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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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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롬 6:1~11)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의 손에 의해서 양육된 한 어린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장해서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고모는 늘 그녀에게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다니냐?” “교회는 왜 다녀오느냐?” “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냐?” 그녀는 그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고모가 뭐라고 하면 말대꾸하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고 자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 소녀가 어느 날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모는 교회 나가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공부할 시간에 왜 거기 가서 시간 낭비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녀는 교회에 나가면서도 늘 자신이 고모에게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이 늘 마음이 아프곤 했습니다. ‘오늘 집에 가면 고모에게 좀 잘해야지.’ 그러나 막상 고모 얼굴을 보면 그게 잘 안됩니다. 또 같이 반발하게 되고, 또 화를 내게 되고, 또 말대꾸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말씀을 듣는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이미 죽었어.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거야.’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매일 고모를 만나니 자꾸 싸우는 거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 대신 고모를 만나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 부탁을 해야지.’ 이렇게 마음을 먹고 집에 갑니다. 그러나 집 앞에 가니 또 자신이 없고 싸울 것만 같습니다. 현관문 고리를 붙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고모를 만날 자신이 없어요. 예수님께서 저 대신 우리 고모를 꼭 좀 만나주세요. 우리 고모 너무 좋은 분인데 이렇게 저와 잘 못 사귀었어요. 예수님이 우리 고모를 좀 만나주세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역시 고모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는데 그날따라 고모가 무섭게 보이기는커녕 너무 측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고모가 너무 안 됐다. 나를 키우느라고 시집도 못가고 노처녀가 되고, 주름이 늘어가고, 머리도 희끗희끗 쇠어 가고.' 너무 안 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만 고모에게 “고모! 고모 얼굴 안 됐다. 얼굴에 주름살 좀 봐. 머리도 이렇게 많이 쇠고. 

나를 키우느라 고모가 고생이 너무 많아.”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고모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랬더니 막 꾸짖던 고모가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결혼도 못 하고 조카를 위해서 수년간 고생해 왔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북받쳐 올라서 그저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고모하고 조카하고 부둥켜안고 웁니다. 울면서 고모의 마음이 서서히 열립니다. 그리고 고모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 고모도 마음을 열고 조카와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만나면 또 싸움이 되었을 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고모를 대신 만나주었더니 고모의 마음이 열리고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는데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된다면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아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이 정말 죽으면 아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진정으로 죽으면 남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우리 아내들 중에도 교회 와서 이런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 제 남편 좀 꼭 만나주세요.”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옛 사람이 살아나서 바가지를 긁고 성질을 부리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마음이 자꾸 닫혀 갑니다. 남편은 아내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봐야 하는데 예수님의 모습은커녕 화내는 부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닫혀서 예수를 믿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가정에 복음이 열려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우리에게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나옵니다. 4절에 보니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우리는 이미 장사까지 지낸 사람들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묵상한 기억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습니다. 

둘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함으로 인간에게 생명이 들어오고 죄가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왕 노릇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생명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생명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유죄 판결이 무죄 판결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럽고 추악한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20절에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는데 함께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전에는 죄가 죄인 줄 몰랐는데 율법을 앎으로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죄가 들어왔지만 문제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큽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커도 그 죄를 덮을만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00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은 50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보다 그 감사와 감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큰 죄인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함 받았다면 그 주님을 향한 감사와 감격이 얼마나 크고 놀랍겠느냐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말을 왜곡하고 이 말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느냐면 “아!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구나. 그러면 은혜가 계속 쏟아지려면 죄를 많이 지으면 되겠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니까 죄를 습관적으로 지으면 은혜가 더 많이 입을 거라고 왜곡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6장 1절과 2절 말씀을 읽어 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부어지게 하려고 더 죄 속에 빠져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병원이 영업이 힘들다고 병원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병들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병이 없으면 병원이 문 닫아야 합니다. 요즘 자꾸 경찰이 줄고 있다고 내가 경찰을 살리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죄가 없으면 당연히 경찰서는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지만 은혜를 얻기 위해서 죄를 더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어찌 더 죄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죄와 단절된 사람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논점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화도 안 냅니다. 그렇게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죽으니 누가 욕을 해도 화를 안 냅니다. 무서운 동네 개가 있어서 애들이 경기를 했는데 그 개가 죽으니까 가서 한 번씩 다 걷어차도 개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죽은 개는 반응이 없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자아가 죽으면 우린 죄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 들어와도 우리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렇게 바람을 많이 피우다가 죽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그 옆에 예쁜 아가씨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갑니다. 그 사람이 바람을 또 피우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죄의 유혹이 들어와도 죽은 사람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으니까 유혹에 넘어가고 끌리는 것입니다. 왜 남자들이 유혹받습니까? 아직 죄에 대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대해서 아직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유혹을 느끼고 죄를 자꾸 짖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자꾸 성을 내고 화를 냅니까? 아직도 내 자아가 죽지 않고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렁이가 왜 밟으면 꿈틀합니까? 정답은 아직 덜 죽어서입니다. 완전히 죽으면 꿈틀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건드려도 반응이 없는데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꿈틀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의 유혹에 넘어갑니까? 아직도 내가 옛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세례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세례를 설명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는 공인된 의식입니다. 우리가 물을 찍어서 머리에 바르고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원래 세례는 침례의식입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때에도 사람들은 요단강 속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다 나오는 것입니다. 

물속에 완전히 빠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속에 들어가면 숨을 못 쉬니 죽습니다.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옛 사람인 나는 죽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물속에서 때를 씻는 것처럼 죄가 씻음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올라올 때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세례의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 의미는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죄를 씻음 받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 세례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사람,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도 같이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욕심과 정욕을 못 박았다.” 이미 내가 그 때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내 모든 죄가 다 씻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실 때 나도 새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생명은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죄악의 과거의 자아는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는 이미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장사까지 끝난 사람들입니다.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지 이미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저와 여러분은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나는 이미 과거의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다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셔야 합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 그는 마니교에 빠져서 오랫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주 거듭난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삶을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그가 막 놀던 시절에 만난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술 먹고 놀던, 방탕하게 생활하던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는 어거스틴을 알아봅니다. 어거스틴도 물론 그 여자를 압니다. 그러나 모르는 채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쫓아와서 “당신! 나 몰라요? 나예요.” 어거스틴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당신은 과거의 그 방탕하던 그 여자, 지금 그 여자이지만 나는 과거의 방탕한 어거스틴이 아닙니다. 나는 새로운 어거스틴, 주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과거가 죽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본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부흥강사 김익두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 김익두 목사님은 원래 깡패 출신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그래서 장날이면 가서 행패를 부리는데 김익두에게 맞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장보러 갈 때는 다들 성황당에 가서 빌고 갔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 나쁜 놈,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빌었답니다. 그 놈 만나면 돈 다 뺏기고, 물건 뺏기고, 두들겨 맞고 되는 일이 없거든요. 워낙 힘이 세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김익두가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해 받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큰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가 부고장을 자기 장인에게 보냈습니다. 자기 장인에게 가장 속을 많이 썩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인에게 보내는 부고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부고! 사망, 김익두’, 이렇게 해서 보냈습니다. 장인이 이것을 보고 “아니, 우리 사위놈이 죽었단 말이냐? 살아있는데 죽었다니?”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목사가 되고, 부흥강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동네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데 언덕을 올라가니 여름이라 덥고 땀이 흘러서 바위 위에 좀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뒤로 한 사람이 헉헉 대면서 올라옵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김익두 목사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야 이놈아!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올라와서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이 “아이고, 미안합니다. 한번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형씨! 나하고 화해합시다.”하고 그 깡패 같은 친구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손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신, 누구시오?” “내가 왕년의 김익두올시다.” 그랬더니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님이 한 마디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는구먼. 날 따라오시오.” 그 깡패를 데리고 부흥회 하는 교회에 앉혀 났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장로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김익두 목사는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과거의 김익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까? 아마 우리 속으로는 ‘죽기는 뭘 죽어요? 죽다가 살아났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흥회 부흥강사님이 와서 은혜를 전하면 내가 거반 죽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그러다가 밖에 나가 찬바람만 쐬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이미 장사까지 지낸 사람들입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죽으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보니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죽어야지 열매를 맺는데 내가 안 죽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내가 죽을 때 오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이라는 영광을 맛보고 부활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평화도 내가 죽을 때 오는 것입니다. 왜 자꾸 가정에 분란이 있고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까? 부부 중에 한 사람이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만 죽으면 싸움이 안 됩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 붙들고 싸우는 사람 보셨습니까? 강남성심병원 영안실에 가면 시체들이 있는데 그 시체를 붙들고 막 따지고 싸우는 사람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싸움이 안 됩니다. 둘 다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가만히 보니까 엄마하고 아빠하고 싸우는데 꼭 마지막에는 엄마가 KO승으로 이기고 아빠가 KO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왜 아빠는 매일 싸움만 하면 질까?’ 아빠는 항상 이럽니다. “여보, 내가졌어. 이제 그만해. 내가졌어.” 이렇게 해야만 싸움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해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아빠는 남자라서 힘이 센데 엄마에게 만날 지기만 해? 남자 체면이 있지.”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야 이놈아! 너 그걸 몰라서 묻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빠가 져주는 거야.” 그 때 아이는 깨달았습니다. ‘아 그런 거구나.’ 그리고 학교를 갔는데 동물의 왕국을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동물 비디오를 보여주고 선생님이 묻습니다. “얘들아! 동물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짐승이 어떤 거지?” 한 아이가 대답합니다. “얘, 사자요.” 선생님이 또 묻습니다. “그럼 사자 중에 어떤 종류가 가장 힘이 셀까?” 그랬더니 이 아이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 저요.” “그래 이야기 해봐?” “암사자요!” “야, 수사자도 있는데 왜 암사자가 제일 힘이 세냐?” “그건요. 동물계의 평화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여러분! 나 한사람이 죽으면 됩니다. 그러면 평화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아직 이 목사가 덜 죽어서 그런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덜 죽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안에서 죽을 때 거기에 열매가 있고, 거기에 평화가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4장 33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내가 죽고 따라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따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죽는 것은 쉽지만 날마다 죽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나를 쳐서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그는 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죽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도 날마다 넘어집니다. 교회 와서는 권사님, 집사님인데 세상에 나가서는 너무나 쉽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는 또 회개합니다. 나가면 또 죄를 짓습니다. 

계속적인 반복입니다. 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삶의 의욕이 없습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나오던 것 안 나올 수도, 나오기는 나오지만 뭔가 변화가 없고 성숙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의 자녀된 긍지, 자존감 없습니다. 비참합니다. ‘나는 엉터리 집사야, 나이롱 권사야.’ 세상에 나가서 또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계속 반복됩니다.

새해가 온다고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새해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대해를 대망해도 내가 죽지 않는 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지 않는 한 새로운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해도 만날 그 자리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유는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죄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집니다. 아직도 화를 내고, 고집을 피웁니다. 옛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죄에게 끌려 다닙니다. 화를 내고, 거짓말을 하고, 증오하고, 남 헐뜯고, 중상모략하고, 그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속 죄를 쌓아갑니다. 죄의 종이 되어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돌아다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것은 그러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문 4절에 보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하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6절에 보니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고입니다. 7절에 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미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꾸 죄에 끌려 다닙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끓어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가 노크할 때 내가 나가면 안 됩니다. 누가 나가야 합니까? 예수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죄가 노크할 때 내가 나가지 마십시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가시면 우리는 100전 100승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욕정들, 문제가 안 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해서 두 가지 권면을 합니다. 우리는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생활의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삶이 아직 거룩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삶이 죄를 단절해 버리고 죄를 끊어버리고 누추한 옷을 던져버리고 옛사람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의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의 습관을 버리셔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세상의 풍습을 쫓던 습관들, 과감히 던져버리셔야 합니다. 그런 생각, 그런 습관 다 벗어버리셔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지나가다보니 다리 밑에 한 어린아이가 그 곳에서 거지처럼 생활하는 것이 너무 불쌍하고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직접 가서 물어봤더니 6.25때 부모를 다 잃어버리고 고아가 되어서 이렇게 다리 밑에서 먹고 자고 거지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 부자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마침 자녀가 없는 터에 이 아이를 아들삼기로 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부잣집에 가니 먹을 것도 많고 옷도 좋은 것이 많고 장남감도 많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처음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불편해 집니다. 다리 밑에서는 그냥 얻어먹고 자다가 놀다가 하면 되고, 세수도 필요 없고 양치질도 필요 없고 발도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잘 때는 잠옷을 입어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해야 하고, 양치도 해야 하고, 발도 씻어야 하고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옛날이 좋았는데.’하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옷 입으면 평생 입고, 어디 가서나 드러누워 자고, 밥 먹고 더럽게 살고 했던 그 시절이 더 좋게 생각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가 그 옛날의 거지의 생활을 반복한다면 새로운 아버지가 그 아이를 어디까지 용납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과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옛날 거지 근성을 아직 못 버려서 만날 그곳이 좋다고 쫓아가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깝겠습니까? 과거의 잘못된 생각들, 누추한 옷들,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누구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지만 아직 우리 속에는 죄성의 뿌리가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저에게도 죄의 쓴 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유혹받을 수 있습니다. 범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죄에게 승리하고 죄의 유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죄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이 나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의 한 빈민가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이분은 너무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구제도 많이 하고 참 훌륭한, 믿음 좋은 할머니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 할머니를 뵙고 싶어서 한 선교사가 찾아왔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면서요. 이 집에 예수님이 종종 찾아오신다면서요?” 그랬더니 할머니는 틀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선교사는 할머니가 잘못 들으신 줄 알고 다시 한 번 물어보았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종종 찾아오신다면서요?” 또 다시 “틀렸어.” 그러십니다. 

할머니가 귀가 많이 어둡다고 생각한 선교사는 또 물었습니다. “할머니 집에 예수님이 종종 찾아오시다면서요?”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이 집에 살고 계셔. 예수님이 이 집에 나와 함께 살고 계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임재해 계시니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은 승리하는 삶이요, 축복의 삶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마지막 절 11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명이 이미 새롭게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새 생명을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는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대망의 새해가 열려질 것입니다. 달력이 바뀐다고, 새 옷을 갈아입는다고 대망의 새해가 아닙니다. 내가 새로워질 때 새해는 분명 바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축복의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 마치고 밖에 나가면 또 불평을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참! 내가 죽었지.’ 오늘 집에 가셔셔 불평하고 싶을 때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참! 내가 죽었지. 죽은 사람이 말하면 안 되지. 죽은 사람이 불평하면 안 되지.’ 저와 여러분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와 정욕을 십자가에 다 못 박았습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은 예수님이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인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주께서 사신 것이라.” 오늘 이 믿음 가운데 대망의 새해를 열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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