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약속 (사 49:14~21)

  • 잡초 잡초
  • 237
  • 0

첨부 1


하나님의 약속 (사 49:14~21) 


[낮은 울타리]라는 월간지에 실린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 출근길에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옆 차가 바짝 붙어 지나가면서 문짝을 찌익 긁어 놓고 말았습니다. 

차를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는데 상대편의 차를 운전하던 젊은 부인이 허겁지겁 내리는데 많이 놀랐는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운전이 서툴러서요. 변상해 드릴게요.”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는 자기 차 앞쪽이 부서진 것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틀 전에 산 새 차를 이렇게 찌그려 트려 놓았으니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피해자인 남자도 부인이 참 안됐다는 생각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무튼 사고보고서에는 운전면허증과 보험관계서류 등에 관한 내용들을 함께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필요한 서류가 담긴 봉투를 꺼내려고 운전석 옆의 사물함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봉투 속에서 서류들을 꺼내서 건네주면서 “이건 남편이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담아 둔 봉투예요” 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울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그 서류봉투를 건네받아 제일 앞 장에 적힌 글을 봤습니다. 굵은 펜으로 커다랗게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 사고를 냈을 경우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남편이 쓴 글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그 부인을 쳐다봤을 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자동차를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런 사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가끔씩 남편의 사랑을 못 받고 산다고 생각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우리 남편은 나에게 너무 무뚝뚝하고 정이 없다고 푸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남자들의 사랑의 표현은 여자들과 달라서 대체로 오해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뚝뚝한 것 같으나 자상하고, 정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 넘치는 사랑이 있습니다. 

혹시 나는 왜 이렇게 외롭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아내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말로 표현 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인생의 불행은 고독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고독은 소외당하는데서 비롯됩니다. 학원가에서 유행처럼 번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용어가 있습니다. <왕따>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게 소외입니다. 내가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인간은 한 없이 초라해집니다. 내가 왕따 당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인간은 하염없이 고독해지고 그 고독이란 견디기가 너무나 힘든 아픔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독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몰라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모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데서 절망과 낙심이 옵니다. 그 깊은 곳에는 언제나 불신이 있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위로하는 말도 위로로 들리지 않고 조롱하는 말로 들립니다. 이렇게 되면 더욱 깊은 고독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급기야는 사람들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남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나 자신이 나를 버린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내가 버렸고, 내 존재를 나 스스로 버렸기 때문에 고독한 것을 모릅니다. 나아가서 여기에 또 하나의 깊은 문제가 따릅니다. 이런 경우가 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결국 소외라고 하는 인간 스스로의 고독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고 맙니다. 

 이 소외라고 하는 것은 <수평적 관계>에서 옵니다. 즉 인간관계의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는 늘 이 수평적 관계에 매여서 수직적 관계이자 절대적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고, 모든 일이 원만하다 싶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라고 기뻐하면서 하나님이 내 편인 것처럼 여겨 잘하다가도 무엇이 좀 잘못되기 시작하고 인간관계가 비틀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내 곁에서 떠나간다고 불안해 하다가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다.”라며 슬픈 탄식과 함께 신앙적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잘못된 이해요, 비극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이 잘 되고, 형통하고, 명예가 있고, 인기가 있고, 평판이 좋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속된 표현으로 붕 떠서 삽니다. 위선에 빠지고, 거짓에 빠지고, 허영에 빠지고,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하나님 앞에 겸손도 하지 못하고, 진실하지도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권고하시고, 감동케 하시다가 그래도 안 될 때에 마지막에는 그가 의지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십니다. 건강도 빼앗고, 물질도 거두어 가시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빼앗아 가십니다. 홀로 남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꼼짝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무릎 꿇도록, 자기진실을 찾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 사랑을 알기까지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아야만 하는 사랑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겪는 큰 환란이 있습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고난을 겪게 됩니다.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 민족이 희생을 감당하는 아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아픔 속에서 견디지 못한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기 때문에 이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스스로 절망하는 이들의 불신앙이 들어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지은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덕적인 죄, 종교적인 타락... 말할 수 없는 자기들의 죄를 돌아보아야 옳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사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버릴만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섭섭한 게 많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던 약속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49장1절부터 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못하여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는 그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불신앙적인 절망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의 결과는 신앙적 열매입니다. 이런 무지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숱하게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실수해도 절대로 절대로 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로 기억하시느냐하면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잊어버리는 부모가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혹시 어미가 아이를 잊어버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들이 얼마나 실수투성이고, 실패의 전문가들인지 모릅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에게 새해에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겨서 영원히 기억하리라.” 문신처럼 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겠노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입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Life is semi-final(인생은 준결승이다)”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결승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결승점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좌절하기도하며, 절망하기도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결승선에 우뚝 서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교만할 수 있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결승을 향해 나가는 준결승 선에 서서 달려 나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준결승에서 우리가 실패했다고, 우리가 절망하고 있다고 우리를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언젠가는 결승에 도달할 인생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기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세미파이널입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내가 만난 사건 속에, 내가 경험한 문제 속에 언제나 강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태위태한 숱한 상황들 속에서도 오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생각합니다. 형편과 처지가 어떻게 바뀌어도, 상황이 어떻다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런 사랑입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믿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생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시랑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그 교회의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유소를 경영하는 집사님인데 남들이 하는 만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십일조도 충실히 하고 주일예배도 지키는 평균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작년 하반기쯤에 신앙적 각성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만 작년 말이 얼마나 어려운 시기였습니까? 그 어려운 시기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 앞에 정말 부끄럽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에 와 부딪히는 것이 십일조 문제더랍니다. 이 십 만원씩 빠지지 않고 잘했는데 실제로 생각해보니까 한 달에 사백만원은 거뜬히 쓰고 살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기로 하고 제대로 십일조를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새벽기도회도 시작했고 그런데 그 집사님의 집에 연말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들을 한꺼번에 허락하셨습니다. 세를 들어 빌려서 쓰던 주유소를 헐값에 넘겨받게 하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파트가 하나 생기더니 고3이었던 하나뿐인 아들이 [고려대학교에 과 수석]으로 합격했답니다. 

교회에서 이 간증을 하면서 그렇게 감사하며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어렵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심정으로 살았는데 하나님 앞에 먼저 바로 섰더니 하나님이 자기 가정을 잊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 하셨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확실히 알았노라고 감격의 간증을 했답니다. 목사님이 기도해 준 덕분이라면서 양복 한 벌 얻어 입었다고 그 목사님도 자랑하더라구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낙심되더라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작년이 힘들었습니까? 새해 첫 주일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믿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잊지 아니하시고 일 년을 지키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힘찬 출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