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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삼상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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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삼상 31:1~6) 
 
   
2009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마치 2009년 벽두에 떠오른 태양이 마지막 노을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 해를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행복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자랑스럽게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일들도 있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일들도 있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면서 문득 언젠가는 내 인생 자체를 마무리하며 정리할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어떤 모습으로 인생 자체를 정리하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읽어보았던 시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언젠가 내 인생에 어김없이 노을이 찾아 든다면
마지막 노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해 저문 노을을 미소로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타들어가는 석양의 꼬리를 잡고 마지막 인생을 넉넉하게 관조할 수 있는
여유로운 이별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향기롭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
진정 환한 미소로 두 눈을 감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회한의 눈물이 아닌  
질펀하고도 끈끈한 삶의 눈시울을 붉힐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길 갈망합니다...

이 시 구절처럼 정말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려져 죽으니라” 우선 사울은 전쟁에서 대패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다음으로 사울은 이 전쟁에서 아들 셋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사울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고,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게다가 죽은 후 블레셋 군에게 발견되어 시신조차도 목이 베이고 성벽에 못 박히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의 인생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인생의 마지막이 정말 처참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사울의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은 이미 예고되어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은 전적으로 사울 자신의 책임이라는 점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이 인생을 잘못 살아왔기 때문에 비참한 인생의 마지막을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사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교만을 경계합시다.

사울의 인생의 마지막이 처참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영적으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3: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 왕이 제사장도 아니면서 직접 제사를 집례 했다는 것입니다.

왕은 백성의 수장입니다. 백성을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집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주의 종의 고유권한입니다. 지금 사울 왕이 영적으로 교만하여 주의 종의 고유권한을 침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사울은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삼상 9:2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이니까”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했던 말입니다. 정말 겸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달라졌습니다. 그가 왜 교만해졌을까요? 우리가 사울처럼 교만해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영적으로 교만해 진 것은 사무엘과 자기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자기가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로서 왕권을 굳건히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영적 지도자 사무엘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사무엘보다 못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해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 16장을 보면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도전하다가 저주를 받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고라 일당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성막 안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직무를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아론의 자손들이 맡았던 고유권한인 제사장 직무를 하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민 16:3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고라 일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과 자기들을 비교해 본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결코 자기들 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됐습니다. 그래서 도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며 살아가면 늘 영적 교만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둘째, 자기를 과대평가하시 말아야 합니다.

사울이 영적으로 교만해 지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자기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자기를 왕으로 받들게 되고, 왕으로서 나름대로 많은 업적을 쌓기 시작하면서 사울은 자기를 과대평가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이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집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아 왕이 영적으로 교만해 져서 제사장처럼 직접 성전에서 분향하려다가 나병이 걸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26:1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웃시야가 강성해 졌을 때 그 마음이 교만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인 자기가 제사장처럼 직접 분향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26:1-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하여 저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처럼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적인 업적을 쌓아갈 때는 더욱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분수를 잊어버리게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될 때 영적으로 교만하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가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많은 보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보좌는 눈에 띄게 높았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건 누구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을 보좌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환상이 깼습니다.

그 제자가 어느 날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을 듣고 제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건 바로 위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수 많은 강도, 살인자 등 온갖 악인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악하다고 말씀하십나까?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정말 나는 악한 놈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으니까 오늘날 내가 된 것일뿐이라네. 만약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 사람은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늘 겸손한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해 지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은 저 사울처럼 처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시다.

사울의 인생의 마지막이 처참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5:2-3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과 가축들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15:8-9을 보면 사울이 이렇게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고, 아말렉 가축 중 좋은 것들은 진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5:11에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 이후 사울의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삼상 16:14를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떠난 사울의 심령에 악령이 찾아와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삼상 28:7을 보면 사울이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묻기까지 합니다. 그 인생의 후반부가 이미 고달파졌습니다. 그러다 끝내 인생의 마지막이 처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못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삼상 15:13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그가 나름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서도 순종했다고 우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듣기 들어도 잘 못 듣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선 골라 듣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듣기 때문에 듣기는 들어도 잘 못 듣습니다.

다음으로 제멋대로 듣습니다. 분명히 나가라고만 했는데 나가 죽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제멋대로 들어서 잘 못 듣습니다.
그리고 건성으로 듣습니다. 분명히 귀로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들어서 잘 못 듣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상 15:15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아니다 하는 지라” 사울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에게서 노획한 가축들을 진멸하는 것이 아깝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실하고 좋은 놈들은 남겨두었다가 하나님 앞에 제사 때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 뜻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아말렉의 가축 중에서 제물로 쓸모가 있는 것들은 구지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끌고 와서 여호와께 제사드릴 때 쓰면 더 좋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자기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에 한 레스토랑이 있었습니다. 이 주방장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과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 주인은 그 때마다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는 “손님은 왕이니 절대로 싸우지 말고 손님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점잖은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감자를 튀겨서 달라는 것입니다. 감자를 튀겨서 갔다주니까 할머니는 너무 크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다시 썰어서 튀겨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는 너무 두꺼우니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흥분하다 못해 뒤로 넘어지기 직전입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은 주방장을 향하여 옆에서 계속 “순종, 순종, 순종” 외칩니다. 하는 수 없이 주방장은 감자를 종잇장같이 얇게 썰어 한 입에 쏙 들어가게 다시 튀겨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할머니는 웃으면서 감자를 맛있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가 주문한 감자튀김 먹는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할머니가 먹는 얇은 감자튀김이 하도 신기하게 생겼기에 너도나도 주문해서 그 얇은 감자튀김을 먹습니다. 그 날 이후로 이 레스토랑은 그 얇은 감자튀김을 만드는 유명한 레스토랑으로 바뀝니다. 손님이 계속 밀어 닥칩니다. 이렇게 해서 저 유명한 포테이토칩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 인생이 복될 뿐 아니라 그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인생도 저물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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