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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원자탄 (롬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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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원자탄 (롬 5:1~8)


‘한국의 성자’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이 있습니다. 손 목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평생 나병환자를 돌보셨습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6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애양원으로 돌아와 1200명의 나병환자를 돌보았습니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으로 공산군에 의해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같이 허물 많은 사람의 혈통 중에 순교자 자식이 나왔다는 사실을 감사합니다. 
3남 3녀 중 가장 늠름하고 아름답고 잘난 장남과 차남을 하나님 앞으로 바치게 된 이것을 감사합니다. 
한 아들순교하기도 어려운데 두 아들이 순교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저들이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두 아들을 총살시킨 그 원수를 내 아들 삼을 수 있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아들들 순교 열매로 하여 무수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출하게 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이는 역경 속에서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며 깊이 기뻐할 수 있는 마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으로 쏴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맞아들입니다. 친아들 이상으로 사랑으로 돌봐줍니다. 이후 6.25사변이 일어나 1950년 9월 새벽기도 중 공산당에 의해 총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순교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양아들 안재선은  "죽은 자 살려놓고 아버지 먼저 가시다니" 통곡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평생을 피고름 나는 나병환자들과 함께 산 목사님, 두 아들을 쏴 죽인 자를 양자로 삼아 친아들처럼 사랑해 주신 목사님, 끝까지 목양일념으로 기도하시다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과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합니다. 사랑하면 목숨까지도 겁니다. 철길에 놀고 있는 자식을 보면 엄마는 죽을 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뛰어듭니다. 자식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사랑의 갈증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제일 흔한 것이 물입니다. 온 천지가 물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나면 제일 얻기 힘든 것, 제일 귀한 것도 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가히 사랑의 홍수시대입니다. TV 드라마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보다는 왜곡된 사랑이 많습니다. 음악을 들어도 대부분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영화나 연극 모두가 사랑을 말합니다. 온 세상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인줄 알고 기뻐했는데 얼마 안가서 시들고 변질됩니다. 참 사랑을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기적인 목적이 숨어있습니다. 진짜 사랑이라고 믿고 마음을 빼앗겼는데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속다보니 사람들은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 다가오면 의심을 합니다. 무슨 의도가 있겠지? 색 안경을 쓰고 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사랑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 조건적이거나 결코 이기적이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갈증을 해소시켜 줄 큰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만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불행도 다 사라집니다. 이 사랑에 눈을 뜨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선하게 변화됩니다. 이 사랑을 받으면 절망가운데 있던 사람도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다른 종교의 신들은 인간이 절대자를 먼저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사랑의 손길로 찾아오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외쳐도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개미를 무척 사랑하는 꿀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개미들이 떼를 지어서 먹이를 물고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물 한바가지를 들고 쏟으려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순간에 개미들이 죽을 수 있는 위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미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아주머니를 말리면 가장 좋은 것이겠지만 그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꿀벌의 언어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개미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개미가 되는 것입니다. 개미의 언어로 위급한 신호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선지자를 보내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위기를 경고하시지만 완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이 인간이 되기로 결정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사랑을 직접 보여주시고, 확인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고 오셨습니다. 가장 높고 위대하신 분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가장 낮고 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성육신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됩니다. 십자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을 연결시킵니다.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줍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강같이 흘러 온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강물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사건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증명하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사랑을 확인하려고 좋아하는 선물을 줍니다. 때로는 값비싼 반지를 준비하여 사랑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분의 사랑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통해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랑은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외침이요 절규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사랑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누립니다. 환난 중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아직 연약할 때 사랑하십니다.(6절)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사랑해 주십니다. "연약하다"라는 말은 "전혀 힘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무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능할 때에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린 것은 내 안에 어떤 구원받을 만한 힘이나 능력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들이 철저하게 연약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가 물으면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 분을 알기 전부터 이미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여 졌습니다. 그리하여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들, 경건치 못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경건치 못한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기약대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남을 위하여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죽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매우 드물게 선한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를 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매스컴에서 야단법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깨닫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벌써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태도와 상관없이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무기력할 그 때에도,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사는 그 순간에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겨주십니다. 내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버티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를 드러내면 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나의 무능력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릴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 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 주소서”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사랑하십니다.(8절)
 
본문 8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6절에서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말씀하셨다면 8절에서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들이 여전히 죄인의 신분으로 머물 때입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 마땅한 삶을 살 때입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었습니다. 혀로는 속임을 베풀었습니다. 입술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피를 흘리는 데 빠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죄에 매여 있는 우리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내 사랑하는 아들을 버릴 만큼 사랑한다” 라고 시위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죄에 종 되었던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더 이상 율법의 멍에에 시달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한 아이가 새 총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집 앞에 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우는 거위가 뒤뚱거리며 다가옵니다. 숨을 죽이고 새 총을 힘껏 거위를 향해 날립니다. 그런데 거위가 머리에 정통으로 맞아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습니다. 여기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실수입니다. 아이는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아버지에게 꾸중들을 생각을 하니까 이 거위를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싹트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뒷마당에 거위를 묻고 놉니다.
 
이제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녁에 들어와서 아버지가 묻습니다. “거위가 안 보인다. 애야 거위 못 봤냐” “아버지 못봤는데요” 시치미를 뚝 떼며 거짓말합니다. 죄가 점점 아이의 마음 속에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집에 있는 하인 아이 봤습니다. 집안에 어른들이 없을 때에 “얘! 너 물 좀 길어 올래” “네가 길어 올 물을 내가 왜 길어와” 하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 거위 죽이는 것 봤거든. 네가 저 뒤뜰에 거위 묻는 것 봤거든” 꼼짝없이 하인의 종이 됐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 날 이후로 이 아이는 하인의 종이 되고 맙니다. 설거지를 하라면 설거지를 합니다. 청소를 하라고 하면 청소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죄의 종이 되어 살삽니다. 아버지와의 화평이 깨어지고 맙니다. 아버지가 큰 소리만 내도 자기 잘못이 발각된 줄 알고 놀랍니다.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습니다. 그 마음에 근심 염려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아버지 그 거위 내가 죽였습니다.” 꾸중할 줄 알았는데 뜻 밖에도 “아들아! 거위가 귀하겠니, 내 아들이 귀하겠니. 거위 열 마리가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정직하게 찾아와서 고백했으니 아버지는 기쁘고 행복하다” 칭찬을 하십니다.
 
그 다음날 하인아이가 “야, 물 좀 길어올래” 그 때 아들이 당당히 말합니다.  “내가 왜 길어와” 그러자 하인아이가 말합니다. “내가 너 거위 죽이는 것 봤거든” “그래서” “뒤뜰에 묻는 것 봤거든” “아버지 어머니한테 이른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일러라. 나는 자유다” 

죄의 종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함을 빼앗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삶에 염려와 근심이 점점 쌓여 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내 죄를 다 고하고 나면 자유한 종이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기가 죽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자유자임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의 상태에 신음하고 있을 그 때에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의 매여 종노릇하지 마십시오. 이 시간 놀라우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다 고백하고 내려놓으십시오.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삶을 누리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요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원수된 모습까지도 사랑하십니다.(10절)
 
10절 말씀을 보시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에도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도 사랑해 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랑해 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무능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자였습니다. 불순종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오늘도 동일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2-29절까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가를 말씀해 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선포합니다.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이 의롭다고 한 자를 정죄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하고, 죄인의 삶에 방황하고, 심지어 원수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에 반응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그 사랑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변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으로 빠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내 힘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이 그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수십만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은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 자신들이 사랑의 원자탄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그 사랑으로 너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 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내 안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사랑해야 할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해를 맞이하여 성령님을 통해 부어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차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가운데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3:17)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인하여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기뻐 춤추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찬양드리기 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항상 고백하며, 우리 모두가 사랑의 원자탄이 되어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평화가 넘치는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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