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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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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 (벧전 1:3~7)


201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 주일예배에 참예하신 여러분과 가정 위에 주의 은혜가 금년 내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만 되면 무언가 한 가닥 기대감을 걸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보지 않습니까? 한 해가 바뀔 때 마다, 동해 바다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모으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이, 지난  조그마한 해안선 역인 정동진에만도 3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올해도 바닷가에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비비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인간의 실존입니까? 이와 같이 나약한 존재인 우리가 새해를 다시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안튼 이 한해를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해를 살아가지만, 국내적으로 아직도 나라의 살림을 끌어가는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혼란 속에 빠져있고, 경기침체로 인해 서민들의 마음은 무겁기가 한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로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놓인 숱한 문제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했던 사람들을 이 아침에 만나보려고 합니다.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였습니다. AD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거의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여기 저기 널려진 폐허의 잿더미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무렵 로마시에는 한 악성 류머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을 돋구기 위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케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 비린내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동굴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은 존재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이때를 전후해서 쓰여진 서신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해주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제 베드로전서 1:1의 편지 서두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신앙의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1세기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분명 다른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전 세계적인 테러,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대립,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과 박해가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때에 희망은 여전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하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사건은 희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찾아오신 그 주님은 인생 최대의 절망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한 순간 우리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새로운 소망 곧 살아있는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3절의 증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이유-우리를 향한 그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없이 살고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그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우리를 찾아오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절망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새 소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1996년 사라 브라이트만과 함께 부른 “안녕이라 말해야 할 시간”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한 안드레아 보첼리를 기억하십니까? 얼마 전에 저는 우리 신주열 전도사님께 이 음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사고로 인해 완전히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좌절하고도 남을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덮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만에 마음을 추수린 다음에 새로운 삶의 길을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법학 박사가 되고, 변호사로 활동한 뒤, 마침내 어릴 때 꿈이었던 노래로 돌아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분일초라도 한탄하는데 허비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겸손하십시오” 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희망은 접어버릴 것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야  할 보배입니다. 

보첼리는 자신의 일기에 이런 이야기 한 토막을 담았습니다. “내가 마음 속 깊이 간직했던 꿈들은 현실이란 장벽에 부딪쳐 깨져버렸다. 산산 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난 몸을 숙여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이제 끝없는 인내로 그것들을 다시 맞추려한다. 그 맞추어진 조각들은 나의 옛날의 찬란한 빛을 돌려주고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합니다. 

우리는 너무 손쉽게 포기합니다.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희망의 불씨를 꺼뜨립니다. 그리고는 길고 긴 변명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겨버립니다. 절망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절망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않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실패해서 절망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이 시대에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Living hope. 살아있는 희망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주님.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소망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하신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함-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지한 희망의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두 번째로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우리가 약속 받았기 때 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어오는 소리가 기업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 되었다. 며칠 전에 보니까 금호 그룹 산하 계열 회사가 무너졌다. 

오너의 경영권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또 쌍용이 무너질 것이다. 계속 기업 소릴 듣습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업니다. 이것은 심지어 1세기 성도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그들의 이 기업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초대 성도들이 드렸던 놀라운 고백 하나를 여러분 읽어 보세요. 히브리서 10장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34절입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네,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그들의 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했습니다. 경험했습니다.그런데 우리하고 다른 것은 뭐예요? 산업을 빼앗길 때 어떻게 당했다고 했습니까? 기쁘게 당한 것은, 그랬어요. 그들은 이 땅에서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김을 당하면서도 기쁘게 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뭐라 그랬습니까?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들이 지상의 기업을 잃어버리면서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낫고 영구한 산업, 빼앗기지 아니하는 기업 흔들릴 수 없는 기업 영원한 기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의 권한과 시련을 이기는 초대 성도의 저력이요 dynamic한 생동하는 믿음의 근거였던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합니다. 4절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이라.” 네, 하늘나라의 기업을 얘기하고 있어요. 

자, 이 기업을 가리켜서 어떤 기업이라고 설명했습니까? 세 가지 특성을 말했는데 썩지 아니하는 기업, 영원한 기업입니다. 더럽힐 수 없는 기업, 이것은 거룩한 기업입니다, 그다음에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불멸의 기업. 그 영원한 기업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셨다. 어디에? 하늘에 간직한 것이다. 빼앗길 수 없는 기업이 있어요. 다 빼앗겨도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 한 기업을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 비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자, 이 소망의 기업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장하시는가. 자, 그 다음 절을 읽어 보세요. 5절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이 기업만은 아무도 흔들 수가 없습니다. 부도 낼 수 없는 기업. 빼앗길 수 없는 기업, 이 하늘의 영원한 기업은 무엇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요?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지키심을 받습니다. 이 기업이 영구히 존재하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이 시대야 말로 천국 소망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우리 시대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과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 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성도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예요. 천국을 믿었어요. 제임스 그레이라는 유명한 신학 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 추석 때 혹은 이 구정 설날 때 보면 이 고속도로가 꽉 메워 지잖아요.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 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 입니다. 내 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 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네,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 온 기쁨. 우리가 확신한 본향. 저 천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 은 어려움 견딜 만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유익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련이 가져올 믿음의 구체적인 유익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국의 소망만이 우리가 가진 본질 적 소망이 아니라 또 그 소망과 더 불어 이 땅에서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 유익 가운데 하나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예요. 

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여기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 여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단어는 본래 여러 가지 색깔이라는 뜻입니다. 형형색색의 시험을 우리는 이 땅에 서 경험합니다. 육체의 질병, 인간관계의 단절, 경제적인 시련, 형형색색 의 시험을 만나요. 자, 이 시험 앞에 서 우리도 근심합니다. 성도들 근심해요. 

자, 근심 절대 안 하는 성도 봤어요? 근심하는 것은 당연 해요. 당연해요. 여기도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서 근심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 이라면 그 근심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근심은 얼마 동안이어야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잠간 그랬어요.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마침 내 뭐 한다구요? 오히려 기뻐한다. 근심은. 넘어서서 마침내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이 커다란 기쁨의 이유. 그 이유가 뭐라 그랬어요. 그 다음 절이 대답을 들려주죠?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 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습니까? 

여러분. 여기 7절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이 나와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류의 시험이 결국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우리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하신 시련이예요. 그래서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내가 이 시험을 제대로 성도답게 통과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믿음의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입니까? 이것은 주님 앞에 서는 날, 내가 칭찬 받을 자,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로 마침내 내 인격이 빚어져, 새로워져, 영광스러워져, 성숙한 자로 세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시련의 상처를 십자가에서 입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침 뱉음을 받으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했습니다. 모함했습니다. 음모했습니다. 거짓 증인을 세워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랑하고 아꼈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잠시 동안이지만 거절당하시고,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련의 용광로 속에서 무너지신 게 아니라, 보혈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는 보혈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보혈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보혈을 마신 자들은 이 한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캄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빼앗기지 않는 산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시련을 통해서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가 바뀌었다고 우리의 ‘모든 것이 다 달라지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붙잡고 몸부림을 쳐야 하고, 그것 때문에 그냥 주고 앉고 싶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흔들림없이 그들의 갈 길을 걸었던 것은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희망을 갖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사람은 고난이 닥쳐올 때 오히려 기쁨의 수위를 한 단계 더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발버둥 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뻐하는 웃음소리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내던져 기쁨을 발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다고 주춤거리지 마십시오. 고통스럽다고 얼굴 찡그리지 마십시오. 

이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내 인생 비참하다고 울상짓지 마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예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의 순간에 희망을 노래하십시오. 예수의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고난의 순간에 기뻐 뛰노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이 큽니다. 이제 그 상을 바라보고 기대하십시오. 

그 때 내 믿음은 더욱 순결해 질 것이고. 나는 주 앞에도 거룩한 자로 세워지고 있을 것입니다. 마침 내 어느 날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시련을 통과하고 그 앞에 칭찬 받을 자로 그리고 영광스러운 자로 그리고 존귀한 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련의 폭풍의 한 복판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특별히 우리교회 금년 표어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각자가 먼저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나의 희망으로 삼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희망의 증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일들이 한국의 교회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참 희망이신 하나님이 전파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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