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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5) 요단강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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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5) 요단강 (마 3:13~17)


제가 어렸을 때 만해도 시골의 장례식에서는 주로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유족과 조객들이 그 뒤를 따르곤 했습니다. 그때 기독교인의 장례라면 어김없이 상여를 따르며 부르던 노래가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였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이 기억나는 한 풍경은 장지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 상여를 따라 걷던 한 소년이 쓰러질 듯 엄마에게 매달리며 “엄마 왜 그렇게 요단강이 멀어?”라고 묻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요단강을 함께 방문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 때문에 이 강의 이미지를 죽음의 의미로만 연상하기 쉬우나 이 강은 성지에서 이스라엘로서는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한 생명의 강입니다. 이 강으로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가적 경계가 형성 되고, 북의 갈릴리와 남의 사해 바다를 연결하는 강이기도 합니다. 북쪽 끝에 위치한 헬몬 산에서 발원하여 훌라 계곡을 따라 갈릴리 호수와 연결되는 것을 보통 상부 요단, 갈릴리 호수 남 하구에서 요단 계곡을 따라 사해에 이르는 곳을 하부 요단이라고 부르는데 전체 길이가 250km에 달하는 강입니다. 그 폭은 20-30m정도이지만 몇 미터에 달하는 아주 좁은 곳도 있습니다. 우기에는 큰 강을 이루고, 건기에는 그냥 계곡을 이루고 있는데 지금의 요단강은 구약시대나 예수님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비좁아진 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강에서 일어난 많은 성서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이 강을 건너 지금의 요르단 국가에서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여기에서 ‘침례 요한’(세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지금도 성지 순례 객들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은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본래의 침례 장소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 근처 알레비 다리 가까운 곳) 야르데니트(Yardenit)라고 곳에서 침례 식을 실시합니다. 이 침례소의 벽에는 우리 교회가 세운 한글 성구판도 부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침례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공생애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요한에게 받으신 침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우리가 따라 올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침례(세례)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새 사람이 된 것을 공포하는 의식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하신 예수님은 죄 성이 없었던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침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침례를 일컬어 ‘모범 침례’ 혹은 ‘동일시의 침례’라고 말합니다. 

‘동일시의 침례’란 하나님이신 그분이 죄인인 인간과 동일시 되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서 침례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모범 침례’란 예수님을 따르게 될 그의 제자들이 침례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을 따라 오도록 그분 자신은 침례의 필요가 없었지만 온전히 모범이 되시고자 하는 의도로 침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우리가 따라갈 삶의 모범이라고 성경도 가르치지 않습니까? 

벧전2:21을 기억하십니까?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으니” 그렇다면 그의 침례도 우리가 따라 갈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성령의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성령에 이끌리는 평생을 사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분위에 임하셨다고 증언하지 않았습니까!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그리고 본문에 이어지는 마태4:1에 보면 예수께서는 바로 그 성령에 이끄심을 받아 광야로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며 성령에 이끄심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위대한 삶을 흉내라도 내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여러분은 혹시 역사를 통해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기독교 도서를 아십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라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 이유를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용이상으로 제목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사놓고 가장 읽히지 못하는 책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책 <그리스도를 본 받아>가 끊임없이 모든 시대 그리스도인의 관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우리의 열망이요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열망과 고민에 대한 해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의 이끄심을 받으실 필요가 있으셨다면 아직도 불완전함과 연역함으로 흔들리며 사는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며 살아야 할까요?


2. 새로운 삶의 시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요단강 침례는 우리 주님의 공생애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롬6:3-4은 성경에서 침례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와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라.” 

이미 우리는 침례가 ‘동일시’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구절에서는 ‘연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그리고 그의 부활에 연합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침례교회에서 ‘침수례’(immersion)를 시행할 때 우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는 나의 장례식이요, 물 밖으로 나옴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기 위한 나의 부활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는 이제 진정한 새 삶의 시작을 공포하는 공적인 선언의 순간인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하면 부부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결혼식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공식적으로 부부의 삶을 인정해 주고 확인해 주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때부터 부부는 편안하게 공인된 부부의 삶을 공식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침례식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도로서의 공적인 새 삶을 살게 하는 시작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침례이후 성도들은 정말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일상을 날마다의 삶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으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사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그 대답을 롬6:11의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들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섬기는 일들에 대하여는 펄펄 살아있는 자로 반응하며 인생을 사는 것-바로 그런 새 인생이 우리에게서 시작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순종의 시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가 공생애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인류의 대 제사장이 되기 위한 소명의 삶의 시작이시기도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약의 제사장도 30세(민4:3)에 제사장에 취임하였고, 제사장의 취임 의식 가운데 하나가 전신을 물에 잠그고 나오는 목욕 의식이었습니다.(레15-16장)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는 자신의 거룩한 몸을 제물 삼아 갈보리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는 대 제사장의 소명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요단강 침례는 이 거룩한 구속 사역에 대한 순종을 뜻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막10:45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소명에 순종하시기 위해 그가 요단강에 몸을 잠그실 때 어찌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수 있으셨겠습니까? 본문 17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침례는 여전히 순종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우선 우리중에 아직 교회 나와 예수를 믿으면서도 침례에 순종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이 일부터 순종하십시오. 침례는 그를 따르기 시작한 사람들을 향한 주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지상 명령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마태28:19)가 아닙니까? 그리고 침례를 계기로 그 분의 명을 따르는 진정한 삶을 시작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때로는 그의 명을 따름이 내게 고난이고 손실이고 아픔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지난해 성탄절에 우리는 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한인 교포 28살난 로버트 박(한국명, 박동훈)이라는 청년이 북한 땅에 인권을 촉구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자기를 구출하지 말아 달라고 자기는 죽으러 간다고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통해 북한 땅에 인권이 존중되는 인류적 각성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단신 북으로 간 것입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신문들과 방송 매체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일종의 만용과 영웅심으로 일을 저지른 식으로 보도한 후 아직도 이 사건은 기이한 침묵 속에 관심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입에서만 회자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그에 관한 진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미국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Born-again한후 노숙자 선교와 멕시코 빈민 선교를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특별한 소명을 느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미국 교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북한의 비참한 인권 상황을 인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부터 전 세계 북한 인권 및 탈북자 관련 100여개 단체의 네트워크인 <자유와 생명 2009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한국에도 자주 방문하면서 탈북한 이들과 교제하며 북한 해방과 탈북자들의 보호가 그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어왔다고 합니다. 탈북자들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그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탈북자들을 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곤해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작은 예수>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작년 가을 이래 주님이 자기를 북으로 부르시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렸지만 그는 주님이 가라고 하면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북으로 가기 직전에 그는 자기가 잡히면 오바마가 자기를 돕기를 원하지 않는다고북한 백성들이 자유를 얻기 전에 자신은 돌아오지 않겠다고북한 당국이 자기를 죽인다면 자신은 북녘 땅의 수용소에서 짓밟히고 있는 10만 이상의 무죄한 남녀 노소들과 기꺼이 함께 죽겠다고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이 순종이라면 누가 이 청년을 감히 비웃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는 우리도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종의 걸음을 결단해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요단강의 침례에 순종하신 예수님은 3년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며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바로 그의 제자들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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