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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풀밭 위의 식사 (눅 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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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눅 9:10~17)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이야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고 하는 고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이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 두 광주리나 되었다.]

• 배경이 되는 두 사건

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19세기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떠올리실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그 그림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늘의 본문을 ‘오병이어五餠二魚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였다는 내용인데, 이 어려운 조어造語를 너나할 것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주님께서 못하실 일이 있겠느냐며 감동의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만도 없어서 애매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는 까닭은 객관적 사건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때가 많습니다.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이 곧 성경해석의 과정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이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제1성서(구약)의 어떤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이야기 하면 우리는 이내 출애굽 공동체에 내렸던 만나(manna, 출16:1-36)를 떠올리게 됩니다.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wilderness of Sin)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들은 종살이를 할망정 차라리 애굽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불퉁거립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늘의 만나를 약속하시면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약2.3리터)씩만 거두라고 지시하십니다. 아침 안개가 걷힌 후 백성들이 광야에 나가 보니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습니다. 만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나가 만나를 거두어들였습니다. 성경은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지만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내일을 위해 만나를 남겨 두었는데, 남겨진 것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만나는 축적과 보관이 불가능한 하늘의 음식입니다. 

또 다른 사건 하나는 사르밧 과부 이야기(왕상17:8-16)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나아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고하고는 박해를 피해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깁니다. 그는 그곳에서 까마귀들이 가져다주는 빵과 고기를 먹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릿 시냇물도 바짝 마르자 그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엘리야는 성문으로 들어서다가 땔감을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 물과 먹을 것을 부탁합니다. 그 여인은 과부였는데, 그에 남은 것이라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여인은 굶주려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인 후 죽음을 기다릴 작정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도 예언자는 음식을 만들어 자기에게로 먼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갈등이 일었겠지만 나그네 환대의 의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여인은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나눌 때 일어나는 기적을 이렇게 전해준 것입니다.

•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오병이어 이야기는 이러한 전사前事에 유의하며 읽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여기서 ‘무리’로 번역된 ‘오클로스’(ochlos)는 귀속할 곳이 없는 민중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뿌리 뽑힌 이들이었고, 마음 둘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직화된 대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었기 때문”(마9:36)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대개의 경우는 예수를 통해 일어나는 기적에 마음이 끌렸을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낫고,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끌리듯 예수에게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예수와 한번이라도 눈길이 마주친 이들은 어떤 신비한 기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누추하면 누추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뿐, 어떠한 도덕적, 세속적, 종교적 판단도 하지 않는 사람과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선 무리들의 심정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에 든 ‘티끌’을 빼주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는 귀속할 곳이 없는 그들의 쉴 자리였고, 고향이었고, 설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그들은 참 불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유랑하며 살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늘 위태로웠습니다. 누군가가 먹을 것을 늘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고,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먹을 수 있을 때 배불리 먹고, 또 비상시를 대비하여 음식을 따로 여퉈두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그들은 몹시 시장했을 겁니다. 얼른 요기라도 하고 잠시라도 편히 쉬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무리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11). 마치 바람 빠진 타이어에 바람을 불어 넣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의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십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제자들의 마음은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아와 건의합니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12b)

말은 정중하지만 짜증이 배어있는 말투입니다. 무리를 염려하는 듯싶지만 사실은 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무리에 대해 뼛성이 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긋지긋한 사람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런데 그때 스승의 입에서 천만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을 겁니다. 제자들의 속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이 대책 없는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군중들을 빨리 해산시키고 자기들의 굶주림을 달래고 싶은 제자들의 마음은 조급합니다. 그들은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논리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합니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13b)

살 돈도 없고, 살 수도 없다는 뜻이 내포된 말입니다.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되었다니 제자들의 말이 오히려 현실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부딪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굶주린 무리를 차마 그대로 돌려보낼 수 없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둘의 차이는 ‘관심의 화살표가 어디를 향하고 있나’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의 화살표가 자기들을 향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관심의 화살표는 무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복과 복지가 예수님의 관심사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 ‘타자를 위한 존재’(being-for-others)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말로 주님은 제자들을 더 심오한 세계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대로 했습니다. 烏合之衆의 무리들이 처음으로 작은 모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까요?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16) 주님은 귀속할 공동체를 잃었을 뿐 아니라 항시적인 배고픔을 겪으며 살고 있는 이들을 풍성한 생명의 자리로 초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것은 예수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 마음이 불러일으킨 생명의 기적입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이것은 벳새다 광야에서 무리들이 경험한 구원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요? 어찌하든 그들의 상황 속으로 화육해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의 내면에 ‘만족’이라는 생명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이야기의 숫자에 현혹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도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나 되다니! 와, 예수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 숫자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빵 다섯에 물고기 두 마리니 합하면 일곱이 됩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12도 역시 완전수입니다.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표현은 익명의 다수를 가리킬 때 쓰이는 관용구입니다. 이 숫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기적이 얼마나 충만하고 온전한 것인지를 나타내기 위해 채용된 것들입니다. 

벳새다 광야 그 풀밭 위에서의 식사에 참여한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들은 다름 아닌 만나를 맛본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에 따뜻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고, ‘함께 함’의 기쁨이 솟구치고 있음도 느꼈을 것입니다. 줄 마음만 있으면 뒤주의 밀가루도 비지 않고, 기름병도 마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가끔 부르는 복음성가가 떠오릅니다.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구요
사랑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요한 자도 없어요”

이 비밀을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여전히 영적인 가난뱅이 신세를 못 면합니다. 

• 오늘도 기적은 가능한가?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벳새다 빈 들에서 일어났던 이 놀라운 생명의 잔치는 지금도 가능한가? 대답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궁핍한 이웃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이 강추위에 급식소에서 한 끼 밥을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이들이 있고, 난방비조차 없어 냉골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아침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오클로스, 귀속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제자들처럼 그들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편안한 휴식과 식사를 방해하는 것 같아 마음으로 그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가출자, 노숙자, 도시 빈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이런 이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맞아들일 마음만 있으면 기적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기적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연민에서 비롯됩니다. 연민의 마음은 책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아픔의 자리에 가보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집의 형편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이전처럼 사치스럽게 살 수 없고, 그렇게도 많은 쓰레기를 만들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안락한 내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예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려운 이들을 보살펴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우리 기도는 빈 말이기 십상입니다. 스페인 출신의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말은 기도와 행동이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

이웃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내 코가 석 자라며 움츠리는 순간 생명의 기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은 것이 어린 소년이었다고 말합니다. 자기 몫을 내어놓을 때, 자기 몫을 쪼개려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합니다. 베르쟈예프의 말대로 나를 위해 사용하는 100만원은 ‘물질’이지만,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80만원으로 살림의 규모를 줄이고 20만원을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때 나를 위해 쓴 돈과 이웃에게 준 돈은 이미 ‘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일 년 동안 봉헌할 헌금을 작정합니다. 여러분들이 바치는 귀한 헌금이 소년이 바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생명의 기적, 사랑의 기적을 일으키는 성사의 도구가 되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모든 실천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의 삶이 풍성한 생명의 잔치로 거룩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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