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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복 짓는 나날 (렘 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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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짓는 나날 (렘 29:4~9)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 뿌리 뽑힌 자의 삶

경인년 새해 첫 주일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새해를 맞으신 소감이 어떠신지요? 달력을 바꿔단다고 해서 시간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새로워야 시간도 새로워지게 마련입니다. 작고한 시인 신동엽은 <새해 새 아침은>이라는 시에서 ‘새해/새 아침은/산 너머에서도/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금가루 흩뿌리는/새 아침은/우리들의 대화/우리들의 눈빛 속에서/열렸다’고 노래했습니다.

새 아침을 여는 우리들의 대화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새 아침을 가져오는 우리들의 눈빛은 어떠해야 할까요? 신동엽은 새해에는 한반도 허리에 둘러쳐진 철조망과 지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노래합니다. 평화의 꿈이야말로 그가 동료들과 더불어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또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보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살아갈 궁리를 하느라고 잊어버린 삶의 신비에 눈을 떠 경탄하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새 아침은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열린다고 말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차리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에 잇대어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새 아침의 사람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우들도 이런 새 아침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삶은 고단합니다. 어느 작가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만, 먹고 살아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직장이 있는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삶은 가시밭길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집 한 칸 마련하는 일도 힘겹고, 자식들 교육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노년을 인간답게 보낼 수 있을까 염려하는 이들이 늘어갑니다. 많은 도시인들이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마치 ‘설 땅’을 잃은 사람처럼, 뿌리 뽑힌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설 자리가 없다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 또 있을까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이들, 그들은 마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것 같은 상실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 샬롬의 매개

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동족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도 설고 물도 선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포로민들은 이제나저제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살았을 겁니다. 그들의 일상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조롱하는 눈빛에 상처를 입고, 무시하는 말투에 맘 상하고, 물리적인 폭력에 시달렸을 겁니다. 만해 한용운은 뿌리 뽑힌 자의 아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일부

가진 것이 없다고, 마치 인격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당합니다. 분하지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먼 하늘만 바라볼 뿐입니다. 시인은 가진 것 없다 하여 살 가치조차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돌아설 때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루저들’(losers)의 아버지이십니다. 그 지극한 고통의 자리에서 탄식하던 포로민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5-6)

예레미야는 그 뿌리 뽑힌 백성들에게 속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의 땅에 살고 있는 나그네 신세이고, 아무데도 속한 데가 없는 ‘nowhere’의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지금 여기 now and here’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봄 되면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고, 또 때가 되면 돕는 배필을 만나 아들딸 낳으며 일상의 삶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장성하면 짝을 지워주라는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꿈 때문에 가슴만 태우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수굿이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권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보아도 치가 떨려오는 압제자들의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도 아니고, 약자의 비겁한 굴종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서 살고 있던 제사장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사람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창1:28)라며 축복하십니다. 마음에 이는 증오심과 원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자인양 기고만장하는 이들보다 더 큰 정신의 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게 이기는 길이고, 사는 길입니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그 땅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그랬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우리의 소명은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믿는 이들은 누구라도 다가와 친밀하게 머물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우정의 공간’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누군가의 ‘설 땅’ 혹은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를 힘겹게 하는 이들이 있다 해도, 그들조차 친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속지 말라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자칫하면 우리는 우리를 바른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유혹이 곳곳에 매복해 있습니다. 그런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뱀은 하와에게 다가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보다 달콤한 말이 없습니다. 마귀는 광야의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마4:9)고 말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가 없는 데도 평화를 선언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눈을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말씀은 명확합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8-9)

주님이 경계하라고 이르는 예언자들은 달콤한 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호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예언 기도를 해준다면서 헌신의 징표를 보이라고 요구하고, 성경을 가르쳐 준다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예수의 길은 걷지 않는 이들입니다. 예수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길이고,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큼 화려하고 풍족한 길이 아니라, 좁고 거칠어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주님을 바르게 믿는 길입니까?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고, 쾌적하고 널찍한 공간을 누리며 찬송을 부르는 일이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저 아픔의 땅을 찾아가는 일이겠습니까?

‘속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왜 이리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에게서 배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분투 오토ubuntu otho라는 말인데 ‘인간됨의 본질’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이를 가리켜 ‘우분투’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됨의 징표를 다른 이를 배려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데서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분투’가 있는 분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용산 참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그들의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킨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수상쩍은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들 곁에 머물던 대책위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 곁에서 함께 울고 혹서의 더위와 혹한의 추위를 견디던 신부님들, 그리고 목요일마다 예배를 드렸던 개신교 성직자들과 성도들…. 누가 그들을 그 자리에 보냈을까요?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들이 듣고 싶은 말은 ‘모든 고난의 때가 끝났다’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참 예언자는 달콤한 예언에 속지 말라면서 오히려 현실의 고단함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를 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저렇게도 신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분들이 왜 저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싶어 탄식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는 이사야의 말씀을 곱씹을 뿐입니다. 과연 지나고 나면 그 날의 고통이, 시련이 우리 삶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달콤한 말로 여러분의 영혼을 호리려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들은 정치인일 수도, 경제인일 수도, 종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올 한 해 우리 삶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런 모든 문제보다도 큰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문제들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계획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민들에게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라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복역의 때를 다 채우고 나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11)

이 말씀은 비상금처럼 포로민들의 마음에 든든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눈물겨운 일을 당해도, 오늘 조롱당하고 수치를 당해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면 시련은 더 이상 시련이 아닙니다. 이런 희망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우리 정신을 날카롭게 벼려줍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확신 위에 든든하게 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부르고, 기도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인인 루미는 큰소리로 울부짖고 흐느끼는 것이 위대한 힘의 원천이라면서, 치유의 어머니는 그 아이들에게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울음소리에도 어머니는 늘 함께 합니다. 신은 어린아이와 당신의 허기를 창조했습니다. 우세요. 울면 우유가 옵니다. 우세요! 아플 때 멍청히 있거나 침묵하지 마세요. 슬퍼하십시오! 그래서 그 우유가 당신의 몸속으로 흐르게 하십시오.”(잘랄 앗 단 알 루미, <<사막을 여행하는 물고기>>, 84)

하나님은 올 한 해 우리를 위해 멋진 계획을 세워두고 계십니다. 그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일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복이 되도록 사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꿈 하나 품고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훨훨 춤추며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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