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송년] 아픔을 딛고 일어나라 (창 11:27~32)

  • 잡초 잡초
  • 514
  • 0

첨부 1


아픔을 딛고 일어나라 (창 11:27~32)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저는 바보입니다! 일이 지난 뒤에야 깨닫고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합니다. 결정하고 난 다음에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생각납니다. 힘들게 일 한 후에 더 좋은 방법이 떠오릅니다. 더욱 어리석은 것은 그런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에 상처를 받고 아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바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행여 저와 같은 분이 계십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어리석지는 않지만 힘들게 살아오는 분이 계십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으신 분이 계십니까?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섰던 아브라함을 배우십시오.

2009년을 보내고 2010년을 맞으며, 그리고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꿈꾸며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데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라’라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물을 정도로 그 이름은 널려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데라가 누구입니까?(데라가 누구인지 대라!)
   
데라는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노아의 9대 손입니다.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벨렉’ 때에 있었던 그 유명한 사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을 혼잡케 하심으로 흩어 놓으신 바벨탑의 사건으로 갈대아의 우르까지 흘러가 살게 되었습니다.

‘우르’는 현대 이라크의 한 고대 도시입니다. 이곳은 유프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자리 잡은 큰 도시였습니다. 이 지역은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한 고대 문명지였습니다. 또한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달의 신(月神) ‘난나’를 섬기는 중심지였습니다. 
   
데라의 가족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는 우상 장사였습니다. 즉 우상을 만들어서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부적을 써 주거나 나무나 쇠로 부처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상 종교에 깊이 관여된 사람입니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에 보면 데라는 거기 있을 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수24:2)

이제, 노아의 9대 손이지만 갈대아 우르까지 흘러 들어가 우상 장사를 하며 혼돈(混沌)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I. 가슴 아픈 일

데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2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7a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데라에게는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뀐 ‘아브람’을 포함하여 ‘나홀’과 ‘하란’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자녀를 셋 두었다는 것은 당시로는 그렇게 많은 자녀를 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 데라에게 이름을 거명할 수 있는 아들을 셋이나 두었다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행복을 꿈 꿀만한 것입니다.
   
1. 사람들은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가정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가 있다고 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함께 웃을 수 있고 함께 울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정녕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가족이 없어도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입니다. 슬픔의 2008년을 마치고 새롭게 2009년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작지 않은 행복이었습니다. 우리는 2009년을 시작할 때 새로운 결단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주실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데라의 가정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7절 후반절과 28절 말씀입니다.
   :27b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막내아들 하란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데라에게 ‘롯’이라는 손자가 생겼습니다. 흔히 아브라함의 조카로 알려진 ‘롯’이 바로 데라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롯이라는 이름에는 ‘감추어진 것’이란 뜻이 있습니다. 아마도 롯은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어디에서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롯의 엄마, 하란의 아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풍습으로 동생이 형들보다 앞서 결혼하는 것은 허물 거리였습니다(창29:26). 그런데 두 형이 장가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턱하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꼴을 지켜보는 아버지 데라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래서 할아버지 데라는 손자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싶다는 뜻에서 이름 ‘롯’이라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롯이란 감추고 싶은 존재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속 썩이던 아들 하란이 아버지 보다 먼저 죽습니다. 본문에서 ‘그 아비 보다 먼저’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그 아비 면전에서’ 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눈앞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데라가 바로 이런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아무리 부모의 속을 썩이던 자식이라도 눈앞에서 자식이 죽는 것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얼마나 큰 아픔이었겠습니까! 행복을 꿈꾸며 시작한 가정이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데라의 가족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2. 우리에게도 절망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잘 커 가는 줄 만 알았는데 어느 날 낙심천만하게 하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잘되어 가는 듯싶던 일들이 졸지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갑자기 당한 일에 가슴앓이를 하며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문득 깊은 한숨을 쉬게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방귀가 뀌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아무도 없어서 마음 놓고 일을 치렀는데 냄새가 이만저만 고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솔잎 냄새가 나는 스프레이가 있기에 엘리베이터 안에 ‘칙-’하고 뿌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층에서 술 취한 신사가 하나가 탔습니다. 코를 킁킁대면서 머리를 갸우뚱거리더니 하는 말, 
“참 이상하네. 누가 크리스마스트리에 똥을 싼 것 같은데!”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감추어 두고 싶고, 묻어 버리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사노라면 남들이 알까 쉬쉬하고 차라리 ‘없었던 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그렇게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이지만 감추고 싶기에 ‘롯’이라고 이름을 붙인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가슴에 한으로 남겨진 일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하나님 나라로 보내고 텅 빈 하늘을 쳐다보며 가슴 아파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네 삶에는 이런 저런 가슴 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슴 아픈 일들을 모두 한(限)으로 쌓아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II. 답답한 일

그런데 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9절입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데라는 막내아들 하란이 손자 롯을 낳아 온 후 그 두 형 아브람과 나홀을 장가들였습니다. 어쩌면 인류 최초의 합동결혼식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과 나홀 (=두 사람)이 (한번 결혼식으로=) 장가들었으니’하였으니 말입니다. 데라는 막내아들 하란의 일을 얼버무려 덮어 버리려는 듯 위로 두 형을 서둘러 한꺼번에 장가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의 아내로 들인 며느리의 이름은 ‘사래’였고, 나홀의 아내로 맞은 며느리의 이름은 ‘밀가’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람’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큰아들 아브람이 많은 귀한 손자를 안겨 주는 ‘고귀한 아비’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을 그 이름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맞은 며느리의 이름이 ‘나의 공주’란 뜻을 가진 ‘사래’였으니 이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주를 아내로 맞아 아들 딸 많이 낳아 고귀한 아비가 되는 아들을 보는 것이 그 아버지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데라는 아브람과 사래의 결혼을 통하여 그동안의 슬픔을 묻고 이제는 많은 손자들을 보고 그들을 보며 흐뭇해 할 할아버지의 꿈을 꾸었습니다. 더 이상 ‘롯’처럼 숨기고 싶은 손자가 아니라 드러내 놓고 자랑하고 싶은 손자들이 많이 태어나기를 그는 자기의 신에게 빌었을 것입니다.
   
1. 사람들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였습니다. 새해는 이전 해와 같지 않고 더욱 건강해 지고, 자녀들의 일이 술술 풀리고, 사업이 더욱 번창하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교회가 편안하여 든든히 서 가기를 기대하며 한 해를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기대할 거리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말처럼 우리는 살았기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였던 일중에는 이루어진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습니다. 데라의 기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 말씀입니다.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큰아들 아브람에게서 태어날 손자를 기다리는 데라에게 들려온 소식은 아브람의 아내 즉 데라의 큰 며느리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데라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들어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손자를 그렇게도 원하는 시아버지 데라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또한 이런 시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며느리 사래,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여인 사래의 아픔이 또한 어떠하였겠습니까? 또 이런 아내와 그런 아버지 사이에 놓인 남편이자 아들인 아브람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답답함이 오죽하였겠습니까?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이름을 가진 아브람에게 아무런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이름값도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자식을 신의 선물로 생각하여, 아이가 없다는 것은 신의 은총에서 제외된 자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신의 가장 큰 저주였습니다. 
   
더군다나 데라가 누구입니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고(수24:2) 나아가 신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 즉 열렬한 우상 숭배자였으니, 그가 섬기는 신에게서 그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답답함을 넘어서 배신감까지도 느끼게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데라의 가족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2. 우리에게도 좌절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오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기도 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고후4:8)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거듭거듭 하는 일도 있습니다. 좋은 일을 기대하였더니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하고 탄식한 일도 있습니다. 될 듯 될 듯하면서도 풀려지지 않을 일을 안타까워한 일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즐깁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겹쳐질 때 수군거립니다. 자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똑같은 일을 다른 사람이 겪으면 그런 어려움을 당할 만한 무슨 큰 잘못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억측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수군거리고 이렇쿵 저렇쿵 입방아를 찧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수군거린다는 느낌이 얼마나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까?
   
우리에게는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한 많은 답답함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쓰린 가슴만 쓸어내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III. 이루지 못한 일

그런데 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3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31a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데라는 그 동안 정든 곳 그러나 많은 슬픔이 배어 있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미지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당시의 세계에서 가나안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라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손길에 이끌리어 미지의 새로운 땅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데라는 그 손길에 의지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손가락질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곳, 일부러 감추지 않고 떳떳하게 들어 내놓고 살 수 있는 곳, 열심히 섬겼으나 자신을 저주한 신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한 출발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 사래,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들인 아브람 그리고 아비 어미 없이 자라는 손자 롯을 데리고 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데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1. 사람들은 도전도 하였습니다.
   
2009년을 시작하면서 많은 결심도 하였고, 새로운 일에 도전도 하였습니다. 새해가 좋다는 것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 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계획을 세우시고 도전하였습니까? 어떤 분은 합격이나 승진이라는 목표에 도전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건강이라는 과제에 도전하셨을 것입니다. 혹시 올 해는 술이나 담배를 끊어 보겠다고 도전해 분이 계십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에서 많은 새로운 계획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의 도전을 어떻게 되었습니까?
   
31절 후반절과 32절 말씀입니다.
   :31b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여행은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란이란 곳에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자라나고 생활하던 우르에서 2천 5백리 떨어진 하란이라는 곳까지 와서 멈추어서고 말았습니다. ‘하란’은 데라의 아들의 이름이자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아들 하란, 떳떳하지 못한 손자 롯을 남겨 두고, 아버지 앞서 먼저 가면서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그 아들, 그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하란이라는 곳에 와서는 죽은 아들이 그리웠던지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거기에 주저앉아 생을 마쳤습니다.
   
결국 데라는 데라였습니다! ‘데라’라는 이름은 ‘타라흐’ 즉 ‘미루다’, ‘지체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던 데라는 죽은 아들과 똑 같은 이름의 도시인 하란에 지체하였습니다. 더 앞으로 가기를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들 내외와 부모 없는 손자 하나를 남겨 놓고 말입니다. 이렇게 딱한 인생이 있습니까? 이렇게 한 많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삶이었습니다.
데라가 살아온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2. 우리에게도 머뭇거린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살아오면서 마치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아쉬운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를 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씀을 읽겠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전도를 하겠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충성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돌이켜 보니 머뭇거리며 망설이며 ‘이유를 위한 이유’를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다시 불길로 타오르게 하라’는 주제로 다시 한 번 이 땅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도전하다가 목구멍에만 불이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고 다른 힘에 이끌리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아쉬움이 크고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주시는 한 해에 또 도전해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더 많은 내용을 새해의 꿈으로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거기에는 남들에게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감추고 싶은 가슴 아픈 일들이 있습니다. 또는 이름값도 제대로 못하고, 생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은 많은 답답한 일들도 있습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였다가는 주저앉고, 또 시작하였다가는 멈추어 버린 걸음이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9대 손이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겪은 고통이자 또한 우리들이 살아 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2009년을 마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어디에서 희망은 찾아야 하겠습니까? 어디에서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질게도 따라 붙는 아픔을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데라는 죽었고 아브라함은 살았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데라를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보는데 있습니다. 데라의 여행은 분명히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아브라함의 여행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지난 한 해를 데라와 비슷한 삶을 살아오셨다고 해도 데라를 바라보지 말고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다시 희망의 싹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에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2009년도의 절망을 접고, 2010년도의 희망을 다시 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