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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위대한 삶의 순례(3) : 애굽 길 (마 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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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3) : 애굽 길 (마 2:13~18)

  
크리스마스의 시즌을 기쁨과 희망, 감사로 지나고 있는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이 시즌을 오히려 우울하고 슬프게, 분노하며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좋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일 년 중 가장 많은 살인사고, 자살사고, 폭력사고, 교통사고, 절도사고등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주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첫 크리스마스의 시즌에도 그랬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크리스마스에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었다는 소식은 분명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이었고 희망이었고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적어도 베들레헴 지경 밖에서 양치던 목자들, 그리고 저 멀리 동방의 박사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첫 크리스마스에 메시아 오심의 소식을 기쁨이 아닌 슬픔으로,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감사가 아닌 불만으로 받아드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본문 16절은 그가 <심히 노하고>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대대적인 살육 사건을 일으킵니다. 16절을 읽어 보실까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미리 아시고 주의 천사들을 통해 미리 경고하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십니다. 본문 13절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14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그래서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신지 얼마 안 되어 애굽 길을 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15절 말씀은 오히려 이 사건이 구약의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는 예언의 말씀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애굽(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가보면 아기 예수께서 그 부모와 함께 애굽의 피난살이를 하신 유적지가 그대로 남겨져 있습니다. 소위 올드 카이로의 한 뒷 골목에 이 <예수 피난 기념교회>가 있습니다.(그 근처에는 모세 기념 회당도 위치하고 있습니다.) 

AD303년 로마 황제 맥시밀리언 황제 때에 순교한 성자 세르기우스(St. Sergius)를 기념하여 이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현지에서는 <아부 세리기우스 교회>라고 부릅니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의 현재 건물은 10세기에서 11세기에 재건된 교회로서 아기 예수님이 피난생활을 한 동굴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애굽 체류기간은 학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들이 존재하지만 3년 반에서 7년까지 머무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전기를 제공한 크리스마스의 불행한 인물이 바로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사실 헤롯은 매우 유능한 왕이었지만 그의 유능함을 부정적으로 사용한 불행한 지도자였습니다. 헤롯의 분노와 폭력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1.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본문 16절은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라고 기록합니다. 왜 그는 자신이 속았다고 느끼고 있었을까요? 마태2:8에 보면 그가 박사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가서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헤롯의 말이 진심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진심이 아니지요. 그는 자기의 라이벌이 될지 모를 왕이 될 아기를 찾아 제거할 의도를 미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나도 그에게 경배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박사들이 그를 속인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탐욕과 시기심을 은폐한 채로 그는 겉으로만 말로만 ‘경배’와 같은 종교적인 언어를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 아기 예수를 만나 경배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렇다고 그런 경배가 진정한 경배가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경배가 감격과 은혜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헤롯 대왕처럼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는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도 말로만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로만 경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닌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실 내가 진심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은 재물이고 권력이고 내 위치가 아닌지요? 헤롯의 비극이 우리 자신의 비극이 되지 아니하려면 예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중심의 진실함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기억나십니까?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51:6)

 다윗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51:16)고. 진실함이 없는 제사, 진실성이 결여된 예배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해가 지나가기 전 우리가 할 일, 진정한 자신을 대면하는 일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오. 

2. 죄에 대한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또 하나의 비극은 그는 회개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결론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속이는 자가 회개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헤롯은 분노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인간이 분노하게 되면 두 가지 생각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첫째는 내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복수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의 파멸입니다. 선덕여왕의 비담도 그랬고 아이리스의 현준도 그랬습니다. 헤롯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의하면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표준하여 두 살 미만의 아기들을 다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왜 두 살을 표준으로 했느냐 하면 별이 나타난 때가 아기 예수님의 출생의 시간이었다면 아마 동방 박사들이 페르샤를 떠나 베들레헴까지 찾아오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 경과되었을 것이고 아기 예수님은 이때쯤은 구유에서 아마 장소를 옮겨 베들레헴의 다른 곳에서 산모와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2:11에 아기는 baby가 아닌 young child(paidion, little child)로 표기됩니다. 그래서 헤롯은 2년을 잡아야 틀림없이 그가 학살하는 아기 중에 메시아가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헤롯의 잘못된 선택으로 수많은 영아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만일 헤롯이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뉘우치고 회개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울면 수많은 베들레헴 지경의 부모들이 아기들이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 와트슨(Wat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의 창은 회개의 눈물로만 닦여진다”고. 그렇다면 최근 우리의 영혼의 창인 눈에는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눈은 눈물이 메마른 사막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헤롯이 울었더라면 수많은 베들레헴 아기들과 부모들이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히틀러가 회개의 눈물을 흘렸더라면 수많은 유대인들이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스탈린이 회개의 눈물을 흘렸더라면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북의 지도자들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흘렀더라면 수많은 북의 형제 자매들이 지금도 중국과 동남 아시아를 떠돌며 우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이 울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지도자가 울면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3. 사랑이 승리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인생의 승리가 힘에 있다고 믿은 철저하게 세속성에 길들여진 정치가였습니다. 당시의 세상의 평화 소위 ‘팍스 로마나’(Pax-Romana)도 로마의 무력에 의한 평화이었으며 그런 무력을 통한 평화의 방식을 누구보다 잘 배운 정치가가 로마에 의해 고용된 헤롯 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주님 말씀대로 이 영아 학살 사건 직후 헤롯도 파멸의 길을 걷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 마리암네와 두 아들까지 죽음에 자리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의심과 불안, 절망속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힘은 결코 인생의 해답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이러 시도한 예수님의 생애는 얼마나 달랐습니까? 

그는 외형적으로는 언제나 약자이셨습니다. 그는 헤롯의 위협앞 에 애굽 길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셨습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그는 약자이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분은 힘이 없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는 본래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와 결탁하여 자기를 잡으러 온 군사들앞에서 그리고 이를 분개하여 제자 중의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26:53입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러나 그는 그 힘을 쓰지 않으시고 체포를 당하시고 십자가로 가신 분이십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제국은 오래 전에 없어지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는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지 않으십니까? 힘이 아니라, 사랑이 승리한 것입니다. 헤롯은 이 사랑의 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힘을 사랑의 힘을 알고 있을까요? 말틴 루터 킹 목사는 노벨상을 수상받으며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 그것은 사랑이다”고 했습니다. 미국 흑인들에게 말틴 루터 킹과 함께 존경을 받는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있습니다. 그는 말콤X 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슬람 교인으로 귀화했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드려 사랑으로 흑인 민권운동을 한 말틴 루터 킹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무력을 통해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미국 흑인들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더라면 오늘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백인들의 지지를 받아 미합중국의 지도자로 취임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타오르는 분노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 분노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세상을 원망하고 복수를 꿈꾸시다가 자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남은 생을 살기로 결심하시겠습니까? 결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그는 언제나 약자처럼 사셨습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약자처럼 바보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승리자이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인류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그의 다스림, 그의 사랑의 통치를 수용하고 사는 사람들을 성경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랑과 용서, 회개와 감사로 한해를 마무리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진정한 사랑과 섬김으로 새해를 계획하며 새 길을 떠나시겠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아기 예수님처럼 상처받고 애굽으로 떠나는 일은 언제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기다리는 새해의 애굽 길-그 길을 복수와 미움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랑과 섬김을 위한 기다림으로 가시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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