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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부흥하는 교회 (행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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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하는 교회 (행 9:31) 

  
"부흥은 하나님의 뜻"이다. 부흥이란 '강한 힘으로 다시 살아남'을 말한다. 그래서 미국 탈봇신학교 정문에는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라."(pray for revival.)고 쓰여있다. 부흥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뜻이니,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라지 못하고, 침체됨을 싫어하신다. 자라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남들처럼 먹고 자는데, 성장하지 못하면,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이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침체된 교회는,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반드시 부흥해야 한다. 오늘 말씀은 부흥하는 교회 모습이 나온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했다.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부흥의 내용에 대해 알 수 있다. 

본문에 수동태동사가 2개 나온다. "든든히 서가고"와 "수가 더 많아지니라."이다. 이처럼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흥이란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됨을 말하고, 또한 성도의 숫자가 더 많아짐을 의미한다. 

그러면 먼저, 교회가 든든히 서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회가 살아나고, 건강해 진다는 말이다. 교회가 살아나고 건강해 지면, 자동적으로 양적 성장도 나타난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는, 분명히 부흥하는 교회다. 

우리 교회의 2010년 표어가 본문이다. 우리의 기도제목이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주님 일년 365일,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더해 가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게 해주세요!" 부흥하는 우리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나? 

1. 교회가 평안해야 한다. "교회가 평안하여" 

평안은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 찾아온다. 조화가 잘 이루어지려면, 죄가 들어오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조화'를 잘 이루는 곳이 되기 바란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여러 사람이 모여, 예수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교회에 나온 지 오래 된 사람과,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과,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못났다고 하는 사람과, 함께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세워주고 격려하고, 다툼과 갈등이 없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평안한 교회요 든든한 교회다. 우리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하게 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다. 집안이 평안해야, 만사가 잘 이뤄진다는 뜻이다. 출근 전에 부부싸움을 한다든지, 집안 일로 속상하든지, 직장에서 감정이 상했을 경우, 교통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마음이 평안해야, 안전운전도 가능하고, 연주도 바로 할 수 있고, 직장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다. 가정이 평안해야 사업도 잘되고, 자녀교육도 잘 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청소년 가출의 주된 원인은 가난이었다. 그러나 80년 이후, 경제사정이 좋아지면서, 청소년의 가출원인이, 가정불화로 바뀌었다. 

부모가 이혼했다든지, 별거하고 있다든지, 날마다 싸움판을 벌려, 가정 불화에 시달된 청소년들이, 가정을 뛰쳐나오게 되었다. 교회도 평안해야 성장한다. 한때 큰 교회로 소문났던 교회들이, 성장이 중단되고, 찬바람이 도는 교회들이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영성이 메말라, 시끄럽기 때문이다. 

교역자와 장로, 장로와 장로, 교인과 교인이 화목하지 못하고, 싸움을 하기에, 신령한 힘은 빠지고, 쇠퇴하고 있다. (갈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했다. 각자의 마음에 평안이 없으니까, 물고 먹는 다툼이 일어난다. 평안은 2가지 경로를 통해 이뤄진다. 

(1) 내가 양보하고, 물러서야 이뤄진다. 

내가 죽고, 물러서고, 참으면, 평안이 이뤄진다. 그러나 내가 나서고, 내가 살고, 크려고 하면, 평안은 깨지고 만다. 예루살렘교회는 많은 박해를 받았다. 특별히 박해자의 중심은 사울이었다(9장). 


사울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고, 많은 성도가 예루살렘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울의 회심을 통해, 박해를 받았던 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되었다. 이처럼 내가 변하면, 교회가 평안해진다. 가정이 평안해진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변화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교회가 평안해 지고, 우리 가정이 평안해지고, 직장도 평안해진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결코 평안은 없다. 


(2) 평안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는 사람들은, 평안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평안한 교회를 만든다. 마음의 평안이 교회의 평안을 만들어낸다. 우리 교회는 평안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각자의 마음에 평안이 인간 관계를 화목하게 한다. 내 마음의 평안이, 서로 서로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평안을 어떻게 주시는가? (엡2:16-17)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원수 된 것은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 하나님과 나 사이에 평안을 이루어 주셨고, 나와 너 사이에 평안을 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우리 심령의 평화, 우리 가정의 평안, 인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 십자가 없는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일 뿐이다. 십자가 없는 행복도 잠시 잠깐뿐이다. 


2. 말씀의 기초가 든든해야 한다. 

'든든히 선다.'는 말은, 건축과 관계되는 단어로, 견고한 기초 위에 잘 지어져 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초가 든든해야, 건물이 안전하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예수님은 (마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했다. 예수님은 (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든든한 교회가 될 것이고, 교회가 든든해지려면,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든든한 교회다. 성경 말씀은 근거 없는 신화도 아니고, 전설도 아니다.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계적인 Standard 석유회사가, 이집트에 큰 유전을 갖고 있는데, 그 유전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어떤 사람이 성경을 보다 (출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역청과 나무 진'이란 말에서, 그 근처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파보니 큰 유전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을 때, 이적과 축복이 나타난다. 

메릴랜드 볼티모어에 있는 '커티스'기계회사 회장이며, 우주계획 고문 해롤드 힐(Harold Hill)씨가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그들은 날마다 컴퓨터 앞에서, 10만 년 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간의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살폈다. 그렇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에, 태양과 달과, 그 주변 행성들의 궤도를 작성할 수가 있다. 우주과학자들이 컴퓨터 앞에서, 과거 10만 년 간의 궤도 조사를 하는 중, 그만 기계가 정지되었다. 컴퓨터가 정지하고, 적신호를 보내왔다. 

모든 기사들을 불러, 조사를 의뢰했다. 기계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판명되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 며칠을 살폈더니,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하루가 없어진 채로 궤도가 진행되면, 정상이 됨을 알았지만, 없어진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문제였다. 

아무리 계산해도, 하루의 오차가 있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때 한 사람이 자신이 교회를 다닐 때에, 여호수아가 태양이 하루 동안, 정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처음에는 모두 웃어넘겼다. 

나중에 성경을 찾아보니 (수10:13)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했다. 컴퓨터에서 거의 종일토록은 얼마인지, 조사해보니 23시간 20분이었다. 나머지 40분은 어디 갔을까 조사하다가 "태양이 뒤로 물러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성경을 찾아보니, (왕하20:8-10) 히스기야 왕이 기도한 대로, 태양시계가 뒤로 물러간 일이 있었다. 그래서 성경을 신화처럼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인디아나 주에서 발행되는 Evening World지에 보도된 글). 

우리는 과학자들의 이야기 때문에, 성경을 믿으려고 하지말고,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든든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초를 닦은 교회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세운 교회'(딤전3:15)라고 했다. 

교회의 든든한 기초는 말씀이다. 철근 콘크리트도 대리석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기초를 세운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교회다. 그러므로 말씀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생명력이 있는 교회요, 결국 부흥하는 교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말씀'이다. 그래서 '100번 기도, 1,000번 말씀'이라는 말이 있다. 100번을 기도하기 위해서, 1,000번의 말씀을 보라는 말이다. 우리의 기도도, 말씀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욕심과 내 뜻만을 위해 기도하지말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말씀을 떠나면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목회자의 양보할 수 없는 사역이, 바로 성경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다. 이는 절대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밤늦도록, 아니 새벽을 맞도록 설교를 준비하는 이유도, 말씀에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을 한다. 기초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으로 기초를 다져진 신앙과,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란다. 


3.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주를 경외함과'라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부흥했다는 말씀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림을 말한다. 한 마디로 예배를 잘 드렸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는 시대, 그 시대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나라, 그 나라는 미래가 없다. 이스라엘의 말라기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암흑시대였다. 하나님께서 도무지, 백성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가 (말1:6)에 나온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경심, 그러니까 경외함을 가져야 한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바로 이 경외함이 가득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가장 고귀한 것을 드림이 예배다. 그것이 물질이든, 건강이든, 재능이든, 시간이든,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한다. 예배는 희생이요 헌신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요4:23).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가 부흥한다. 참된 예배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예배는 2가지가 있다. 공적인 예배와 생활의 예배가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권세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 두려움은 경건한 두려움이었다. 신령한 두려움이었다. 

코람 데오(Coram Deo)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다."라는 신전의식에서 나오는 두려움이었다. (행5:1-)를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자기의 땅을 팔았다. 팔고 나서 돈을 보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 부부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일부를 감추었다. 그리고 나머지가 다 인양,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바쳤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마음 속에 있는 사탄의 역사를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책망했다. "네가 어찌하여 성령을 감히 속이느냐?" 

그러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그의 심장이 멎어버렸다. 젊은이들이 그의 시신을 메고 장사하러 나갔다. 한 3시간쯤 지난 뒤에,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기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모르고서, 태연하게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에게 물었다. "땅값이 이것뿐이냐?" 

"예, 이것뿐입니다." 베드로가 또 그를 질책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고자 하느뇨?" 그 순간 삽비라도 고꾸라져, 영혼이 떠나가 버렸다. 이 사건을 보고 들으면서, 어찌 그들이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갖지 아니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깊어지기를 바란다. 오늘 현대교회의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식어져 있다. 마치 교회에 모임을, 하나의 친교 단체들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고 있다." 이러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깊어지기를 바란다. 


4.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령의 위로(파라클레시스)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다. 초대교회들은 부흥 이전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다. 교회에는 엄청난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위기를, 성령님이 도와주셨고, 고난 중의 성도를, 성령님이 위로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우리의 힘과 재능, 의지로, 감당할 수 없다. 사명이 왜 어려운가? 인간의 한계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슥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하였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성령과 부흥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나서, 변화되었다. 

성령을 받으면, 핍박이 무섭지가 않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을 믿는 게 즐겁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음이 문제다.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다. 증인된 삶을 살 수 있다.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로 주님의 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난관을 돌파한다. 바로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두 이야기가, 성령님의 위로에 관한 예증이다. 병든 애니아가 고침을 받았을 때, 룻다의 성도들이 크게 위로를 받았다. 

구제에 힘을 쓰던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었을 때,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그녀를 살려내시므로, 욥바의 성도들이 크게 위로를 받았다. 우리 중에 성령에 대해, 확신이 없는 분들이 많다. 성령 받았느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있다. 

성령침례를 받았나요? 기분에 따라서 대답하면 안 된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성령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기쁘고, 즐겁기만 하지 않는다. 성령은 감정의 영이다. 어떤 분은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는 성경적이 아니다. 

방언이 은사중의 하나지만, 방언을 받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비성경적이다. (고전12:29-30)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 했다. 

방언을 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지만, 병 고치는 것도 성령의 은사요, 믿음도 성령의 은사다. (고전12:3下)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성령이 아니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를 확인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해 주신 주라고 고백하고, 시인할 수 있다면, 이는 성령이 이미 나에게 임하신 것이다. 내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없다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을 낸다해도, 교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성도들과 교인, 그리스도인과 교인이 다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임한 자이고, 교인은 성령을 받은 자일수도 있고, 받지 못했지만, 교회에 나오는 자들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자요, 교인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나를 지배하심을 말한다. 

  결론이다. 

우리 교회가 오늘부터,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말씀으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 그리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부흥은 반드시 임한다. 지금 부흥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다. 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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