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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반드시 이루리라 (눅 1: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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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이루리라 (눅 1:34~45)


교포들이 모여 사는 이민 사회에는 이런 말이 유행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교회를 세운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모이는 곳마다 중국집이 생기지만 한국 사람은 두세 사람만 모여도 교회가 생깁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어이가 없습니다. ‘한국인 교회는 세워지고 나면 꼭 갈라진다.’ 그것도 맞는 얘기에요. 이민사회에 한국교회가 많은 이유는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이 사는 곳에 교회가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갈라지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좋게 시작했다가도 빗나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생각 속에는 아예 그런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만 봐도 그것을 엿볼 수가 있어요.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여기까지는 정말로 좋아요. 그런데 그 다음 가사를 보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아니 누구를 사랑하면 그것처럼 행복하고 그것처럼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왜 그 사랑의 기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생각하지 왜 당신이 떠나가고 왜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왜 조금이라도 그 기쁨을 유지하고 있지 왜 곧바로 당신이 떠나가는 것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생각하고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의 가사를 봐도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리랑 고개가 어디 있는지. 그런데 그 다음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한국인 중에 발이 아픈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 노래 때문입니다. 발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왜 님이 나를 버리고 가신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같이 행복하게 살지 임이 떠나갈 것으로 생각하느냐, 사랑처럼 인생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없는데 왜 기쁜 것을 기쁜 것으로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슬픈 것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사랑의 기쁨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Plaisir D''amour. 프랑스 노래로 알고 있는데 그 가사 내용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아니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기에 사랑의 기쁨은 벌써 가고 슬픔이, 그것도 영원히 남았다는 얘기입니까. 이처럼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인생의 즐거움은 잠깐이고 그것이 슬픈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극적인 결말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더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그건 바라는 것뿐이고 실제로는 세드앤딩, 슬픈 결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삽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경험이 그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경험이 그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고 우리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많고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에 익숙하고 이별이라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마도 인간이 이별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라는 현실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죽음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임이 나를 버리고 갈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때문입니다. 사랑의 슬픔이 영원히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죽음 때문입니다. 원래 연극을 분류할 때 그것이 비극이냐 희극이냐의 기준은 주인공이 죽느냐 사느냐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햄릿이라든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든가 리어왕이라든가 이런 것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죽기 때문에. 반대로 한여름 밤의 꿈이라든가 베니스의 상인이라든가 이런 것은 주인공이 사는 것 뿐만이 아니고 결혼에 성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희극입니다. 

최근에 인기를 끈 TV드라마 아이리스가 마지막 순간에 해피엔딩에서 비극으로 결말을 수정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드라마가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은 희극으로 봐야 되느냐 비극으로 봐야 되느냐. 성경은 해피엔딩을 끝나느냐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느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많은 비극을 포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 잘됩니다. 성경은 많은 고난과 많은 시련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결말인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은 우리의 거울이 되기 위하여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욥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욥, 성경에 고난 받는 사람의 대명사가 욥입니다, 욥.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의 줄거리의 대부분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느냐에 대한 의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느냐 이것을 묻는 것이 욥의 이야기의 줄거리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욥기를 읽어봐도 이런 이유로 너에게 고난이 허락됐다는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욥의 인생이 잘 풀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을 보면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렇게 욥기가 끝납니다. 이것보다 더 해피엔딩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죽기는 죽었어요. 어차피 사람은 죽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들고 기한이 차서 죽으면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 기한이 차기 전에 죽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원래 주어진 것보다 일찍 문을 닫아버리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도 고난을 많이 받으셨지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영광을 누리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어떤 지위나 직분을 얻지 않으셨고 예수님은 어떤 조직을 만들지 않으셨고 당신의 조직의 힘을 빌어서 당신의 힘을 키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을 낳지 않았고 소유를 갖지 않았고 젊은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만 보면 예수님처럼 비극적인 인생도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고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멧을 선지자로 존경하지만 모하멧을 믿지는 않습니다. 원래 불교에서도 석가모니를 본받고 석가모니처럼 되려고 하지만 석가모니를 경배하고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를 훌륭한 철학자로 여기지만 그를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의 내용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만일 예수님이 죽으시고 그것이 끝났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전할 메시지가 없었을 것이고 아예 기독교는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은 믿을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지 못하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그 부활의 이야기가 없이는 스토리가 너무 비극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상에 전할 메시지가 생긴 것이고 기독교라는 신앙이 설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스토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그랬더니 하나님이 사흘 만에 예수님을 부활시켰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로마인들도 제사장들도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제자들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거기에서 기독교라는 놀라운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시조는 놀람 그 자체에서 시작했어요. 놀랍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할렐루야! 여기에서부터 복음이라는 것이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예수님의 스토리도 고난이 많고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국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냐. 요즘 세상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종말론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해운대라는 영화가 히트를 한 것처럼 2012년이니 아마겟돈이니 이런 인류의 미래에 엄청난 재앙, 지진, 질병 이런 것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것이 지구를 끝낼 것이다 이런 두려움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종말론은 그게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종말, 인류역사의 끝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은 믿음이 승리한다는 얘기요, 교회가 승리한다는 얘기입니다. 장차 많은 핍박과 시련이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교회가 승리하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땅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것은 두려움의 고백이 아니고 승리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판주로 오실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다시 오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얘기입니까.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것도 믿는 자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믿음이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말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생을 믿고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고 천국을 믿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과 믿음의 승리를 우리는 믿습니다. 결국은 잘 될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잘 시작했다가도 빗나갈 것이다, 기쁜 것이 기쁜 것으로 지속되지 못하고 슬픔으로 바뀌리라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좋게 시작했다가도 나쁘게 끝나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리라’ 그게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오늘 본문은 마리아에게 주시는 수태고지입니다. 천사가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게 될 것을 통보하는 사건입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지요. 당시 마리아가 한 열 다섯 살 정도의 처녀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런 소녀에게 잉태할 것을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파장이 큽니까. 그런데 천사가 37절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 말씀에 마리아가 대답하기를 38절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의 뜻은 ‘그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이 먼저 하신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그냥 아멘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고 우리가 거기에 ‘그렇게 되리이다. 내게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다. 아멘.’ 

이런 차원에서 긍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인 긍정입니다. 아멘. 반대로 불신은 절대적인 부정입니다. 지옥은 절대적인 부정의 결과입니다. 천국은 절대적인 긍정의 열매입니다. 지옥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지 않다, 나는 싫다,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런 거 없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말씀하신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45절에 마리아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자로고 성경을 보면 믿은 남자보다는 믿은 여자가 많아요. 그래서 여기에도 그냥 믿은 자에게 복이 있도다 그러면 좋을 텐데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축복하는 것은 별 거 아닙니다. 정말로 큰 축복은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을 긍정하고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축복이에요. 그래서 엘리사벳이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반드시 이루리라. 이 세상일들은 선하게 시작했다가도 나쁘게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어 표현에 Come hell or high water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옥이 오든 홍수가 오든, 다시 말하면 무슨 일이 생기든 무슨 어려움이 있든 간에 반드시 이루어진다 라는 말입니다. ‘믿은 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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