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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경영자 (행 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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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경영자 (행 9:32~43) 
 
 
사울을 회심과 관련된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말씀은 성령께서 베드로를 조금씩 인도하셔서 교회가 이방 세계로 확장할 수 있도록 경영하시는 과정이 드러납니다.

사울을 비추던 카메라 앵글이 이제 베드로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베드로는 그 때에 예루살렘을 벗어나 “사방으로 두루” 다니고 있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을 심방하여 돌아보기도 하고 복음을 전하기도 했겠지요. 그러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습니다(32). 룻다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해안 도시인데, 지금은 텔아비브 국제공항이 위치한 ‘리다’(Ludd or Lod)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된 사람이었지요(33). 36절의 다비다처럼 ‘여제자’로 호칭되지는 않았지만 32절을 참고하면 그녀는 성도들 중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애니아는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던 중증 중풍환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하자 “곧” 일어났습니다(34). 점진적 회복이 아니라 즉각적 회복이었지요. 이 사건으로 인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35).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던 사건과 비슷합니다만 결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유대 당국자들에게 분노를 일으켰었지요. 이를 보면 기적 자체가 신앙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은 기적이 때때로 주님께로 돌이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기적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기적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기적을 단지 몇 가지 현상으로 축소하는 데 있습니다. 기적은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단번에 치유된 것만이 기적은 아닙니다. 침상에만 누워있던 여인이 교회의 전진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기적이지요. 그녀를 본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회복되는) 일 역시 기적입니다. 성경은 기적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기적을 보여줍니다. 다만 언제나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사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집중시키지요. 본문도 애니아가 회복된 것을 베드로의 은사 때문이라거나 애니아의 믿음 때문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 하셨음을 증언합니다.

오랫동안 중병을 앓으며 거동하기조차 힘든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 부담만 지우고 아무런 기여도 못할 것처럼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이나 경쟁력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공동체에서 일순위로 정리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영하시는 교회에서는 애니아도 복음의 진전을 위해 귀한 증인으로 쓰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가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관점이 아닙니다. 늙고 병들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영하실 때 얼마든지 귀히 쓰실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울 수 없는 연약한 분들이 교회에 있을 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을 보면서 교회를 실제적 경영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가게 되지요. 교회에 가난한 분들이 있을 때 풍요로운 성도는 과소비의 충동이 일어도 한 번쯤 더 생각하며 조심하게 됩니다. 마치 한 몸처럼 연약한 지체들을 고려하는 ‘교회아’가 자라게 되지요. 성도가 되었다면 이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도 점점 주께 돌아오는 일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지라도 세상의 관점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야겠지요. 교회는 능력 위주의 사회나 경쟁 사회가 아닙니다. 언제나 성경적인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니아의 사건은 룻다에서 북서쪽으로 20Km정도 떨어진 욥바에도 전해졌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야파(Jaffa)라고 불리는 그곳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헬라식으로 바꾸면 도르가입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는데 마침 베드로가 룻다에 머물고 있을 때에 병들어 죽었습니다. 욥바의 제자들은 그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고, 베드로에게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했지요. 그곳에 도착한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에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습니다. 그러자 다비다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에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습니다(37-42).

다비다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기 때문에 특별히 불쌍히 여겨서 살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비다는 영원한 행복에 들어갔다가 다시 힘겨운 세상살이로 돌아온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만을 위해서라면 살리지 않는 편이 더 나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목적은 일차적으로 욥바 교회의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베드로의 사역이 매우 중요할지라도 베드로가 받은 은사로는 다비다의 역할까지 대신해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욥바 교회가 든든히 자라감에 있어서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의 은사가 꼭 필요했습니다. 본문은 교회에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셔서라도 역사하심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나’를 위해 구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구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나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필요까지 연결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한다면 개인이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개인이 건강해져서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케 하려는 목적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아’를 부인하고 ‘교회아’를 가지지 않는 한 이기적 신앙생활을 넘어서기 힘듭니다. 세속적 이기심에 영적 이기심까지 더하게 되지요.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울지라도 자신과 가족의 범주 내에서만 적용하기 쉽지요. 나와 내 가족에게만 문제가 없으면 간절히 기도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다비다의 삶을 볼 때, 능력 있고 힘이 있어야만 교회를 세워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덩치가 큰 예배당을 갖추고 사회의 지도층을 영입해야만 미래를 이끌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있고 힘이 있고 세력이 있어야 뭔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세속적인 관점입니다. 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은 사람도 사용하시니까요. 여인의 역할이 대단히 제한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서 다비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했습니다. 주변의 과부를 위해서 “속옷과 겉옷”(39)을 지어주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그 작은 일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고 계십니다.

큰일에 관심두면서 주어진 작은 일에 소홀할 때 성경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성경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칭찬 하신 종도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종이었지요(눅 19:17).

거창하고 폼 나는 일에만 헌신하려 한다면 일종의 영적 한탕주의입니다. 일반 사회도 한탕주의는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님을 압니다. 한번 멋지게 주의 일을 하는 것보다, 다비다처럼 평소 주어진 작은 일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일이 성도에게 우선되어야 할 자세겠지요. 물론 예루살렘 교회처럼 일곱 명의 전담 사역자를 필요로 하는 대규모의 구제 사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6:1). 문제는 그것만 귀하게 여기고 욥바 교회의 과부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던 작은 구제를 무시하는 자세겠지요. 성경은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사역만큼이나 다비다의 구제 행위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성도는 먼저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룻다와 욥바의 사건을 기술한 다음 성경은 특이하게도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라는 설명으로 마무리 됩니다(43). 피장은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각종 제품을 만드는 제혁업자입니다. 그들은 오늘날 무스탕 디자이너 같은 명예 대신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레 11:8). 베드로가 피장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은 동족이라면 어느 누구도 차별 없이 대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에 베드로의 사고에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아직 유대인으로서의 선민의식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우월감을 벗어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지도상에서 베드로의 이동경로를 보면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베드로는 특별히 계획하지 않고 사방으로 두루 다녔습니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교회를 돕다보니 욥바의 시몬 집까지 온 것이지요. 이처럼 베드로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작은 일에 충성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더 큰 목적을 위해 그를 섬세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교회가 세계로 확장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계시가 임할 가이사랴로 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셨지요. 룻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욥바의 바닷가 시몬의 집에서 마무리된 까닭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저는 경영 능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자신이 늘 불만스러웠습니다. 그 마음속에 교회를 지도하고 경영하는 것은 목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교회를 경영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금까지도 주님께서 지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님의 뜻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준비시키시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수많은 작은 칸들에 다양한 색상들을 채우게 하셔서 큰 그림을 완성하시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현재 내게 주신 작은 칸을 성실히 채우는 순종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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