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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여호와 이레 (창 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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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 22:11~14) 

  
하나님은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행복하게 살도록, 에덴동산을 먼저 만들어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먼저 마련해 두셨다. 

죄 많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먼저 마련해 두셨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천국을 먼저 마련해 놓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복을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었던 콜린 파웰은, 맨해튼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여,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고, 흑인으로서는 미국 최초로 국무장관이 되어, 전쟁을 할 때마다, 미국과 전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다. 

파웰에게 성공적 삶의 비결을 물었더니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떠한 역경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앞날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장래 일들을 알지 못하기에, 불안에 떨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장래를 친히 준비하시니, 염려할 필요 없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축복을, 발견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미 하나님이 주셨지만, 깨닫지 못해서 누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준비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위하여, 은혜와 축복을 예비하시는 분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래서 잠시 후면 제물이 될 아들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을 찾을 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다. 우리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하나님은 큰복을 준비해 놓고 주신다. 어떤 복을 준비하셨나? (1) 네 씨로 크게 번성하게 하고, (2)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17). (3)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18) 

그런데 이 복은, 그냥 주시는 복이 아니다. 시험을 통과해야 주신다. 성공한 사람은 믿음으로 시험을 이겼던 사람이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1. 시험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시험에 당한다. 또한 시험을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향방이 결정된다. 따라서 매 순간마다 결단을 잘해서, 복된 길을 가야 한다. 

(1) 시험의 종류 

시험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고, 사탄이 주는 시험이 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은 우리로 죄에 빠지게 하기에, 유혹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믿음을 더 키워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훈련이기에, 시련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험"과 "유혹"은 다르다. 그러나 "시험"과 "유혹"은 구별하기 어려워서, 똑같이 "시험"이라고 했지만, 영어성경은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test와 temptation).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자주 본다. 그 이유는 학생들을 테스트(test)하기 위해서이다. 얼마나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어느 과목이 쳐지느냐를 알기 위해, 시험을 본다. 시험을 보지 않으면, 실력을 파악할 수 없다.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실 사람에게는 큰 시험이 있다. 

  고등학교 시험보다, 대학에 들어가는 시험이 더 어렵듯이, 커다란 시험은 커다란 축복의 전주곡과 같다. 따라서 큰 시험이 닥칠 때,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아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시려고, 연단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사탄은 달콤한 유혹을 해서, 죄를 아름답고, 즐겁게 느끼도록 만든다. 이 시험에 빠지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편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다(마7:13-14). 

(2) 시험은 언제 오는가?(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라고 하였다. '그 일 후에'란 말은, 2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아브라함이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 
창21장에서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언약하셨던 약속의 아들을 100세에 얻고 너무도 기뻐하였다. 또한 이스마엘과 이삭의 불화도 잘 해결되어, 아름답게 매듭을 지었다. 

  이웃 나라의 왕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땅에는 오랜만에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찾아왔다. 진짜 살맛이 났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안정되며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때였다. 이때 시험이 찾아왔다. 

  사람은 소원을 성취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소원이 성취된 후가, 더 중요하다.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공 후가 더 중요하다. 이때부터 사람은, 실제적인 인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람은 어려울 때는 겸손하게 매달리지만, 안정되고 만족할 만하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던 사람이, 소원이 성취되고, 뜻하는 바를 이루면, 그때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말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라는 말이 있다.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 여러 가지 시험이 다가올 수 있다. 

② "그 일 후에"(              )라는 말씀은, "이 말씀들 후에"라는 말씀도 된다. 
(창21:33)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을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훈련과 고백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은 마지막 시험을 허용하셨다. 

  만약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훈련 없이,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이 주어졌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의 수준이 되어야만, 그 수준에 맞게 축복의 시험도 찾아온다. 그러므로 믿음의 수준을 높이시기 바란다. 


2. 시험의 내용은 무엇인가?(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상상하지 못할 큰 시험을 주셨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더 크고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시험하셨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이,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주어진 후에, 마지막 시험을 하셨다. 만약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이, 아브라함 생애 초기에 주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충분히 훈련시키고, 연단 시키신 후에, 그래서 그가 이 시험을 감당할 만한 때, 그의 생애의 마지막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때에, 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감히 자기 아들을 바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옛날에 5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아주 친한 친구가 아들이 없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달라고 하였다. 그는 친구와의 의리가 돈독했기에, 아들 5중에서 한 아이를 주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어떤 아들을 줄까 생각하였다. 

  장남은 대를 이어야 하니, 줄 수 없고, 둘째는 제일 똑똑하니, 안되겠고, 셋째는 늘 몸이 아프니 못 주겠고, 넷째는 제일 미남이라서 안되겠고, 다섯째는 막내니 가여워서 차마 안되겠고… 그래서 그는 어느 아들도 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삭은 독자였다. 내 아들을 다른 사람이 죽여도, 견디기 어렵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손 
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요청이었다. 이 시련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대의 시험이다.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이러한 시험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신앙을 가지 
고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내 아들이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다, 복을 공짜로 얻는 줄 안다. 거저 얻는 줄 안다. 그러나 복은 절대로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복에는 독특한 성질이 있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복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수십 년 믿어도, 삶에 아무런 변화와 영향이 없다. 알고 믿어야 한다. 무엇을 알고 믿어야 하는가? 바로 순종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은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아주 잘 믿는다고 착각한다. 이런 저런 핑계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1년이 지나도록, 한 영혼도 전도하지 못하면서,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면서, 교회 제정에 관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면서, 제직이라는 간판을 달고 다닌다. 직분에서 제외하면 서운해서,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협박을 한다. 

  이래서 교회가 문제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즉시로 회개하야 한다. 사회법에서야 이런 사람을 처벌할 기준이 있지만, 교회는 교회 특유의 자유성 때문에, 이런 사람을 제지할 법이 없다. 그래서 교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자리를 맴돈다. 

  이렇게 마땅한 일에도,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물며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 과연 순종하고 따를 수 있을까? 사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적으로 순종했다. 지킬 만한 것만 지키고, 지키기 싫은 것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서, 지키지 않았다. 


3. 왜 이 시험을 하셨나?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하여, 증명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증명했는가? 

(1) 절대 신뢰를 배웠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말은,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기에 '불합리한 명령'이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이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독자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이다. 이 아들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후손들이 생겨날 것이고, 또 천하 만민이, 이 씨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된 아들이다. 

  그런데 이런 아들이 죽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아들을 바치면 아들은 죽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 말도 안됩니다.'라고 얼마든지 따질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아브라함은 고심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바치라면 바쳐야 하는데, 바치면 내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데, 어떻게 되는 거야? 아니야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으면, 그 다음에 주님이 책임지실 거야! 그러면 어떻게 책임지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는 이삭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살리는 길밖에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쳤다. 이것은 제 상상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증거 한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는, 이런 신앙이 없었다. 처음으로 부활신앙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부활의 신앙이 탄생되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믿었던 확실한 증거가 있다.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셨으므로, 바치러갔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하나님이 다시 살려서, 되돌려 주실 줄 믿었다. 절대적인 갈등 속에서 탄생된, 부활신앙, 절대적인 믿음이 고백되는 순간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훈련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허락하셨다. 

(2) 절대 순종 

이 명령을 받았던 그 밤에, 아브라함의 고민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얼마나 잠못 이루는 밤이었을까? 만약 고민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인간도 아니다. 

  그런데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언제 출발하는가? "아침에 일찍이"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애에서, 순종의 중요성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인생의 가장 무서운 시험에, 순종을 하였다. 어차피 순종을 하려면 '즉시 빨리 하자'는 생각이 있었기에,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순종은, 손해보지 않는 순종이었다.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이삭을 데려가셨나? 아니다. 이것은 시험이었다. 순종의 시험이었다. 절대 순종의 시험이었다. 순종의 길은 외로운 길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은, 영광된 길이지만, 또한 외롭고 힘든 길이다. 

  그러나 순종에는 큰 축복이 있다(17). 십자가를 질 수 있나? 가시밭길을 갈 수 있나? 외로운 길을 갈 수 있나? 하고 물으실 때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어디든지 주와 함께 가겠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3) 절대헌신 

이 시험은 절대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신을 죽지 않고서는 안 된다. 내 욕심, 내 이기심에 대해 죽지 않고는, 주님께 헌신함은 불가능하다. 왜 하나님은 헌신을 요구하시는가? 

  내가 헌신해야, 나를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드려야 주님이, 나를 쓰실 수 있다. 헌신이 없이는 역사를 이룰 수 없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이루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절대헌신이 필요했다. 

  드디어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에 올려놓았다. 칼을 빼었다. 칼을 빼었을 때, 아브라함의 아픔은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이기심, 욕망에 대해서 죽여버리지 않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시험을 하셨다. 이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에게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런 절대헌신의 시험이 주어진다. 믿음은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마음 + 행동이어야 한다. 

  칼을 잡고 내려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멈추어라. 이제야 내가 너를 알았다. 너는 시험에 통과하였다. 너는 이제 이 역사를 바꾸는 복의 근원이 되거라.' 너를 위하 
여 살지 말고, 네 이기심과 만족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기어이, 우리의 생애에 이런 시험을 하신다. 성격은 다르지만, 마침내 우리를 이 지점까지 끌고 오셔서, '이것까지 바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이것까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순종함을 하나님은 지켜보신다. 

  이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한다. "준비하시는 하나님"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볼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보실 때,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 하신다. 지금 모리아산은 어디 있는가? (대하3:1)을 보라.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예루살렘의 성전이 모리아 산 위에 세워졌다. 또한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하나님은 똑같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의 체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런 축복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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