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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I) (창 33:18~20, 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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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I) (창 33:18~20, 35:1~7)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라든지 "억장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인생길에 그야말로 충격적인 시련이 닥쳐오게 될 때에 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 보려고' 하는 말입니다.
유명한 신앙의 선조 야곱에게도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금지옥엽처럼 아끼고 귀여워하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 1절과 2절에 그 불행하고도 충격적인 사건의 발단을 기록하기를 "1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2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밧단아람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세겜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중 이제 막 성년에 이른 그의 딸 디나가 그 성읍의 여자들은 어떤 패션 스타일의 옷을 입고 어떻게 놀러 다니는지를 구경하러 나갔다가 그만 불의의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사자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겠지만 야곱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고이고이 길러온 귀여운 딸, 이제 시집갈 나이가 차서 그 사랑스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딸이 어느 난봉꾼에게 걸려 그 몸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그런 딸의 아버지가 받게 되는 충격과 괴로움이란 실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디나가 강간을 당함으로써 시작된 야곱의 역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적인 악재로 파급되었는데, 바로 그의 아들들이 살인범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34장에 이어지는 구절들이 그 전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여동생이 당한 일을 듣게 된 가족들 중에 그녀의 친오빠들, 즉 디나와 같이 레아를 통해 태어난 시므온과 레위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 모의를 꾸몄습니다.
  
디나를 강간한 후에 결혼을 제의해 온 세겜과 그의 아비 하몰의 말에 짐짓 응하는 척하면서 결혼식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겜 집안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 할례를 받고 그 고통 때문에 운신을 못하고 있을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앞장서서 그들을 급습하여 세겜 추장의 가족뿐 아니라 그 성읍의 모든 남자들을 다 칼로 살해하고 약탈까지 자행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복수심에 불타올라서 혈기를 억제하지 못했던 아들들과는 달리 야곱은 그들이 저지른 일이 그 사태를 오히려 훨씬 더 악화시키고 만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가나안 땅에서 '우거하는 자' 즉 본토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 했던 야곱 가족이었는데 이런 엄청난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이제 그들은 꼼짝없이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창 34:30) 즉 주변 이방 부족들과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두 아들들이 저지른 일에 대하여 얼마나 진저리를 쳤든지 그가 죽기 직전에 가서도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라는 저주의 유언을 남길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인하여 야곱의 인생은 아니 그의 온 집안은 결딴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딸은 몸을 버리고 자식들은 살인범으로 지명수배자가 되고 지금까지 어렵게 이루어 왔던 기업도 하루아침에 다 날려버리게 된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비단 야곱만 겪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그저 상황만 다를 뿐이지 자기 인생 전체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시련이 한두 번은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내 인생에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 아니 꿈조차 꾸어 본 적이 없던 일이 그 어느 날 그야말로 예고도 없이 닥쳐와서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풍비박산을 냅니다.
그저 신문 기사에서나 가끔 보았던 일,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어느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가 막히게도 바로 내 집안에서 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잘 되어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배우자가 불치의 병에 걸리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우던 내 자식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닥쳐오게 될 때면, 세상의 그 누구라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마음이 갈가리 찢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들은 비로소 그때까지는 그저 귀로만 들어왔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말이나 '억장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이라는 말의 진짜 뜻을 이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충격적인 인생 역경을 당하게 되는 사람에게는 항상 공통적인 질문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라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런 괴로움을 겪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신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성도 역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때때로 환난과 재앙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서 두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인생의 역경을 당할 때 기독신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베풀어 주고 계시는 축복'을 되새겨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자면 그 최악의 시련을 겪게 되기 직전까지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습니다. 
먼저 창세기 33장 18절 상반절에 보면 "18a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의 더부살이를 끝내고 이제 드디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는 참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그 귀향을 두고 본문에서 "평안히"라는 단어로 수식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재산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의 말마따나 20년 전에는 그저 손에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갔던 그가 지금은 가축을 "두 떼나 이룬"(창 32:10) 갑부가 되어서 돌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고향 가나안 땅으로 평안무사하게 돌아오기까지는 결정적인 위기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우선 그가 밧단아람을 출발할 때에는 외삼촌 라반의 추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야곱으로서는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정당한 사유재산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었지만, 라반이 볼 때에는 조카 야곱이 자기 딸들과 자기 재산을 도적질해서 도망치는 행위로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몰래 떠났다는 소식을 3일이 지난 후에 듣게 되자마자 라반은 곧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야곱 일행을 추격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야곱이 떠나는 것을 두고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축하의 작별인사를 꼭 해야겠다는 의도 때문이 아니었음은 라반이 야곱을 따라잡은 후에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라고 한 말에서도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처럼 원래는 야곱을 잡아 죽이려고 뒤를 바짝 추격한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그 전날 밤에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창 31:24)고 엄중히 사전경고하셨기 때문에 라반은 결국 야곱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위기는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되었을 무렵에도 또 한 번 더 찾아왔습니다.
바로 야곱 때문에 모든 축복권을 상실하고 만 그의 형 에서의 위협이었습니다.
비록 20년 전의 일이지만 에서는 그때의 분한 감정을 여전히 삭이지 못하고 아직도 살기등등한 복수심에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야곱 자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그를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히 두렵고 답답한" 심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얍복강가에서 또 한 번의 위기에 직면한 야곱에게 '브니엘'의 축복을 내려 주심으로써 그는 뜻밖에도 형 에서와 오히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화해의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의 인생 황금기를 다 투자해서 쌓아왔던 것을 한순간에 몽땅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위기가 두 차례나 있었지만 순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 덕분으로 '평안히' 가나안 땅으로,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디나의 사건이 있기 직전까지 야곱이 누리고 있던 순탄스러운 인생은 이어지는 18절 하반절과 19절에 "18b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라고 기록된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곳에 잠시 머무른 것이 아니라 아예 정착을 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는 세겜 성읍 부근에 자신의 "장막"을 쳤을 뿐 아니라 그 장막터에 해당되는 "밭"을 원래 그 땅 주인인 세겜 사람들로부터 "은 일백 개"를 지불하고 매입을 했습니다.
잠시 머물 예정이었다면 그렇게 정식으로 부동산까지 사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므로 야곱은 가나안 땅 중에서도 바로 이 세겜을 자신의 영원한 거주지로 삼을 작정이었던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하여튼 그 일도 순조로웠습니다.
가격 흥정도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졌고 무슨 등기이전 비슷한 법적 수속도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자기네들로서는 이방인에 해당되는 야곱에게 그 땅을 순순히 팔아 주었다는 것은 일종의 '영주권'을 허락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즉 야곱은 그 세겜 성 부근에 땅을 사고 장막을 세움으로써 안정된 가정생활을 확보함과 동시에 자신의 목축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사업의 기반까지 잡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 시점에 이르러서 야곱의 남은 인생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소.'라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모든 사람이 꿈꾸고 있는 행복한 생을 향한 탄탄대로가 활짝 열린 것이나 다름없이 보였습니다. 

이처럼 만사가 '범사에 형통'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야곱의 신앙생활 역시 그저 은혜 충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0절에서 야곱이 "20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고 한 사실에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그는 세겜 성에 자기 살 집만 지은 것이 아니라 '제단'까지 하나 새로 쌓았습니다.
그 제단은 야곱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과 또한 그에게 속한 모든 식솔들이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온 교인들이 다 한 가문에 속한 교회를 하나 세우고 자체 예배당까지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야곱은 그 제단에 이름까지 하나 붙였는데 바로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은 여러분의 관주성경에 표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여기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언뜻 우리 머리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 전에 먼저 '야곱의 새 이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이 얼마 전에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기도로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위골될 정도로 간절히 달라붙은 끝에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고 하시면서 그에게 주셨던 '축복의 새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아주 쉽게 풀이하자면 '하나님은 바로 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든지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등과 같은 은혜로운 명칭들을 '지명(地名)'으로만 지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세워 놓은 가족교회의 간판을 아예 '하나님은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되신 교회'라고 써 붙인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오늘날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느 목사가 개척교회를 세우면서 '아무개 목사의 하나님 교회'라고 교회 이름을 지었다면 당장 노회로부터 징계 내지는 목사 면직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가 세운 제단에 바로 그런 식의 이름까지 지어 붙인 것은 그가 그 시점에 영적으로 얼마나 은혜가 충만했는지, 그 얼마나 축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었는지를 잘 반영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의 세겜에 정착하게 되기까지 연이어졌던 모든 순조로운 과정에 대하여 지극히 만족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외삼촌 라반과의 무난한 작별, 형 에서와의 극적인 해후, 세겜 성읍에서의 합법적인 정착 등 그야말로 '만사형통'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현실을 돌아볼 때에 정말 '하나님은 야곱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록 34장에 와서는 그처럼 충격적인 시련과 역경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바로 그 직전까지 이처럼 야곱은 모든 면에서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성도가 어려운 환난을 당하게 될 때일수록 제일 먼저 상기해야 할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게"(마 5:45) 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자이든지 불신자이든지 간에 그 인생 전체를 일방적인 순경이나 일방적인 역경으로만 채우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자라고 해서 그의 평생을 내내 '좋은 일'만 생기도록 섭리하시는 법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은 자신에게 충격적인 불행이 닥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나?"라는 질문부터 먼저 합니다.
그런 질문을 바꾸어 말하자면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항상 좋은 일만 벌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나쁜 일도 생기게 하시는가?"라고 항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런 질문이 정당한 것이겠습니까?
과연 나의 인생이 항상 형통해야 마땅하고 매사에 잘 되기만 해야 당연한 것이겠습니까?
도대체 우리가 무슨 근거로, 도대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그리 잘난 것이 많다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왜 내게 좋은 일만 생겨야 할까?'라고 그 질문을 바꾸어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만 생겨야 할 이유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빚을 지신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무슨 은혜나 축복으로써 꼭 갚아 주셔야만 할 어떤 공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쌓아 놓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아주 당연한 듯이 내게 복 주시기만을 늘 요구하고 있지만, 조금만 곰곰이 따져 보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만사를 형통하게만 해 주실' 아무 이유도, 의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낯으로, 도대체 어떤 양심으로 '하나님, 왜 제 인생을 매일매사에 그저 좋은 일로만 가득 채워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에 비하여 우리 인생에 오로지 '나쁜 일'만 생겨야 할 까닭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본성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신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선을 행한 것보다는 자주 실족하고 범죄한 것들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돌이켜 보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의 지은 죄를 따져 본다면 사실상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이나 역경보다 열 배 백 배 더한 것이 닥친다 하더라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단 한 마디도 불평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생각해 보면 신자는 어떤 불행이 닥쳐올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항상 나쁜 일만 생기게' 하지 않으시고 실제로는 '좋은 일들을 훨씬 더 많이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하여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왜 내게 이런 역경이 닥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먼저 '지금 죽어도 마땅한 나 같은 죄인을 지금까지 살려 주신 은혜'부터 기억해 내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내게 이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시는가?'라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면 그 즉시 '오늘까지 내가 받아 누리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하나님께 제대로 감사조차 드리지 않았던 일이 없었는지' 이것부터 한 번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의 생존을 유지시켜 주는 의식주를 거의 당연한 듯이 공급받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곳곳에서 온갖 종류의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현대사회에서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면하게 해 주신 위험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저녁마다 들어와서 쉴 수 있는 내 집이 있고 더구나 서로 사랑하고 위로해 주고 기쁨을 나누는 가정이 있다는 것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사실상 우리는 거의 잊고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경향교회와 강서성전이 있는데도 이처럼 아름답고도 복스러운 제단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정한 감사를 드려 보지 못한 교인들도 어쩌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제아무리 충격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하더라도 저와 여러분의 입에서는 결코 원망이나 저주의 말이 단 한 마디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일생일대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역경이 자신의 인생에 노도와 같이 덮쳐 오면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까?'라고 항의하기에 앞서 오늘 내가 겪게 된 그 한 가지 '나쁜 일'보다 지금까지 내게 베풀어 주신 '좋은 일'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사실부터 먼저 기억해 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축복들에 대하여 여태껏 감사드리지 않고 살아왔던 것을 진심으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 역시 바로 그런 체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조국 유다의 현실을 두고 "7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라고 애통하면서도 곧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놀랍게도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사 1:7-9)고 고백했습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온 유다가 망하고 예루살렘만 겨우 남게 된 비참한 상황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소돔이나 고모라처럼 완전히 멸망당하지는 않게 되었다.'라고 오히려 감사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신자들에게도 시련을 주십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주시면 우리가 견디어내지 못할 것을 아시는 까닭에 그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인생에도 때로는 충격적인 역경이 발생하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훨씬 더 많이 주실 뿐 아니라 그 역경조차 결국은 '처음보다 나중 것이 더 창대케 되는 연단의 과정'이 되도록 오묘하게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열 가지 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시련'이 닥치면 그 '열 가지 복'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오로지 불평과 원망만 하기 쉬운 것이 사람의 본성이며 실제 반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늘 아버지의 자녀' 된 성도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충격적인 역경'을 당했던 야곱이 바로 '축복의 대명사'와 같은 선조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혹 '머리 위의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서 있는 땅바닥이 꺼지는 듯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 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 주고 계셨지만 우리 자신은 별로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우리의 '의식주'와 '가정'과 '교회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누리게 해 주셨던 축복들을 꼭 상기해 내고 오히려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89장에서도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 먼저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고 고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순경뿐 아니라 역경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풍랑 인하여' 축복의 포구로 더 빨리, 주님 품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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