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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예수와 함께 말한 사람들 (눅 9: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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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말한 사람들 (눅 9:28~26)

 
요즘은 핵가족 시대라서 온 식구들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옛날 대가족 시대에는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앉는 식탁이 달랐습니다. 할아버지 ․ 큰 아들 ․ 형님들이 따로 상을 받으시고 동생들은 따로 앉고 손자들은 별도로 상을 받고 어머니는 어디 앉는지 알 수 없는데 며느리들은 어르신들 식사가 끝난 다음에 따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앉는 자리에 따라서 대화의 내용이 달랐습니다. 할아버지가 앉으신 자리는 최고 어르신이기 때문에 그 가정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로 선산에 대한 이야기, 제사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급수가 낮은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지만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급수가 낮은 사람은 듣지도 못하고 나중에 식사가 끝난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얻어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급수가 낮은 사람들은 어르신들 앉은 자리가 부러웠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 저 자리에 앉아서 저 대화에 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캠퍼스 부근의 미국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는 대학 선배님들이 주류를 이루는 아주 믿음이 뜨겁기로 유명한 그런 교회였습니다. 선배님들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고 또 취업을 하러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남아서 그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근처에서 취직하고 교회 중심으로 살았어요. 

저는 그 교회에서 교인들이 방언을 하고 방언통역을 하고 예언을 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의 신비한 면을 그 교회에서 경험했는데 놀라운 것은 목회자들뿐만이 아니고 평신도들이 그런 은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금요일 저녁마다 성경공부가 열렸는데 그런 자리에서 선배들이 서서 큰 소리로 방언을 하고 방언통역을 하고 또 예언을 하면 후배들은 조용하게 귀를 기울여 듣고 어떤 학생들은 그것을 받아 적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선배는 피아노 연주에 남다른 실력이 있어서 찬양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요리를 잘했어요. 그래서 한번은 교회 목사님을 자기 아파트에 초청해서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다른 학생들도 초청했기 때문에 저도 동석했는데 그 날 메뉴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옥수수 스프. 옥수수 스프가 포함돼 있었어요. 

제가 정말 놀란 것은 식사가 끝날 즈음에 그 선배가 담임목사님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느냐면 ‘목사님, 주님께서 목사님이 주님을 더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십니다.’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보통 신앙적인 권면은 목사가 교인에게 하는 것이 정석 아닙니까. 그런데 이 경우에는 심방을 받는 성도가 목사님에게 신앙적으로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이 어떻게 반응할까, 주의 깊게 긴장하면서 지켜봤는데 그 목사님이 잔잔한 목소리로 ‘I receive that brother. I really do - 형제여 내가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님 앞에서 신앙적인 권면을 하는 성도에 대해서도 놀랐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목사님에 대해서도 정말 놀랐습니다. 당시 저의 눈에는 그런 분들은 그야말로 까마득히 높이 계신 그런 분들로 보였습니다. 도저히 제가 따라갈 수 없는 거리가 먼, 저와는 급수가 다른 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대가족제도로 치면 상좌에서 따로 상을 받고 별도로 대화를 하는 그런 분들로 생각됐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와 비슷한 일이 기록돼있습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열두제자 중에서 특별히 베드로 ․ 요한 ․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일이요 예수님의 신비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나타나느냐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각각 대표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고 율법과 선지자가 바로 구약성서를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님과 함께 얘기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서 증거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는데 그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냐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얘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랄 노자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리 모세와 엘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비해서는 급수가 아래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이 자리에 초청받아서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놀라운 것인데 그 대화의 내용이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실 때는 보통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엇해주기를 원하느냐 라든가,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음을 네가 믿느냐 라든가,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든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든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라든가, 대체로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실 때 그들의 필요에 대해서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할 때는 예수께서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고 당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그들과 의논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지요.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일에 대하여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건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고난에 대하여 누구와 의논하기를 원하셨고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서 여기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른들의 대화인 것입니다. 어른들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베드로 ․ 요한 ․ 야고보가 엿들은 것입니다. 베드로 ․ 요한 ․ 야고보도 한가닥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들도 이 장면을 보고는 완전히 넋이 나가서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완전히 넋이 나간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은 이들이 넋을 놓고 있고 어른들 대화를 엿듣는 아이들과 같지만 이들도 장차 하나님 나라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야고보는 열두제자 중에 최초로 순교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가 될 것이고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쓰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베드로 ․ 요한 ․ 야고보야말로 모세와 엘리야보다도 더 큰 위상을 가진 인물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누가 더 위상이 크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은 이들이 작아 보이지만 장차 큰 재목이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에요.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 씨가 장동건 씨에게 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지요. 많이 컸네. 사람은 키가 크는 것뿐만이 아니고 영적으로도 큽니다. 크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크게 태어나는 건 아닙니다. 엄마 뱃속에서는 그야말로 손톱만큼 작게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크게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기들이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영적인 자양분을 사모하고 알려고 하고 또 보려고 하고 경험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고 또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자신의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의 문제뿐만이 아니고 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섬기는 것을 배우고 또 자신의 믿음을 나누고 가르치고 이러면서 이러한 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아이가 애기일 때는 굉장히 예쁘고 귀엽지만 그 아이가 아기이기 때문에 귀여운 것이지 나이를 먹으면 성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약 나이가 스물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기어 다닌다면 그것은 귀여운 것이 아니고 징그러운 것이고 이상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기일 때는 아기다워야 되지만 그러나 소년, 청소년, 청년, 장년이 되면 거기에 합당한 인격과 능력과 경험을 갖춰야 되는 것처럼 사람의 영적인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이 귀중한 신비한 자리에 베드로 ․ 요한 ․ 야고보를 데리고 가신 것은 그들은 어른이 하는 대화를 엿듣는 애들처럼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들도 장차 큰일을 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그 자리에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중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초청받아서 예수님의 장차 하실 일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는 대상의 된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청와대에 가서 식사를 하는 것처럼.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뿐만이 아니고 베드로 ․ 요한 ․ 야고보도 예수님과 그만큼 가깝기 때문에 이 자리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주로 나의 문제와 나의 아픔과 나의 소원을 아뢰는 대상으로만 생각할지언정 그 이상 그 이외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을 때가 많아요. 내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오고 내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 아뢰고 주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생각할지언정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비즈니스를 아뢰는 목적 이상으로 주님과 가까움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절친함, 가까움,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 friend of God-하나님의 벗이라고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기도의 내용을 우리의 소원을 구하는 것에 국한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무엇에 대해서 대화했습니까. 그들의 소원에 대해서 대화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관심사에 대해서 대화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대화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이 장차 이루고자 하실 일에 대하여 의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친밀함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내 문제와 내 관심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벗어나고 주님의 관심사,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 주님이 이루시는 일, 특별히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고 이것을 통하여 주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해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때부터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목적에 더 근접해서 우리의 소원이든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주님의 목적과 가까워지는, 그래서 일치할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세 번째는 주님과의 사귐이 가까워질수록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와 공유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예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당신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 남들에게는 잘 알리지 않을 것에 대해서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알려주신다, privy, 공유하는 것이 허락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유가 허락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마치 형님들이 할아버지, 아버지와 상좌에 앉아서 가정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주님과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일에 대해 공유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베드로 ․ 요한 ․ 야고보가 예수님과 가까우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는 것이 허락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믿음의 사람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과 의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장차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왕의 왕이 태어날 것에 대하여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고 그 일에 대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그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것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라면 주님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whoever-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누구든지 입니다. 그것이 그 구별되는 조건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저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더불어 먹는 것으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양방통행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는 그저 내가 내 문제를 하나님에게 아뢰고 그리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일에 대하여 우리로 관심을 갖게 하시고 그래서 기도를 하는 중에 우리의 소원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기도를 하는 중에 내 소원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고 이전에 염려됐던 것이 더 이상 염려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내 문제뿐만이 아니고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평강을 얻지 못합니까. 자기의 일이 너무 긴급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의 일이 너무 급하게 발등에 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심이 없고 그의 삶에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대인의 증상인 것입니다. 자신의 당면한 문제 외에는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가 없어요. 이웃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더 생각할 여유가 없는 이유는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문제만이 급박하고 긴급하고 그것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이것이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염려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내 문제가 아닌, 이웃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우리의 관심사가 바뀌고 우리의 소원이 바뀌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의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그 비밀을 공유할 수 있고 함께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의견을 물으십니다. 이건 정말로 대단한 특권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의견을 물으시고 우리의 의견을 들으시고 우리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당신이 만든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일에 대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스리고 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중보하고 다리의 역할을 하고 어른의 역할을 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 주님께서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신다면 그것보다 더 특권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합니다. 베드로 ․ 요한 ․ 야고보가 이때에는 넋이 나가서 꿈같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저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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