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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영혼의 성소가 있는가? (눅 2: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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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성소가 있는가? (눅 2:22~33)


사람은 누구든지 어떤 장소에 자주 가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극장에 자주 가는 사람은 배우가 되고 태권도장에 자주 가는 사람은 무술인이 되고 학교에 늘 가는 사람은 학사가 된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와 기도의 자리 등 성소 찾기를 자주하는 사람은 구별된 사람이 된다. 

레위기 12장은 산모가 아들, 딸을 낳았을 때 정결해지려면 정결법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즉 남자 아이를 낳은 산모는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여자 아이를 낳은 산모는 66일을 지나야 정결해진다. 산모는 이 정결법을 따라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데 아기를 데리고 성소로 가야 한다. 산모가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 비둘기나 집 비둘기로 제물을 삼아야 한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주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러니까 눅2:22의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란 말씀은 성소에 나아갈 때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마리아도, 요셉도 성소를 마음에 두고 성소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이 요구하는 사항대로 움직이고 있다. 

눅2:41을 보라.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북부에 사는 나사렛 주민이 종교적 순례를 위해 해마다 남쪽의 성소를 향하고 있다. 이는 거리를 문제삼지 않는 성소 중심의 삶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소는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가시적 교회의 기능을 외면하고 사람으로서의 교회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교회가 이 시대의 성소임을 모를 때가 많다. 학교든, 시장이든, 기도하는 자리, 말씀 보는 자리, 복음을 전하는 자리인 그곳이 성소라고 하지만 가시적 교회에서 일어나는 예배, 설교, 교육, 봉사, 전도, 교제 없이 삶의 현장이 성소로 이용될 수 있는가? 그렇게 되기 어렵다. 교회가 성소가 되는 사람이 삶의 현장을 성소로 삼는 수도사의 영성을 지니게 된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아무리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광야라는 세상에 서 있는 성도다. 이 성소에 소속하는 삶을 잘할 때 삶의 자리도 거룩한 곳이 된다. 

사실 내 인생의 변화도 보이는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영적 거듭남이 일어났다. 영적 성장과 성숙이 진행되었다. 교회에서 집회에 참석하고 말씀을 배우므로 영원한 것에 눈을 뜨고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에 눈을 뜨게 되었다. 교회가 나의 신앙의 요람이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을 갖게 하는 교회는 바로 성소다. 

성소란 구별된 장소란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거슬러 살며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바른 삶을 살려면 내 영혼의 성소가 정해져야 하고 성소 찾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제약을 받기 싫어서 교회에 소속하지 않고 교회를 성소로 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철새처럼 말씀만 들으면 된다는 좋은 설교 찾는 신앙인으로 이곳 저곳을 배회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모이 찾는 철새 신앙인이라 부른다. 이 사람들은 교회의 사역 앞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부담감도 갖을 필요가 없다. ‘여기 저기 교회를 옮겨 다니며 말씀을 듣고 모이만 맛있게 먹어대면 된다.’는 이런 신앙. 내 성소가 정해지지 않는 이 신앙이 문제다. 일을 하지 않기에 살만 찌고 귀만 커져서 병들어 간다. 결국 영혼이 죽어간다. 무력한 기독교가 된다. 이런 모이 신앙을 버려야 한다. 내 영혼을 위한 성소가 확정되어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부모가 성소를 찾은 이야기이다. 이 본문을 통해 성소가 정말 중요한 자리임을 알게 된다. 성소는 어떤 곳일까?

  
1. 성소는 귀중한 것을 드리는 곳이다. (눅2:23~24)

눅2:23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라고 하였다. 아기를 주께 드리는 율법은 무엇인가?

출13:2을 보면 그 대답이 있다.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처음 태생은 모두 다 주님의 것이다. 아무리 귀하고 예쁘고 가치있어 보여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모님들은 성소에 올라갔고 첫 태생인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려 한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다. 이는 참으로 마땅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봉헌을 위해 마리아와 요셉은 성소에 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드려야 할 것들을 성소가 아닌 곳에 드릴 수 없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제단 위에 올려드려야 한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할 때 정해진 성소로 향했다. 가까운 곳, 더 좋은 곳, 더 예배하기 편한 곳이 있든지 없든지 가리지 않고 뛰어넘었다. 오직 삼일 길을 걸어서 정해진 모리아 제단으로 갔다. 그러므로 성소는 일반 장소와 다르다. 귀중한 것을 드리는 곳,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곳이다. 하나님의 눈과 귀가 머무는 곳이다. 

우리도 성소 신앙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할 성소다. 시간, 재능, 물질, 사람까지도 드리는 정해진 장소다. 그 성소에 제사하고 제물을 드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손을 채워주신다. 새해부터는 교회의 성소를 소중히 여겨라. 성소를 예배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면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예비하시는 모든 것을 만난다. 

  
2. 성소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눅2:28)

눅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라고 하였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게 된 것은 눅2:27에 그 까닭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만나게 된 것은 성령의 감동 때문이었다. 

눅2: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이 그 위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시므온을 소개한다.

눅2:26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시므온을 소개한다.

성령은 베들레헴에서 성소로 나아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상경한 예수의 가정을 위해 시므온을 성전으로 보내셨다. 그래서 믿음의 가정과 경건한 시므온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품에 있는 아기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말해주는 시므온을 만나게 되었다. 이 특별한 만남의 축복, 그것은 성소에서 일어났다. 성소로 나아오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성소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영적으로 풍성한 선지자를 만나는 곳이다. 성소에 나오는 이는 신령한 이를 교제하게 된다. 은혜를 아는 자는 더욱 더 은혜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믿음을 사모하는 자는 더욱 더 큰 믿음의 체험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성소에서 벌어지는 영적 은혜다. 

술집에 가는 술꾼은 더 큰 술꾼을 만난다. 노름방에 가는 노름꾼은 더 큰 노름꾼을 만난다. 어느 장소에 가느냐가 그의 사람됨을 결정한다. 하지만 성소로 가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을 만난다. 제사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찬송하는 사람, 보다 더 신령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다. 

성소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내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세상적인 것을 동경하여 세상의 오락과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것을 버리고 성소를 마음에 두라. 교회를 마음에 두라. 그러면 말씀의 사람을 만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만난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자들이 아니라 내 영혼을 강건하게 하는 의로운 사람을 만난다. 이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진짜 크리스챤, 특별한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 거기서 알고 배우고 깨닫게 된다. 영혼을 위하여 한 번이라도 더 성소로 가라. 이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제단 앞으로 나아가라. 당신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당신을 새롭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이다.

  
3. 성소는 축복의 말을 듣는 곳이다. (눅2:34)

경건한 시므온이 성소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쳤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시므온에게 발견된 예수님은 구원자였다. 온 세상을 건지러 오신 주님이셨다. 계속하여 시므온은 주님을 이렇게 선포한다.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제대로 발견했고 제대로 예언했다는 증거다. 성소에 들어간 마리아는 이 축복의 예언을 듣고 놀라워했다. 시므온의 축복은 눅2:34에서 계속된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라고 하였다. 예수의 부모님들은 성소에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 엄청난 축복의 말을 들은 것이다. 

성소는 예배하는 곳이다. 성소는 죄를 용서받는 곳이다. 성소는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는 곳이다. 그러나 성소에서 마리아는 축복의 예언을 듣고 놀라워하게 되었다. 성소는 미래의 청사진을 보는 곳이다. 축복의 말이란 예언적인 비전이 되어 희망을 넘치게 하는 곳이다. 나의 오늘의 모습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게 하는 곳이다. 성소는 귀하다. 교회라는 성소는 정말 귀하다. 성령이 운행하는 교회로 나아가면 언제나 축복의 말씀을 예언으로 듣게 된다. 어린이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 이들은 꿈을 꾸는 축복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듣게 된다. 교회는 꿈의 산실이다. 축복의 청사진을 받는 꿈의 수신소다. 

나는 크리스챤들이 성소로서 교회를 마음의 중심에 두기를 원한다. 아이를 어렸을 때부터 데리고 나아와 교회에서 예배하기를 원한다. 교회로 나아와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를 원한다. 매일 매주 제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들이 축복의 예언으로 들려지기를 원한다. 교회가 영혼의 성소로서 어머니 품 같고 오래 정들은 고향 같고 늘 가보고 싶은 내 집 같은 곳으로 자리 잡기를 원한다. 

나는 교회에 처음 나간 이래로 교회가 좋았다. 교회는 내 삶의 전부다. 내어 맡길 만한 성소 중의 성소라고 느껴졌다. 황량하기만한 세상,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들의 무대에서 살다가 뛰어 들어간 교회는 전혀 다른 구별된 곳이었다. 지금도 교회는 좋다. 지금도 교회는 내 영혼의 성소다. 그래서 교회당이 좋아 교회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내 취미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 곁에서 서성거리고 싶듯 내가 교회를 성소로서 좋아한다. 내가 지은 「교회 뜰」이란 글을 소개하면 이렇다.

머릿돌 만져 보고 뜰을 한 바퀴 돌았네
십자가 종탑을 올려보고는 뜰을 또 한 번 돌았네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듣고 싶어 뜰을 돌고 
기도하러 오는 교인 만나러 뜰을 돌고
돌면서 헤아려 보니 일곱 바퀴가 되고
뜰에 서 있는 고마움
자꾸 돌고 싶은 교회 뜰  

왜 이 복된 교회를 중심에 두지 못하는가? 성소에 머물러 둔 예수님, 태어난 지 33일만에 성소에 나아간 아기 예수님은 정말 균형 잡힌 예수님으로 성장하셨다. 

눅2:40, 눅2:52을 보면 정말 부족함이 없는 축복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신다. 성소에서의 만남, 성소에서의 축복, 성소에서의 헌신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중요한 장소가 많다. 학교, 학원, 도서관, 예술의 전당, 많은 곳이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어디인가? 부모로서, 크리스챤으로서 그 장소가 교회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정말 교회에 가는 것이 다른 장소에 가는 것보다 기쁘고 안심이 되고 평안하고 즐거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이상 머뭇거리며 마음의 성소를 정하지 못한 한 해였다면 내가 내 모든 것을 드리는 성소를 이 한 해를 보내기 전에 확정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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