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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습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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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습 3:17)


“올해에 거두려거든 곡식을 심고, 십 년에 거두려거든 나무를 심으라. 백 년에 거두려거든 사람을 심고, 영원히 거두려거든 복음을 심으라.”
이 말은 성서신학대학교 설립자인 강태국 목사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입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도 있습니다. “하루를 즐거우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이 즐거우려면 옷을 사 입어라. 한 달이 즐거우려면 친구를 사귀어라. 일 년이 즐거우려면 취직을 하라. 십 년이 즐거우려면 결혼을 하라. 평생이 즐거우려면 예수님을 영접하라”

201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한 바울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2010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를 막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새로워지는 본인도 좋고, 가족도 좋으며, 주변 사람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어두운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결심을 가집니다. 희망이 가득한 내일을 기대합니다. 매일같이 똑같은 생활에 따분할 것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루할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이 있으므로 인생이 재미있습니다. 살만합니다. 살고자 하는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자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매일같이 새로운 것을 얻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날입니다.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알입니다. 새 날입니다. 새 날은 새로운 은혜를 받는 날입니다. 

어느 누구도 2010년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날을 향해 새로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합니다. 새해에는 지난날과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멋에 겨워 내 마음대로 살아왔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를 머금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을 위하여 한 마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 하나까지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길을 잃은 양 각기 제 길로 가 버린 양을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 양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찾아 나섭니다. 심지어는 죽어 마땅한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주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요 우리가 이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한데 그 사랑이 결코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임금이 결산을 하다가 한 사람이 금 일만 달란트를 빚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갚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는데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 빚을 갚으라 하니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어찌 보면 몹시 식상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십시다. 

금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자 한 사람이 6,000일 동안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주일은 쉰다고 한다면 자그마치 20년 동안 벌어야 금 한 달란트가 됩니다. 그러니까 금 일만 달란트는 20만년 동안 벌어야 할 액수입니다. 그러니까 금 일만 달란트의 빚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 하겠습니다.
반면에 1 데나리온이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00데나리온 빚을 졌다 함은 네 달치 정도의 봉급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인 나의 관계는 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임금과 금1만 달란트 빚진 종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천 번, 만 번을 죽었다 살아난다 하더라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죄의 빚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긍휼의 은혜를 덧입은 종은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친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쏟아버리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혜를 머금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용서와 용납으로부터 우리의 발걸음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데 겨우 나를 속상하게 만들고 내게 상처를 주는 한 두 사람으로 인해서 그 은혜를 쏟아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은혜를 머금는다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머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배의 생활화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성전을 귀하에 여기며 예배하며 찬양하는 자로서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귀하게 여기고 예배하며 찬양하는 자로서 살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평가하고 그렇지 못하면 악하였다고 평가를 합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며 겸손으로 머리를 숙이며 항상 하나님의 전을 기쁨으로 찾아와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바냐 1장 6절은 또한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 곧 여호와를 배반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또한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이 여호와를 배반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멸절하리라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스바냐 2장 3절에서도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력으로도 아니 되며 오직 여호와의 영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경배하며 찬양하며 부르짖어 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특히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스바냐 3장 2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여호와를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올 한 해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성령의 공급하시는 은혜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실천하는 순종의 사람이요 새벽을 깨우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성도를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먼저는 둘씩 둘씩 내보내셨던 70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항상 함께 먹고 자고 함께 다니면서 그 삶으로 보여 주시고 틈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던 12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특히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때로는 따로 불러서 그들만의 앞선 경험이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 반 동안 12명의 제자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훈련하시며 가르치심으로 키워내셨고 마지막 부활하시고 다시 승천하시기까지 흔들리는 그들의 마음을 잡아주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는 주의 종이요 주의 양을 치고 먹이는 목자로 세우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들을 키워내야 하고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으로 든든히 서야 될 줄로 압니다. 
마치 은을 도가니에서 제련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도 우리로 하나님의 좋은 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군사란 싸움에 나서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오직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불구덩이 속까지도 뛰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맡겨진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군사로 부르신 분이 기뻐하시도록 그렇게 싸워야 하는데 먼저 기억할 것은 그 싸움이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그 싸움에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의 장수가 되시는 주님의 명령대로 따르기만 하면 우리 역시 이기고 또 이기게 되는 것이요 그럴 때 우리를 군사로 부르신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승리의 첫 번째 비결은 순종입니다. 

신명기 28장 7절에서 약속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면 이는 곧 나를 영접함과 같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섬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먼저 섬시기는데 하물며 우리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너희가 심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씨앗은 정직합니다. 배를 심으면 배가 나오고, 사과를 심으면 사과가 나옵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씨앗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환경이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과거에 심은 씨앗의 결과입니다. 

물론 삶 속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우리가 심은 씨앗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천재지변이나 예상치 않은 사건, 사고가 우리 인생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가 과거에 심은 것을 지금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심고 있는 것을 장차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심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일 때가 많습니다. 나쁜 씨앗을 심으면서도 좋을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속히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삶을 정말 어리석은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7~8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씨앗을 심을 때 먼저 무슨 열매를 맺고 싶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따라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상추가 먹고 싶으면 상추를 심어야 되고 깻잎이 먹고 싶으면 깻잎을 심어야 합니다. 호박을 먹고 싶으면 호박을 심고 감을 먹고 싶으면 감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심는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는 원리는 우리 삶 속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존경을 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을 심으십시오. 사랑 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을 심으십시오.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인정해 주고, 칭찬받고 싶으면 먼저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복을 받고 싶으면 먼저 복을 베풀고 용서를 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를 베푸십시오.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이해해 주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심으면 먼저 남을 긍휼히 여기며 위로받고 싶다면 먼저 남을 위로해 주십시오. 

당연히 먼저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게 마련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바울 또한 그러한 삶을 살면서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먼저 섬겨주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섬김은 먼저 낮아지는 섬김이요 목숨까지 내 주시는 섬김입니다. 주고 주고 마침내 목숨까지 내어준다고 할 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옛날에 유능한 건축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그는 드디어 은퇴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사장은 그에게 집을 하나만 더 지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작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건축가는 집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마음은 딴 데 있었습니다.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재료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재목도 엉성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집을 지으면서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많은 일들을 잘 감독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드디어 집이 모두 다 완성되자 그 회사의 사장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 열쇠가 있습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나의 선물입니다.” 건축가는 그 즉시 가장 좋은 재료들과 일급 기술자들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만약 그 집이 자기를 위한 집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자신을 위한 영적인 집을 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재료들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재료들을 써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다양한 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아무도 나를 대신 해서 지어줄 수 없는 영원의 집을 짓기 위하여 좀 더 열심히 내십시다. 
어떻게 저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그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나를 통해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지만 한 사람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 모든 섬김의 보장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최후의 승리자요 최후의 웃는 자요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귀한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가는 또 하나의 비결은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야 말로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정말 힘들어 할 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그들을 섬겨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붙들어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 한 알마저도 먹히고 마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고 했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으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했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바울 사도 역시 감옥에 갇힌 자기에게 재물을 모아 보내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풍족하게 누리는 비결은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법칙이 적용이 됩니다. 하지만 심은 만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심은 것보다 많이 거두는 것이 농작의 법칙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했고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은 흩어 구제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심으면 물질을 거둡니다. 그것도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베풀어야 될 가장 귀한 것은 생명 나눔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섬김과 나눔과 베풂도 다 이 생명을 나누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다른 것을 다 주어도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도록 하십시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 앞장 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도로시 로 놀트가 쓴 “아이들은 그들의 삶을 배운다”라는 글은 부모들이 책상 위에 놓고 살아야 할 시입니다.
“비판 속에 사는 아이는 정죄하는 법을 배우고,
적대감 속에 사는 아이는 싸우는 법을 배우고,
조롱 속에 사는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우고,
수치 속에 사는 아이는 죄책감 느끼는 법을 배우고,
인내 속에 사는 아이는 참는 법을 배우고,
격려 속에 사는 아이는 자신감을 배우고,
칭찬 속에 사는 아이는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공평 속에 사는 아이는 정의를 배우고,
안정감 속에 사는 아이는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인정 속에 사는 아이는 자신을 좋아하는 법을 배우고,
용납과 우정 속에 사는 아이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는 법을 배운다.” 

오늘 본문 말씀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도록 우리가 예배에 힘쓰고 섬기기를 힘쓰며 베풀기를 힘쓰면서 은혜를 머금고 성도를 키워나가며 생명을 나누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들의 삶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2010년 하나님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도록 이 귀한 은혜의 시간들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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