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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만히 서서 (출 1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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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서 (출 14:10~14)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어려운 때에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영국군 지휘관인 더글라스 헤이그에게 그의 친구가 묻기를 ‘낙심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이그 장군이 말하기를 “낙심이라니!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대로 낙심할 권리가 없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이지요.
성도란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다할지라도 낙심하고 절망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430년간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애굽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의 탈출을 양해했던 바로 왕은 곧바로 추격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혔고, 뒤에는 애굽의 추격대가 따라붙어 진퇴양난의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역사 현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 믿음의 기도를 드리자.
㉡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가지자.

1. 믿음의 기도를 드리자

기도면 기도지, 왜 믿음의 기도를 드리자고 합니까?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상태의 변화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출 14:8절을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고 했고, 
이어 출 14:10절을 보면 “…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출 14:12절을 보면 “…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담대히 나갔다가 사태가 위급해지니까 두려워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해놓고 원망했습니다. 
신앙의 점진적인 퇴보를 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때때로 ‘신앙인’이란 이름은 가졌지만 신앙의 알맹이를 상실해가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곤 합니다. 

본문을 좀 더 설명해보지요! 

① 바로의 아들을 포함해서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이 온 애굽을 휩쓸자 바로가 놀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발 더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떠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은 보무도 당당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떠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8절)” 
‘담대히 떠났다’라는 말의 뜻은 ‘손을 높이 들고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때만 해도 저들은 ‘이 일은 하나님의 승리’라고 믿고 손을 높이 들고 떠날 수 있었습니다.

② 그런데 그들의 무리가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 전차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추격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0절)”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은 구약성서 안의 모든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인간의 부르짖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출애굽 구원사건을 보십시오. 
출3: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의 손길을 펼쳤다고 했습니다. 

사사를 세운 것도 보십시오.
삿2:18절 “…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음으로.......” 
가나안 입주 후 외적의 침입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도구로 사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삶의 정황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③ 그런데 문제는 큰소리로 부르짖고, ‘믿습니다.’ 라고 기도한 후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11절)”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2절)”
실컷 기도해 놓고, 자기연민에 빠져 삶을 한탄하고, 남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르짖음도 기도입니까? 
어쩌면 신세타령이나 넋두리가 아닐까요? 
우리 자신들도 얼마나 자주 이런 지경에 빠집니까?

그래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믿음의 기도는 담대함과 평안을 가져오지만 불신앙의 기도는 자기 연민을 가져온다.”라고 했습니다. 
불신앙의 기도가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한 기도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기의 불쌍한 처지를 자주 확인하기 때문에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 자신을 마냥 처량하고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내 삶은 왜 이렇게 꼬일까?”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을까?” “내 삶은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헤쳐 나갈 구멍이 없네.” 

기도하는 사람이 예배당을 나갈 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차서, 축 쳐진 어깨를 들먹이며, 끌듯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를 드립시다! 
믿음의 기도는 담대함과 평강을 줍니다!

한나의 기도의 태도를 보십시오. 
한나에게는 결혼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태기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 결혼한 여인에게 태기가 없다는 것은 천형을 받은 여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브닌나라는 첩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브닌나의 멸시가 만만치 않습니다. 
한나는 이중의 고통을 싸안고 실로 성소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소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애절했는지........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삼상 1:10-11)” 

마치 실성한 여인처럼 매어 달렸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기도를 끝낸 다음 가진 태도를 보십시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얼굴에 근심 빛이 사라지고,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생기가 돌면서 웃음과 평강을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까.......”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시지 않으셨어!”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으셨어!” 라고 하나님의 사랑, 그의 능력, 그의 지혜를 철저히 신뢰하고 드리는 기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가지자. 

출14:13-14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분명하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① “가만히 서서”라는 말은 행위무용론을 주장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앙을 가지면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②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어떻게 뒤에서는 애굽의 전차가 달려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서 일순간에 멸망당할 위급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책임회피인가? 과대망상인가?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힘의 우위만이 타당한 방책이 되는 현실에서 힘이 아니라 절대 신앙이란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역사는 이 역설적 진리가 진실임을 우리들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절대 신앙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삼상 17장은 블레셋의 거인 장군 골리앗과 소년 목동 다윗과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골리앗 장군은 백전노장인데다가 갑옷을 입고 창과 단창을 들고 나왔습니다. 
목동 다윗은 양을 치던 작대기와 매끄러운 물맷돌 5개를 들고 나왔습니다. 

싸움이 되겠습니까? 
싸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골리앗 장군은 물맷돌 한 방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소년 다윗이 이긴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이 이긴 것입니다. 
그 당시 이 역사적 진실을 놓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했습니다.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왕 베가가 남유다왕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왕 아하스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언자 이사야는 그 유다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사 7:1-9절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조용히 하십시오. 아람왕과 북이스라엘왕이 격노한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모두 연기 나는 두 개의 부지깽이 끄트머리에 불과합니다. 만일 당신께서 하나님을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어라!’ 
아람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의 군사동맹보다도 하나님 절대 신앙이 더 무섭고 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만이 승리와 안전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국의 군대가 불란서의 해안 던키크로부터 철수해 온 이후로 영국 본토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독일의 공격을 막을 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영국의 전함은 노르웨이 해안 작전에서 47척이 침몰되었고, 폭격기의 40%는 이미 격추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대에는 무기와 각종 군수품이 고갈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던키크 철수작전 때에 영국은 불란서 땅에다 5만대의 차량을 버리고 왔습니다. 
단 한 가지 영국이 불란서 땅에다 남겨두지 않고 가지고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외치기를 “우리가 가진 탱크의 수가 50대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한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사실 영국은 이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영국은 하나님 절대 신앙으로 누구도 예상치 못할 승리를 얻었습니다. 
절대 신앙만이 절대 안전을 줍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함석헌 선생님과 함께 ‘성서조선’운동을 하셨던 유영모 선생님이라는 분이계십니다.
그 분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땅’이란 ‘딴딴하다’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딴딴하니 뭔가 믿음직스럽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땅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하늘’이란 ‘하늘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하늘하늘’
뭔가 보일락 말락, 잡힐락 말락 한 것이 아닙니까?
불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의지하지 않아요.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딴딴한 것들을 내려놓고, 하늘하늘 한 하나님을 붙들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Mission Life에 나온 인터뷰 기사내용입니다.
춘천에 감리교 권사인 순수자 권사님이 계세요.
이분이 동생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사업이 망해 억지 춘향으로 동생의 회사를 맡게 됐습니다.
주부가 어떻게 사업을 하겠어요? 
그래서 새벽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가 뭘 하겠습니까?”
하루는 새벽기도 중에 “당뇨병환자를 도우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당뇨병환자를 어떻게 돕습니까?”
“오팔을 찾아라.”
그래서 동네방네, 아는 사람마다 붙잡고 ‘오팔’이 뭐냐고 물어봤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여러분, 오팔이 뭔지 아세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서울대 약대 교수인 ‘한’ 모교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오팔이란 멕시코 청정사막에서 자라는 알로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렵사리 구해서 약학실험을 해보니 당뇨병에 특별한 효능을 가진 물질이 있어요.
그래서 손수자 권사님과 그 교수님이 공동으로 건강식품회사를 차렸는데, 그 회사 이름이 ‘해나신약’입니다.
해나신약은 년 ,1200억 원 매출합니다.
이 권사님이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학의 시대에는 이성이 하나님 신앙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라는 안타까운 질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앙하십시오. 

하나님 절대 신앙으로 이미 승리한 줄 알고 싸우십시오, 이미 성취한 줄 알고 시작하십시오, 이미 얻은 줄 알고 기도하십시오. 
너무 역설적이어서 납득하기 힘들지는 모르지만 신앙적인 진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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