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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그대로 두소서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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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두소서 (눅 13:6~9)


2009년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오늘 송년 주일로 보내고자 합니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누구나 똑같이 느끼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말을 합니다. 또,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려 말년에 우탁이라는 문인은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는 시조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학생시절에 누구나 다 외웠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말년 시조도 모두 시간 개념입니다. 어느 날 제가 실수를 해서 새 성경책 한 권을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 주례 할 때는 언제나 신랑, 신부에게 새 성경책에 “축 결혼 신랑 ○○○ 신부 ××× 주례 이필재” 그리고 평생 행복하게 살라는 문장과 함께 날짜를 써서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날도 주례가 있어서 항상 제가 하던 대로 새 성경책을 펴놓고 그렇게 쓰는데 “축 결혼” 이렇게 써놓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는지 “신랑 이필재” 라고 썼습니다. 그러니 그 성경을 어디에 쓰느냐 말입니다. “착각은 자유”라고 누가 그러더니 세월이 갈수록 이 착각의 퍼센트가 많아지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능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생존권의 욕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제 할아버지는 장수하셔서 100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손자, 손녀들이 수십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 사시니까 장난꾸러기 손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면 손자들이 할아버지한테 가서 자주 놀리는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언제 죽을 건데?” 그러면 할아버지가 늘 무슨 말로 대답하셨느냐 하면 “나보다 먼저 죽지나 말아라!”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해가 바뀌는 시간 개념이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3년을 왔으나” 하는 말이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는 말은 모두 시간 개념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거의 같은 정신적 공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한 과일 나무를 조명했습니다. 먼저 성경 내용을 설명하려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동기부터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유대 나라는 망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동네마다 망대를 높이 만들어서 항상 파수꾼이 망대를 지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망대 이야기, 파수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그 망대에 있던 18명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해석해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죗값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은 줄 아느냐?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오늘 비유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면서 왜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일은 안하느냐? 너희도 그렇게 망하게 된다.”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재료는 포도원, 즉 과수원에 숨겨진 무화과나무입니다. 여기 6절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원이란 온 세상을 뜻합니다. 그 중에 무화과나무는 지금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초점으로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다른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주인이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열매 맺지 않은 나무를 찍어버려라. 왜 땅만 허비하느냐? 

내가 3년 동안이나 와서 열매 산출을 기대했으나 얻지 못했다.” 여기서 3년이라는 숫자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365일이 3번 지나간 개념이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는 숫자 문화가 있습니다. ‘3’은 완전 숫자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넉넉히 지나간 후를 말할 때 항상 3년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살아왔는데 사실 예수님 시대까지 세 가지 특징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율법 시대, 선지자 시대, 그리고 메시야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가장 큰 열매를 맺기 바라며 유대 민족을 선택하셔서 키워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 유대 백성들은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준 이 영생과 구원의 선물을 너희들이 수고하여 온 세상에 나눠 주어라.”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구원의 선물을 유대교라는 종교로 만들어서 그 안에 가두고 누구도 주지 않는 제도적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저절로 자랐거나 야생 돌 무화과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름을 주고 비싼 노동력을 지불하면서 정성스럽게 투자를 한 무화과나무입니다. 과수하는 경영주들은 과일 나무 한 그루에 들어가는 생산성 비용이 있고 만약 그것이 실패할 경우 어떤 손실이 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일나무를 수십 년간 길렀는데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집안은 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 주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최종 결단을 내렸습니다. “찍어버려라.” 우리가 연말이 되면 결산을 합니다. 

사업체도 결산을 내고 교회도 결산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 결산도 생각해 보는데 이것이 연말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선물을 독점하고 절대 구원 선물을 이방인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있습니다. 완전수가 되도록 하나님이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종 결론은 “찍어버려라.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 이렇게 예수님이 설교하신 겁니다. 

인생의 결산 의미는 성경 속에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 설교도 다 종말론적 설교 개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마지막 주일을 지나는데 일 년이라는 세월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면 8,760시간이 됩니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잠자는 시간으로 보통 우리가 2,500시간을 1년 동안에 잡니다. 2,000시간 일합니다. 1,300시간을 먹는데 소비합니다. 1,000시간 정도를 자동차 안에서 자게 됩니다. 

500시간을 신문, TV 보는데 소비하게 되고, 500시간을 세수하고 옷 입고 화장실 다니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전화 받는데 300시간, 이것저것 기다리는데 100시간 정도를 보냅니다. 이 모든 시간은 컴퓨터로 계산해 낸 것입니다. 아마 사람에 따라서 이 계산은 다를 수가 있지만 대략은 다 비슷합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하시는 교우들은 약 500~1,000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물질 계산은 확실합니다. 가계부 정리하는 주부들은 1년 동안 어디에 돈을 지출했는가를 가계부에 기록해 놓으니까 금방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 물질, 건강, 은사를 어디에 소비하고 살았나 하는 것이 결산의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제도를 보면 아주 신비합니다. 항상 새로움을 찾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날마다 아침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제 일을 청산하고 오늘 새로움의 길을 가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일주일 동안 예배를 통해 은혜 받은 마음으로 또 일주일을 시작하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열두 달 동안 한 달, 두 달을 결산합니다. ‘이달에 어떻게 되었나? 그 다음 달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것이 새로움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일 년이 지나고 새로운 해가 된다는 것은 더 큰 의미의 새로운 역사를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또, 더 크게 계산하면 10대, 20대, 30대, 40대를 어떻게 살았나 10년씩 새로움의 역사로 살 수 있는 제도적 삶을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말씀과 같이 땅만 허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용하면 작은 것도 내게 큰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6·25 전쟁을 다 기억하시죠? 공산당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마을에서 전쟁할 만한 젊은이들을 다 소집하여 따발총을 주면서 전쟁에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반항하면 죽입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공산당이 되어 할 수 없이 월북한 청년들이 많은 겁니다. 지금 이산가족 만난 사람들은 월북한 사람들이 80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에서 공산당이 이와 똑같이 마을 청년들을 모두 마을 회관으로 모이라고 소집했습니다. 청년들을 모두 차출해서 “너희들은 군인이다. 미군들과 싸워야 된다.” 따발총 주면서 별안간 인민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안가면 죽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생존권 때문에 공산당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어떤 한 사람도 마음에도 없이 공산당이 되어 공산당 복장을 하고 미군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수용소 안에는 군목들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 군목, 한국 군목들이 성경책을 무조건 한 사람씩 나눠주며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포로이니까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신복교라는 포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수용소 안에 예배드리다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살아라.” 그런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공산당이 두 패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자유대한에서 살겠다. 북한에 안가겠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과 “너희들 어버이 수령을 배반할 거냐? 우리는 모두 북한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큰 포대에 보따리 하나씩 집어넣고 “가려면 가라. 수용소에서 가지고 있던 옷, 구두, 개인 소집품은 가지고 가라.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았다. 내 마음에도 없는 공산당이 되었는데 살았다.’ 각자 소집품을 정리하는데 그동안 목사님들이 나눠준 성경을 사람들이 다 집어 던지는 겁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성경을 다 버리는 구나!’ 그래서 자기는 헌 옷가지, 신발을 다 버리고 남들이 버린 성경을 자기 포대에 가득하게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다 버려져 있는 겁니다. ‘이것을 모두 가져가야 할 텐데….’ 옛날 군복에는 주머니가 많았습니다. 

있는 주머니에 성경을 두 권씩 전부 채우고 가려고 하는데 북한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산당들이 어떻게 탈출을 했는지 총들을 몇 자루씩 가지고 와서는 남한에 남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겁니다. “이 나쁜 놈들! 북한으로 가야지!” 그러면서 총을 쏘며 막 죽이는 겁니다. 결국 남한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습니다. 신복교 씨만 살았습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성경을 주머니에 넣었는데 성경책 중간에 총이 들어온 겁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을 가지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 모두 나눠주며 예수 믿자고 해서 성경책이 우리 아들 살렸다고 할머니부터 할아버지까지 미신 섬기던 것을 전부 불태워 버리고 예수 믿고 마침내 교회가 없던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목사님을 모셔서 세운 교회가 순성 감리교회입니다. 그 가족들이 지금 우리교회 교인들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 중에 제일 큰 은혜가 뭐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생존권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또 다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이 큰 은혜를 사람들이 거의 잊어버리고 삽니다. 새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또 가능할 수 있는 새 역사의 시간에 내가 또 다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이나 가능한 기회가 또 다시 나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변하지 않고 진행되는 자연 법칙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생존권에 대한 행복을 새롭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무의미한 삶을 지루하게 연결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있지요? 그 년이 그 년이라고요. 대 기업들은 1년 사업 결산서를 발표합니다. 그래서 흑자 결산을 낸 기업들은 성과금을 주면서 모두 신이 나서 좋아하는데 그렇지 못한 기업은 사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고 울상이 됩니다. 이것이 연말 결산의 의미란 말입니다. 

이제 이 열매 없는 나무의 운명은 찍어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큰 자비의 사건 하나가 주워집니다. 과원지기의 소원이 나타났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시간의 연장 의미가 나타납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그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원지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자가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모든 인생의 시간을 연장시켜서라도 오래 참으심을 요청하신다는 것입니다. 버나드 쇼의 묘비는 “갈팡질팡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라고 씌어져 있답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이런 생각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아직도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혜 안에 생존권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오늘 성경말씀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이 후”라는 말이 있는데 신학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후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 후’가 뭐냐? 나의 남은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이 후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후를 위해서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단어 “만일”이라고 그랬는데 이 만일은 양면성입니다. 

창조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는 의미입니다. “창조적이냐 부정적이냐는 너한테 달려있다.” 교회 공동체를 목회하는 목회자로서 2009년 연말을 결산해 낸다면 우리는 큰일에 대한 업적은 없지만 노력하는 교회라고 평가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몇 가지 가는 길이 있는데 제일 먼저는 우리 자신의 풍성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교인들을 보면 우리 목회자들은 영적 감각으로 평가합니다. 비교적 모두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국 교회에 흔하게 나타나고 있는 분열에 의한 상처는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에 충실했다고 평가해도 좋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이 그토록 간절하게 부탁하신 지상명령 선교는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고 평가가 됩니다. 이제 임기 만료된 선교사까지 7년 동안 45개국 1,200명 선교사가 무난히 파송이 잘 이루어져서 기초가 튼튼해 졌고 선교지에 61번째 교회건축이 완공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 자체 교회도 많은 성장을 해서 이제는 헌금 예산의 40퍼센트를 선교비 지출을 하고도 계획한 본 교회의 모든 프로젝트에 차질 없는 마감을 잘 이루었고 지난 1년 동안 장막터를 확장하는 일에 아름다운 마무리가 이루어짐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교회 교우들의 아름다운 헌신적 수고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의 노력과 기도가 이루어낸 성취라고 우리는 평가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 후 신학이 얼마나 많은지 다 나옵니다. 엘리야 때 바알 종교에 휘말려서 유대 민족의 정신문화가 암흑기가 되었을 때 엘리야가 뭐라고 기도합니까? “하나님, 다 망했습니다. 나 밖에 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 마저 죽이려 하니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후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 쓰러진 암흑기에서 엘리야의 손을 끄집어내서 “나는 이런 일을 너와 함께 계획해 나가겠다.” 그래서 이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새롭게 이루어지는 신학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암흑 역사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다 불구덩이에서 망했는가? “아니다. 이 후가 있다.”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폐허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해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노예로서 400년 동안 이제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절망하던 유대 민족을 하나님이 “이 후가 있어.” 모세를 내세워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거야.” 새로운 역사를 이 후에 시작하셨습니다. 세상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이 히틀러에 의해서 마귀 집단 같이 되어 버린 후 “그러면 우리는 다 망한 거야? 온 세상 사람들이 히틀러 때문에 우리는 다 죽일 놈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 거야?” 

그럴 때 희망의 신학을 외쳐 이 후를 창조한 몰트만 박사 때문에 독일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폐허가 된 덴마크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이제 살 수가 없어.” 하나님은 “아니야. 이 후가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고 이 후 신학을 부르짖은 그룬트비 목사의 활동 때문에 지상 천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후 신학’입니다. 나에게 새로운 역사가 주어진다는 ‘이 후 신학’입니다. “하나님, 나는 다 망했습니다. 할 것도 없습니다.” “아니야. 나는 너의 손을 붙잡고 이 후를 창조해 낼 거야.” 

마지막 주일의 의미는 이 후, 오늘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겁니다. 일 년 동안 있었던 행복했고 괴로웠던 추억 중에서 안 좋은 추억은 오늘 다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 후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거름을 주며 싸며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의 손을 붙드시고 하나님께 간청하시는 주님의 신뢰를 우리가 감사드리면서 우리 모두 이 후 신학의 발견을 가지고 다가오는 2010년의 새해 아침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이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시는 이 후를 바라보면서 괴로웠던 모든 추억을 소멸시키는 오늘 마지막 주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2010년의 밝아오는 아침 햇살과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의 역사를 힘차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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