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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이 돌들이 기념이 되리라 (수 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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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들이 기념이 되리라 (수 4:1~24)
  

사람은 자기가 직접 무언가 성취하게 되거나 혹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게 될 때에는 반드시 어떤 흔적을 남겨 놓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산 정상을 정복한 사람은 반드시 기념사진을 찍기 마련이며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은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기념품을 사게 됩니다.
하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기념물은 역시 '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돈 주고 살 필요도 없이 그냥 현장에서 주워 오면 되니까 쉽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썩을 염려나 파손될 걱정 없이 오랫동안 간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했던 아폴로 11호의 우주선 비행사들도 지구로 돌아올 때에 달 표면에서 수집한 암석을 가져왔으며,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던 날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그 시멘트 조각이나 벽돌을 역사적인 기념품으로 가져갔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저편' 지역인 모압 평지를 떠나서 요단강을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드디어 가나안 본토를 밟게 된 직후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의미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요단강 도하를 기점으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역사적인 순간에 어떤 '기념물'이 없을 수는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열두 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9년의 연종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이제 곧 새해를 바라보게 된 또 하나의 분기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의미 있는 기념'을 남겨야 할지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큰 역사에 대하여 '감사의 기념'을 간직할 줄 알아야 합니다.

1절부터 9절의 말씀에 "1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 하라 4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서 

5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6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7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8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9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특별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매 지파에 한 사람씩"을 뽑아서 그 열두 대표자들로 하여금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각각 돌 한 개씩을 취하여 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라진 요단강을 통과하는 동안 내내 제사장들이 강 한가운데에서 "여호와의 궤"를 들고 서 있던 바로 그 지점의 강바닥에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요단강 도하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숙할 곳"으로 가져가서 "거기 두게" 즉 보관하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9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도 "돌 열둘을 세워" 두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역사적인 지점 위에도 일종의 '기념탑'을 세워서 나중에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도 언제든지 볼 수 있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특별한 '기념물'을 세우도록 하신 것이겠습니까?
6절은 대답하기를 "이것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으며, 이어지는 7절 하반절에서도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해 주는 표'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 '열두 돌'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요단강 도하 사건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는 '증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이 한창 불어나 있던 요단강을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간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7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상기시켜 주고 계시듯이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가능하게 되었던 일, 즉 한 마디로 말해서 순전히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기적적인 역사'로 인하여 성공하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이 요단강 도하 작전을 기억할 때마다 그처럼 놀라운 능력으로써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려야 마땅한 일이었고, 이 '열두 돌'은 바로 그것을 위한 "영영한 기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강 한가운데'에 '단체적으로 열두 돌'을 세우는 동시에 또한 매 지파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직접 '한 개씩의 기념돌'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모든 열두 지파의 백성들이 각각 기억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바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이런 멋진 '기념비'들을 얼마나 많이 세워왔습니까?
을지로에서 동자동으로, 동자동에서 여의도로, 그리고 여의도에서 이곳 등촌동으로 이전해 온 것들마다 하나하나가 다 '요단강 도하'와 같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IMF를 당한 시절에 이 강서 성전을 짓는 일은 애초에 그 누구의 눈에도 말도 안 될 일로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결국 '헌당 완결'의 기념비를 세우게 해 주셨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교육관 2천평 헌금운동' 역시 하필이면 국제적 금융위기와 국내 불경기가 최악에 이르렀을 시점과 일치하게 되었지만 이것 역시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생애 전부의 헌금'을 드리면서 '각자의 기념돌' 하나씩을 자신의 기도와 생업 속에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 대외적인 전도와 선교 활동에 있어서 이루어낸 큰 역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신학교 복교운동, 경향선교회 창립, 경향학원 인수, 경향복지재단 설립, 별들의 학교 창설 등등 경향의 역사적인 기념비들은 한 자리에서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실로 경향의 36년 역사는 사람의 계산이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일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 까닭에, 아니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역사해 주신 까닭에 이룰 수 있었던 '기적적인 성공'들로 줄 이어 왔습니다.

이것이 어디 목사만 감사하고 장로들만 기념할 일이겠습니까?
경향의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 교회의 역사를 친히 주도해 주신 것처럼 올 한 해 역시 우리의 삶을 이 구속사의 기적이 연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집'을 중심으로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각자의 심령에 '감사의 기념탑'을 꼭 간직하는 연종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명에 각자가 쓰임 받은 족적을 '영광스러운 기념'으로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절 이하 18절에 기록하기를 "10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섰고 백성은 속히 건넜으며 11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 12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건너갔으니 

13사만 명 가량이라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 14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의 생존한 날날에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같이 하였더라 15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16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17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18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고 했습니다.

그 요단강 도하 작전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궤를 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이)... 다 마치기까지 요단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즉 요단강 도하가 시작될 때에 그 강물에 제일 첫 발을 내디뎠고 그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마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3:15, 16) 요단강이 마른 땅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멘 상태로 계속 요단강 한가운데까지 나아가서 그 지점에 머물러 섰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지파별로 요단강 도하를 시작했으며 그러는 동안에 그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11절에 기록된 대로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드디어 제사장들도 제일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밟았던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의 그런 모습은 바로 백성들로 하여금 그 요단강을 건너가는 동안 혹 다시 물이 흐르게 될까 하고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치 작전상 후퇴를 할 때에 끝까지 제일 뒤에 남아서 본대의 철수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마지막 부대처럼, 그 제사장들 역시 요단강 도하 내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확신과 안심을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12절 이하에서는 그 요단강 도하에 제일 앞장섰던 세 지파들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무장하고" 즉 완전히 전투장비를 갖추고 전열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보다 앞서" 요단강을 건너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를 두고 13절 하반절은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서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 지파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선봉대이자 '총알받이'와 같은 자세로 요단강을 제일 먼저 도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세 지파들은 이미 '요단강 건너편' 지역에서 자기네들의 기업을 먼저 분배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른 것같이" 즉 앞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본토 정복전에서도 늘 앞장서기로 모세와 약속했던 그대로 이 요단강 도하에서도 선봉에 섰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역시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던 '제사장'들과 선두에 섰던 '세 지파'들이 꼭 필요합니다.
즉 교역자와 교인들이 그 맡은 직분의 위치는 다르지만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체의 공동체는 더욱 힘차게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두말할 것 없이 교회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 즉 말씀으로써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사를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행로에 평안과 힘을 더하여 주고 교회가 싸우는 전투에 승리의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하여 선포해 주시는 성경 말씀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사건건 다 교역자들이 직접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교역자들이 지도하고 기도로 후원하는 가운데 교인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들도 많습니다.
가족과 이웃을 전도하는 일, 성도들을 돕고 구제하는 일, 교회의 청지기로 봉사하고 제직으로써 헌금의 의무를 다하는 일과 같은 '일선의 전투'들은 당연히 교인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아니 교역자의 생각이 미처 이르지 못하는 것, 일일이 간섭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각 전도회장들이, 각 교육국의 부장들이 스스로 알아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이 '큰 하나님의 집'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오래 동안 신앙생활해 왔고 남다른 은혜와 축복을 받은 교인은 당연히 다른 교인들보다도 더 앞장서서 그와 같은 선봉대의 역할을 해야 마땅합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꼴불견인 교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는 신앙생활의 경륜이 있네.'하면서도 실제로는 그저 뒷짐만 지고 돌아다니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교인입니다.
그런 교인의 소위 '신앙생활 경륜'이라는 것에는 사실상 무슨 '기념비'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향교회가 지금까지 이처럼 성장하고 발전된 것은 모든 목회와 사역에 있어서 철저하게 성경중심으로만 교인들을 이끌어 가는 교역자들과 또한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선봉의 역할을 기꺼이 자원하여 감당해 낸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사람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런 봉사와 충성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영원히 빛나는 족적으로 남게 되는 것을 깨닫고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통하여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기념'을 반드시 남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서 '대대로 이어지는 기념'이 되게 해야 합니다.

19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에 "19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20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 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22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23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 도하를 완전히 마치고 가나안 본토의 입구에 해당되는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을 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요단에서 가져 온 열두 돌" 즉 매 지파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요단강 한가운데서 취하여 보관하게 했던 그 돌들을 바로 그곳에 "세우고" 또 하나의 기념탑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21절에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이라고 여호수아는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고 대답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6절과 7절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지시해 주신 말씀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요단강 도하는 적어도 그것을 직접 체험한 세대로서는 꼭 무슨 기념비가 없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게 되면 전혀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의 신세대들만 해도 자기가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일제의 압제'나 '공산당의 만행' 같은 것은 아무리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말해 주어도 그저 멀뚱하지 않습니까? 
즉 구세대에게 있어서는 기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생생한 역사'라 해도 신세대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단강 도하'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후대의 기억 속에서 금세 사라져서는 결코 아니 될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요단강 한가운데에 세워진 기념탑 외에 이곳 길갈에도 또 하나의 '열두 돌'의 기념탑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친히 베풀어 주신 사실을 그 자손들 역시 똑똑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통과한 이스라엘 세대'뿐 아니라 그들 위에 오고 올 모든 "자손"들 역시 똑같이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기념비' 역시 그 얼마나 멋있고 또한 복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역시 이와 같은 '신앙의 전통'과 '영적 유산'의 기념을 우리 자녀들에게 대대로 전수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앙과 순교자의 정신' - 비록 우리에게는 꿈속에서조차 가슴이 뜨거워지는 역사라 해도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 - 우리의 신앙 선조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신앙생활의 기본에 불과했던 이것들이 이제는 우리의 후손은 고사하고 벌써 우리 자신조차 무슨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신앙생활인 것처럼 여기는 현상이 이미 시작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런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 아들딸의 인격과 생활 속에 '기념비'처럼 반드시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살 때에 아주 인상적인 공익광고를 하나 보았습니다.
어떤 십대 초반의 예쁘고 깜찍하게 생긴 딸아이가 저녁에 친구들과 놀러 나가려 하자 아빠가 "몇 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하지?"하고 묻습니다.
딸아이와 '귀가시간 흥정'을 끝낸 후에 그 아빠는 늘 하는 말이지만 또 똑같은 주의사항을 딸에게 일깨워 줍니다.
  
"Remember? No smoking, no drinking, no kissing!"(알지? 흡연금지, 음주금지, 키스금지)라고 마치 그 아빠와 딸 사이에 이미 익숙해진 표어와 같은 주의사항을 확인시킵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그 딸아이는 거리에 나가서 또래친구들이랑 어울려 있는데 그 중에 잘 생겼으면서도 또한 좀 껄렁해 보이는 머슴애 하나가 곁에 다가와서 "You wanna cigarette?"(너 담배 한 대 피워 볼래?)하고 은근히 권합니다.
  
그러자 그 딸아이는 "No, thank you."(아니, 괜찮아.)하고 싹 잘라 거절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똑똑하고 깜찍하고 귀여웠습니다.
그런 후에 제일 마지막 자막이 화면에 뜨면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해 주십시오. 그 아이들은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녀의 신앙교육은 교역자나 주일학교 교사들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집에서 자기 아들딸들에게 직접 엄하고도 진실하게 가르치는 한 마디는 그들의 심령 속 깊이 평생을 두고 새겨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경향교회와 함께 하신 역사'를, '여러분 자신이 경향을 통하여 받은 은혜와 축복'을 꼭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기억할 것입니다.
  
혹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꼭 필요한 시간에 그들은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중심의 신앙교육 즉 '요단강 한가운데 서 있는 열두 돌'의 기념뿐 아니라 여러분 각자의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직접 '말해 주고 기억하게 만드는' 신앙교육 즉 '길갈에 세워져 있는 열두 돌'을 통하여 자신의 가정에서도 '대대로 이어지는 축복의 기념물'을 꼭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9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고 했습니다.
요단강 한가운데에 세워졌던 '열두 돌'의 기념탑은 물이 마르는 건기가 될 때마다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이 이 여호수아서가 기록된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며 물론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두 돌'은 그것을 볼 때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과거에 친히 행하신 큰 일을 기억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더욱 확실한 믿음과 용기와 힘을 얻게 해 주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갔다 온 후에 전 세계에 조금씩 나누어 주었던 '월석'은 그 달 착륙이 '비록 작은 한 걸음이었지만 전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약'이 되었음을 온 세계가 함께 상기할 수 있는 영원한 기념물로 공유되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벽돌' 역시 분단되었던 민족의 아픈 과거를 씻고 더 밝은 미래를 함께 지향해 나가고자 하는 실로 의미 깊은 기념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념하는 이유는 이처럼 그것이 미래 지향으로 이어짐으로써 정말 소중한 가치를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멋진 '기념비'는 사람이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남길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이런 '열두 돌'의 기념을 각 성도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남긴 것 없이 한 해를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아무 기념될 것이 없다면 실로 부끄러운 낭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2009년을 그렇게 보낼 수 없습니다.
올 한 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경향을 통하여 친히 행하신 역사'와 '자신이 맡은 사명을 충성되이 섬긴 족적'과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 주는 신앙교육의 유산'을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는 '열두 돌의 기념비'처럼 우뚝 세워 남기고서 새해를 더 큰 소망 가운데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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