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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변함없는 사랑 (사 6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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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사랑 (사 63:7~9)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 찬양의 이유

송년주일 아침, 변함없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종종걸음 치며 살아왔는데, 세월은 성큼성큼 걸어 우리를 한 해의 끝자락에 내려놓습니다. 한해살이의 소감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일본 화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이우환 선생은 세월의 무게를 참 절묘하게 묘사했습니다.

소년 시절, 나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늘을 향해 곧잘 돌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돌은 필사적으로 공기를 가르면서 날아가, 이윽고 땅 위로 멋지게 떨어져 내린다. 
그런데, 돌멩이와 함께 던져올린 갖가지 나의 상념들은? 무중력의 먼 행성에서처럼, 모두가 둥실둥실 날아가 버려, 그 향방조차 알 길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양 팔에, 어깨에 자꾸만 쌓이는 것이 있다. 납가루 같기도 하고 빛조각 같기도 한, 무언가 으스스한 것이, 제법 다정하게 내 언저리에 끊임없이 내려앉는 것이다. (이우환, <<시간의 여울>> 중에서 <세월> 전문)

참 절묘한 표현입니다. ‘납가루’처럼 스산하고 무겁기도 하고, ‘빛조각’처럼 가뿐하고 따뜻하기도 한 것이 자꾸만 어깨에 쌓이는 느낌, 으스스한 동시에 제법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세월. 삶에 대한 양가감정을 이렇게나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돌아보면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나날이 떠올라 후회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어떤 힘이 우리를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 온 것 같기도 합니다. 출애굽 여정에 지친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19:4)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제3이사야로 알려진 예언자는 선택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8)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라니 당황스럽습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탄식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바뀌신 것일까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이 사람의 마음”(렘17:9)임을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일러 '속이지 않는 백성'이라 하시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믿어주시는 사랑’ 곧 ‘거룩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이러한 신뢰는 고단한 인생길을 걷는 우리들의 길양식이 됩니다. 주님의 선행적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주님은 새로운 인생을 열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관정을 뚫고, 파이프를 박아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지하수를 끌어올리듯, 주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신뢰의 관정을 뚫고, 사랑의 파이프를 박아 가장 아름다운 생을 길어 올리십니다.

• 함께 아파하시는 주님

이사야는 본문을 통해 신앙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9a)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애태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를 태우시는 까닭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애태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 아닙니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의 변론을 통해 증명되거나 부정되는 분이 아닙니다. 옛사람들은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무지함을 가리켜 ‘無明’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비드야avidya’인데, 그 뜻은 눈이 어둡고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비드야에 갇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파하시는 사랑’, 그게 긍휼입니다.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어원은 ‘자궁’입니다. 생명을 품어 안고 기르는 모태로서의 자궁은 여성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남성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엄마는 자식의 고통에 특히 예민합니다. 그것은 그 두 존재가 몸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사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어머니의 사랑에 빗대 말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 가운데는 모성과 관련된 표현이 많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다’는 표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9절에 나오는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다’는 말씀은 출애굽기 32장과 33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며 아론을 다그칩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금을 녹여 송아지 상을 만들었고,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출32:4).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 참담한 광경에 절망합니다. 그가 십계명 돌 판을 깨뜨린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선언하는 과격한 행동입니다. 심각한 갈등의 시간이 지난 후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참회의 기도를 올립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32:31b-32)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역하는 그 백성을 이끌라면서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말씀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백성을 위한 이 열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이런 확약을 받고도 모세는 재차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출33:15)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한 사람, 그가 있어 하나님은 친히 그 백성과 동행하셨습니다. 

• 다투시는 주님

그러나 인간의 우매함은 끝이 없습니다. 다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곤 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그래서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너희는 목이 곧아 고집이 세고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나에게서 돌아서서 멀리 떠나고 말았다.”(렘6:23)

성경은 어쩌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의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이 곧고 고집이 세고 반역의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 다른 사람을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삶이 무겁고, 우울하고, 쓸쓸한 것은 順天의 삶을 살지 못하고, 逆天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어쩌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하는 일로 점철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배역을 책망하시고, 때로는 매를 들어 치시기도 하시지만, 그것은 징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메시지를 가려듣는 귀가 열린 사람에게 고통은 그를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이 되기도 합니다. 삶에 고통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히 사모하겠습니까? 고통은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고통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던 것들의 사소함을 혹은 허망함을 일깨워줍니다. 근심 혹은 고통의 유익에 대해서는 바울이 잘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분열되고 있고,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노심초사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 교회가 든든히 서 있음을 확인한 바울은 기쁨과 감사의 편지를 다시 보냅니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고후7:8-9)

히브리서 저자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히12:5b-6)

지난 일 년, 삶에 멀미를 느낀 분들이 계십니까? 가혹한 시련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분이 계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오지 않고, 시린 가슴에 깃든 쓸쓸함만을 길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은 묻습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삶을 해일처럼 엄습하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시련과 고통이 의미 없이 허비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성찰하라는 초대입니다. 교수신문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방기곡경(旁岐曲逕)’입니다. 샛길과 굽은 길을 뜻하는 말로 정당하고 순탄하게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거짓 신들에게 절하던 삶에서 벗어나와 야훼 하나님을 길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성찰의 기력조차 없는 이들도 세상엔 많습니다. 불의하고 가혹한 세상에서 가녀린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길 원하십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우리 어깨에 얹히는 ‘납가루’ 같은 무게가 사라질 것입니다.

• 도움을 구함

연말에 이른 지금 우리가 다시금 염원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 어머니이신 하나님’과 관계회복입니다. 이사야는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사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사63:16)

한 영성집회에 참석했던 여성이 신앙 경험을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창녀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10대부터 교회학교에 나가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체험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진학했고, 거기서 멋진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남편은 멋진 사람이었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습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부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는 강박관념적인 생각이 그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단란했던 가정의 행복에는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확인하고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간청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9개월 전 엄마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보세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과 고뇌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크게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누가 나의 아버지입니까?”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 음성이 너무 또렷해서 혹시 누가 와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너의 아버지였다.” 그 순간 그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으려던 강박적 욕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창조 이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렸습니다.(M. Robert Mulholland Jr. <>, IVP. 2006. 72ff)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일의 성과가 크면 뿌듯해 하고, 성과가 적으면 주눅이 듭니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재산이든 학력이든 명예든 자기의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갈 것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지도 않고 주눅이 들지도 않습니다. 한 일이 적어도, 가진 것이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일 년을 결산해보면 아무 한 일도 없이 허송세월한 것 같아 속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냈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이라도 당신의 알곡 창고에 거두어주십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우리가 이르는 모든 곳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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