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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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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강해 설교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욕적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스승은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반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하는 일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여 분을 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이 규례로 정해져 있었으며, 금식의 횟수가 경건의 척도로 인식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왜 이 질문을 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친구가 되며, 또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모습들은, 당시의 율법적인 신앙과 폐쇄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금식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 년 중 하루를 반드시 금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갔을 때, 민족의 치욕을 생각하며 일 년에 네 번 금식하는 것이 유대인 사회의 관습처럼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것을 제도화시켜 모든 사람에게 부당하게 강요하며, 금식 자체를 종교의 본질처럼 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형식이 내용을 삼켜버린 형식주의로 전락되어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였으며, 금욕 생활을 강조하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처럼 자주 금식하지 않던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분을 터뜨리며 도전적인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1)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신랑 친구들은 혼인 잔치가 열리는 동안에는 대속죄일에도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기쁜 일이기 때문에 슬픔과 애곡을 나타내는 금식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을 신랑이 있는 동안에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혼인집의 신랑 친구들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며 신랑을 빼앗길 날, 곧 예수님이 장차 고난당하실 때 자연히 금식할 것이므로, 그가 지상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잔치하고 즐거워하는 일이 합당한 일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쁨과 즐거움의 종교입니다. 마치 잔치 집에 풍성한 음식과 노래와 춤과 웃음이 있어 기쁨이 만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잔치 집은 아무리 즐거움이 많고 웃음소리가 높아도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잔치 집이 조용하거나 한숨 소리나 슬픔의 소리나 다투는 소리가 나면 불행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잔치 집에 가서는 즐거워하고 기뻐할수록 그 집에 합당한 예절이 됩니다. 그러나 상가에 가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든가 또는 웃음소리가 높으면 실례가 됩니다. 경건한 마음과 슬픈 표정의 태도를 가지고 정중하게 대하여야 합당한 예절이 됩니다.

주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고 하심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만난 후 참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쁨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니지만, 진실한 신앙에는 반드시 영적 희열이 동반합니다. 그 기쁨은 죄 사함을 받음에서 오는 안전감, 마귀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자유와 해방감, 지옥에서 돌아서게 된 안도감, 생명의 풍성함을 소유함으로서 오는 만족감, 장차 들어갈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에서 오는 감격스런 기대감, 죽음의 공포를 벗어버린 평안함 등등이 모두 합하여 물밀 듯 밀려오는 환희를 갖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주님과 교제하는 그 기쁨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잔치와는 달리 금식은 회개와 절제와 근신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또 기도의 응답을 간절히 원할 때에도 금식하였습니다. 구약 시대 때 하나님은 율법으로 속죄 절기에 금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또 온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실 때도 금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금식 명령의 궁극적 목적은, 육체의 탐심을 죽이고 죄를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신앙을 지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큰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금식기도 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금식은 주님도 공생애 시작하기 전 40일 동안 하셨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사실 금식은 우리 기독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도 합니다. 아니 더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욕망을 금식으로 없애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욕주의 종교의 간판이 곧 금식입니다. 그러나 인본적인 금욕주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기도와 은사의 능력을 더하게 하기 위해 하는 신앙적 금식은 옳은 금식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행하는 금식, 사람들에게 자기 경건함을 보이려고 하는 금식, 그리고 인간의 욕구를 모두 악한 것으로 여기고 억누르려고 하는 금식은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금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히 금식의 목적을 이루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기독교적 금욕의 방법이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 곧 모든 더러운 욕망을 이기는 금식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가르침을 배제하고 인간적인 금욕 방법과 위선적인 금식은 인본적인 금욕주의요, 성경은 이와 같은 행위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천부적인 본능을 선한 방향에 써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금욕의 본질이요 목적입니다. 무조건 인간의 본능은 악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 여기고 억누르기만 하는 세상 종교의 금욕주의는 진리에 어긋난 종교 행위인 것입니다. 이 인본적 금욕주의를 경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성에게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배우자 그것도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이별하는 불행을 당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이 사실 종종 발생합니다. 예전에는 전쟁으로 인해 신랑을 군대에 빼앗기는 일을 당하는 예가 많았고, 지금은 교통사고 같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신혼부부가 그 배우자를 잃는 불행을 종종 당하곤 합니다. 그런 일로 신랑을 잃은 신부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에 얼이 빠지고 태산 같은 슬픔에 짓눌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을 따르다보면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기뻐하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함께 영광스러운 환영을 받았던 제자들처럼,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핍박도 당하고 큰 손해도 당합니다. 말할 수 없는 삶의 비극에 슬퍼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모든 슬픔들은 큰 기쁨의 씨앗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불행은 하늘 상급의 증거물이 되고, 주님의 징계로 당하는 슬픈 일은 후에 영원한 기쁨의 열매를 산출하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배우자의 사별이나,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는 불행도, 결국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고 천국만을 더욱 소망하게 하는 성숙한 신앙의 열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슬픔은 기쁨의 씨앗이요 축복의 씨앗인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은 잠시요, 영원한 기쁨의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 슬픔과 불행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떠나신 것 같은 소외감에 두려우십니까?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을 주님 손에서 빼앗을 자도 없습니다. 주님의 징계로 슬픔 속에 있든, 삶의 재난 때문에 슬픔에 빠졌든, 모든 것을 성도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섭리하시는 주님의 섭리로 인해, 마침내는 현재의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열매로 얻을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즉 헌 베옷을 새 베옷 감으로 기우면 옷이 망가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옷감은 베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얼기설기 짠 값싼 베옷을 입었고, 부자들은 아주 세밀하게 짠 세마포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옷의 단점은 잘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베옷은 금세 낡고 또 새 베옷 감으로 기울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베옷 감을 덧대어 찢어진 낡은 옷을 기우면, 새 베옷 감이 물세탁 후 줄어드는 성질로 인해 낡은 옷이 찢어져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정한 종교적 금욕 규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신앙을 못 쓰게 만드는 생베 조각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인간들이 만든 금욕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들이 만든 형식적 종교 규례나 의식이, 죄로부터 인간을 구해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탄의 최면술에 걸려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게 만들고 경건한 자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규례들을 벗어 던지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새롭게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백하기를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옷은 때 묻은 옷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걸레가 다 된 너덜너덜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옷을 아무리 수선해서 입어봐야 그 몰골은 거지일 뿐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구속의 법을 만들어 주사 의의 새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율법과 인간이 만든 규례는 결코 하나님 앞에 입고 들어갈 의의 옷을 죄인들에게 입혀 줄 수 없습니다. 자꾸 그 신앙을 찢어지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적인 옷을 꿰매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아예 더러운 옷과 같은 인간의 의를 벗겨 버리고, 새로운 천국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려고 오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벌써 의의 옷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되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입혀 주신 의의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늘 희게 하여 그 흰 빛깔을 유지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포도주를 저장할 때는 아직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저장하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유리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죽 부대는 동물의 몸에서 통째로 벗긴 가죽을 말합니다. 발과 꼬리의 구멍들은 끈으로 묶었으며 목 부분만을 가죽 부대의 입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이 가죽 부대들이 아직도 주머니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죽이 새 것일 때에는 신축성이 있으나, 낡아지면 뻣뻣해져서 압력을 받으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새 술을 담아서 말라빠진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대와 술이 모두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았을 경우에는, 발효되어 팽창하게 되어도 신축성이 있으므로 보존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낡은 가죽 부대였을 경우에는 신축성이 없으므로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어느 부분인가 터져버림으로 포도주와 부대 모두를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이 비유의 의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씀이 이 비유의 의미를 밝혀주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것이 되는 포도주와, 이차적인 물질인 가죽 부대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신이 전파한 천국 복음을 새 포도주로, 그리고 당시의 신앙 전통과, 행동 양식 등을 부대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율법주의는 복음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낡은 가죽 부대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진리는 율법주의의 낡은 형식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교는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낡아진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들은 필연적으로 유대교적 낡은 부대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새 부대의 필요성

포도주 부대는 거기에 담겨질 포도주가 없이는 불필요한 것이어서, 부대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대 자체는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부대는 내용물을 잘 담아 변질 없이 보존이 가능할 때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물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낡은 부대와도 같은 그들의 전통과 왜곡된 의식만을 고집함으로, 새 포도주와도 같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거부하며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 1:11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됩니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대교의 고루한 사상을 낡은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대교가 자신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어서 주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주의에 의해 굳어진 마음과 의식을 깨치고, 열려진 마음 새로운 심령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먼저 내 자신이 새 가죽 부대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비유’는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낡은 종교 의식과 규례에 머물러서는 메시아 그리스도와 그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의미로 주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자꾸 발효합니다. 그래서 낡은 가죽 부대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찢어져서 포도주를 다 쏟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이 교훈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생의 은혜를 헛되게 쏟고 말았습니다. 

낡은 인본주의 종교 의식을 버리지 못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대신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저지른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바라바 때문에 이스라엘은 로마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주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바라바식 유혈 투쟁으로 로마를 대적한 결과 주후 70년 경 로마 군대에게 몇 백만 명이 학살되고, 성전은 흔적도 없이 파괴당했으며, 백성들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낡은 가죽 부대처럼 터지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증가하는 은혜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늘 새롭습니다. 포도주처럼 발효합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신앙 의식과 그릇도 새롭게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받고, 깨닫고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낡은 신앙 관습과 아집을 고수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다 쏟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릴 용기가 있는가? 

나는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릴 용기가 있는가? 자가진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또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전통과 고정관념 틀을 과감하게 던져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신앙 그릇을 더욱 새롭게 빚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라면 언제든지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그릇들이 되어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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