 아닌 마음이라고 한다면 또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뭡니까? 우리의 마음이든 생각이든 간에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순간적으로 죄짓고 싶은 마음이 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생각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죄를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채우면 됩니다. 우리로 화합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우리로 하여금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으로 채우면 됩니다. 

왜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채워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충만하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고 은혜로 넘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로 사로잡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마음을 바꾸지 않고 그래서 화목하지 못하면 내가 갈 곳은 불못밖에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그곳이 대단한 곳인지 거기서는 구더기조차 죽지 않고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지옥으로 떨어지기 싫거든 당연히 내 마음을 바꾸어 내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가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또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는 방법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채우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면 내 안에 주님의 공급하시는 사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사랑이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널리 펼쳐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내 안에 가득한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향해 두루 펼쳐지도록 만들어가시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그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더욱 더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요 그 은혜에 감격해서 사랑을 나누는 자로서 화목한 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 화목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소금은 좋은 것이라고 전제를 하고는 소금의 역할을 말씀하십니다. 그 역할은 짜게 하는 맛을 내는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면 소금을 짜게 할 방법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고 하십니다. 소금이 부족하면 싱겁다고 할 것이고 지나치면 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적당량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의 모습이 바로 소금입니다. 그러면 간이 맞는다고 하고 음식이 맛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짜고 싱겁고를 떠나서 음식으로 하여금 맛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역할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화목하는 것이요 이것이 우리 인생을 맛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화목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화목하기 위해서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같으면 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따라서 화목은 일치가 아닌 연합입니다. 화합입니다. 동거입니다. 함께 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이유도 그 성도라는 말에서 보듯 우리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하나가 되셨다고 하면 그러면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었으니 그럼 내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일치가 아닌 연합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과 같이 나도 주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이 서로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합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주님은 먼저 우리를 위한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나의 희생과 헌신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먼저 자기 주장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마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이웃을 위해서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내가 아닌 이웃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가 되면 그것이 화목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나의 이해와 너의 이해가 서로 다를 때 나의 이해를 내려놓고 너의 이해를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는 손해가 될지언정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나의 유익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맛을 내기 위해 자신의 형체마저 잃는 것처럼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래서 이웃이 돋보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베풂과 나눔 그리고 격려로 나타납니다. 

주님이 다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만날 적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건 주님이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이렇다고 하신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야단이라도 치셨더라면 그토록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고 막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제자들과 오래 머물지도 않으셨습니다. 

잠시 모습을 보이시고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욱 복이 있다”고 하시고는 다시 모습을 감추셨으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었던 제자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요. 주님은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고 하시지만 제자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야단을 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다 이해하고 용서했다고 하신 것도 아니니 그저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하라 저걸 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만을 바라고 지난 3년 반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살아왔던 저들로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습니다. 그래 너무 답답한 나머지 고기나 잡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나갔지만 3년 만에 던지는 그물질에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으니 이보다 더 지치고 힘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때 너희에게 잡은 고기가 있느냐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시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얼떨결에 던진 그물에 엄청나게 잡힌 고기를 보며 그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집니다. 주님이셨습니다. 

그 주님이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둘도 없는 친구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주님이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듯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하나님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둘도 없는 친구처럼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금 내 양을 치라 하시고는 다시 묻는데 이번에는 네가 나를 둘도 없는 친구처럼 사랑하는 것이 맞느냐고 기준을 낮추어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베드로의 형편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형편대로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직임을 맡기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주님을 사랑하느냐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고자 하는 열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하시고 상급까지 주십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향한 열정을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그리고 잘했다 내 양을 치라고 하시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격려입니다. 그 격려가 있기에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할 수가 있고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힘을 쏟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그의 수고에 아낌없이 칭찬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화목하는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수고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비록 실패를 했다고 해도 하고자 하는 그 열정을 인정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이야말로 진정한 배려요 관심입니다. 아울러 정말 힘들어할 때 묵묵히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귀한 사랑으로 온전히 화목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고 그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께 속해있다고 해서 물 한 그릇이라도 준다고 할 때 주님은 마치 자기가 받은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당연히 거기에 따른 보답을 하시죠. 반면에 주를 믿는 사람 가운데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만든다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같은 말을 해도 들어서 힘이 되는 말을 해주어야 하고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상할 수 있는 그런 말은 삼가야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한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분주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더 협력해야 하고 그러기에 더 짬을 내어야 하며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결과보다는 그 마음을 우리는 받아주어야 하고 인정해야 하고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며 칭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저 마음뿐이지 시간조차 내기 힘든 그런 사람들을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 하며 받아들일 때 참된 화목을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이요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맛입니다. 이런 감칠맛 나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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