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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 (창 12:1~4, 히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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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을 사는 기초 (창 12:1~4, 히 4:12~13)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신앙의 초점을 잃어버린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하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셨다. 로고스로서 존재하시던 하나님 자신이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히12:2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영적 생활의 길은 단순하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는 추상적인 영성 생활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생활이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쓰고 머리로 익혀가는 사실적인 영성 생활이다. 

신앙 생활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영성 생활의 길이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아브람을 보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세 가지의 모습이 있다. 

  
1. 말씀을 따라간다. (창12:4)

아브라함은 75세였을 때 하란을 떠났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이다. 고향과 친척, 아비 집 그것은 익숙한 곳이다. 정든 곳이다. 혈육으로 얽혀 있는 곳이다. 삶의 여건이 어떠하든 고향은 안전하고 낯설지 않으며 친척들은 삶의 지지자들이다. 아버지의 집은 삶의 모든 방식을 대물림 해주는 생명의 요람이다. 그런데 이런 장소를 떠난 아브라함의 행동은 무엇인가? 말씀 때문이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되고 믿음의 아비가 될 수 있는 그 이유는 말씀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삶이 될수록 시련은 적다. 시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하였다. 
  

2. 환경을 따라 움직인다. (창12:10)

창12:10 “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먹고 사는 문제가 아브람에게 직면했을 때 아브람은 임기응변의 사람이 된다.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쪼개어 내던졌던 아브람이 기근의 포로가 되어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땅, 가나안에 머물지 못하고 먹거리를 위해 애굽에 간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도 누이라고 말하기로 모의하고 거짓말을 앞세워서 간다. 아브람은 자신이 환경을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은 먹어야 그 다음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가? 생존의 문제 앞에 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창12:18~19을 보면 아브람은 결국 기근을 해결하려는 환경을 좇아가다가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내를 되돌려 받게 되었으나 아브람은 사실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할 자가 환경을 따라 가는 것은 불행이다. 위기에 봉착한 것은 말씀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3. 이성과 감성을 따라 움직인다. (창13:8)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났다. 그런데 아브람은 친척 롯을 데리고 떠났다. 말씀을 좇아가는 아브람의 순종은 100%인줄 알았는데 99%였다. 무슨 뜻인가? 아비가 일찍 죽은 롯은 아브람에게 조카이지만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없는 아브람의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조카 롯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창13:7에서 목초지가 좋으므로 골육간 다툼이 벌어진다.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의 땅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족이 서로 다툰다. 그래서 아브람은 형제, 친척들의 다툼을 보면서 제안을 한다. 창13:8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드디어 아브람은 친척 롯과의 분리를 시도한다. 그는 사실 말씀을 따라 움직였으나 1%의 문제를 불순종하였다. 이성과 감성을 따라 아비 없는 조카, 아들처럼 길러온 조카, 그를 떼어버린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1%의 불순종이라고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브람은 목초지 분쟁을 통해 1%의 불순종을 깨닫는다. 그는 말씀을 좇지만 이성과 감성을 따라 움직이는 자신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창15:2을 보면 아브람의 가정에 아기가 없어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의 노종의 자식으로 상속자로 삼으려는 아브람의 의도를 볼 수 있고 창16:2을 보면 하갈의 몸종을 통해 자녀를 얻으려는 사래의 의도를 볼 수 있고 창16:5에 인간의 방법으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낳는데 이 이스마엘로 인해 사래가 받은 갈등과 서러움이 얼마나 컸는가? 만약 처음부터 이 시간까지 조카 롯을 데리고 있었다면 불거진 문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아마도 아브람의 가정의 양아들로서 입양되고 차후 큰 문제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이성과 감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도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쓰여지는 좋은 기능들이다. 그러나 말씀과 이성이 조화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이성과 감성에 의해 말씀이 오용되거나 말씀의 명령이 이성과 감성에 배치될 때는 이성과 감성으로 움직이면 안된다. 영성 생활에 있어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말씀과 이성의 문제다. 언제나 말씀을 따라 가는 것 같은데 1%의 순종이 안되는 것은 바로 이성과 감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보다 더 차원 높은 신앙,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성숙을 위해 계속적인 사건으로 다듬어 가셨다. 이렇게 보면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제일 주요한 코스다.

교회에서 신앙 생활의 성장을 위해 많은 것을 훈련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리처드 포스터는 내적 훈련으로 묵상 훈련, 기도 훈련, 금식 훈련, 학습 훈련을 말한다. 외적 훈련으로는 단순성의 훈련, 홀로있기의 훈련, 복종의 훈련, 섬김의 훈련을 말한다. 단체 훈련으로는 고백의 훈련, 예배의 훈련, 인도하심을 받는 훈련, 기뻐하는 훈련을 말한다. 참으로 좋은 제안이다. 포스터 교수의 책을 읽고 너무 감사하였다. 그런데 나는 확신을 갖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모든 12개 훈련에 속하지는 않지만 가장 으뜸 가는 영성 생활의 원리는 말씀을 좇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기본기다. 무엇을 하든 기본기다. 

그러므로 말씀을 따르기 위해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성경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다섯 손가락으로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말씀을 좇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5가지 중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읽기다. 사서삼경을 암송한다는 양주동 교수는 예수쟁이들을 핀잔하기를 “성경 한 권도 외우지 못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민망해 보인다.”고 하였다. 주자는 “공자, 맹자가 내 가슴 속에 들어 앉도록 경서를 수백 수 천번 익어야 정통해진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말씀을 따라갈 수 있다. 

우리 교회 안군자 권사님은 붓글씨를 써서 교회에 붙혀 놓았다. 그 권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글을 쓴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면 벼룩에 먹을 갈아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먹 꼬투리가 모아져 한 말이 될 정도가 되어야 “내가 요즘 글을 좀 씁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생명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한다는 우리들이 말씀을 읽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가? 또 어떻게 말씀을 따라 가는 생활을 잘 한다고 할 수 있는가? 말씀을 읽지 않으면 힘이 없다. 그래서 가짜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다. 
  
① 금년에 성경 전체를 통독하려는 결심을 하자.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10,000번 읽어서 암송했다고 한다. 6.25 당시 순교하신 최원초 목사님은 빌립보서만 3,000번, 요한계시록을 100,000번 읽었다고 한다. 이인구 권사님의 어머니는 성경을 1시간 동안 암송하신다고 한다. 우리 교회 노인부에 오셔서 로마서를 다 통독하셨다. 

나는 ‘성경 몇 독이나 했는가?’라고 물으면 부끄러워서 말을 못한다. 그 동안 목회를 하면서 요한계시록을 3번 강해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한 시간도 안 걸린다. 1장부터 22장까지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신나고 얼마나 승리와 축복을 보장하시는지...

나는 금년에 성경 읽기에 도전한다. 여러분 성경 읽기를 삶의 우선에 두고 시간을 그렇게 고정시키자. 말씀을 따라 살려면 성경을 읽는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10분이라도, 30분이라도 결심하라. 성경 통독 시간은 1회 51시간 22분, 2회 48시간 32분이 소요된다. 이것은 실험의 결과다. 알고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주일만 합독하면 되는 일이다.
  
② 시간을 정해놓았으면 읽기 전략을 세우라.

자기의 체질에 따라서 창세기부터 계속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으면 그렇게 읽으라. 또 그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면 신약과 병행하여 읽어라. 너무 어려운 부분부터 읽지 말고 호감이 가는 부분부터 읽어라. 이처럼 읽기 전략을 세우라. 읽기 어려운 시간의 쫓김 속에 있다면 테잎이나 CD를 이용하라. 자동차 운전할 때, 설거지를 하면서 듣는 방법으로 읽어라. 양식을 굶을 수 없듯이 말씀 읽기를 굶을 수 없다고 다짐하라.
  
③ 간절히 기도하라.

성경 읽기를 방해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사실 영적 방해가 문제다. 마귀는 우리의 심령에 말씀이 떨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가라지로 가득해야 하는데 말씀이 심겨진다면 사람의 심령이 거룩해진다. 그리고 복이 있는 사람이 된다. 악한 마귀는 그것을 싫어하여 그냥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 읽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읽기 전에, 읽은 후에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성경 읽기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④ 성경을 읽는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

성경은 어른을 위한 책이다. 그 책을 설명해주는 공부를 같이 한다면 성경의 전체적인 맥이 보이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보이게 된다. 성경 통독반은 김신애 사모가 인도하고 있다.
  
⑤ 몰입하라.

시계를 의식하지 말고 몰입하여 읽으라. 연필을 들고 몰입하여 성경을 메모하며 읽으라. 나는 색연필을 깎았다. 밑줄을 그으면서 몰입하여 읽으라. 어디서든지 읽으라. 유대인들을 책의 백성이라 부른다. 즉 성경을 읽는 백성이란 뜻이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성경을 읽는다. 장바구니에도 성경이 들어있다. 버스 정류장, 차, 비행기 안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정통 유대인들이 사는 예루살렘 구 시가지 가게 정원도 손님이 뜸하면 성경을 읽는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 형벌이다. 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이 저주다. 우리는 성경 읽기가 곧 축복의 지름길, 성장의 지름길, 거룩해지는 지름길이라는 확신으로 몰입하라. 말씀을 읽으면 두뇌가 발달한다. 지혜가 열린다. 잡념이 떠난다. 사탄의 유혹이 힘을 잃는다.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오직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 생활,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읽는 생활, 그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제 1의 원리이다. 말씀이 나를 다듬고 나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 영적 생활의 기초, 말씀을 좇아가는 하루 하루가 우리의 기본기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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