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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마음 속의 빈방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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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속의 빈방 (눅 2:1~7)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보통 인간의 탄생과 구별해서 ‘성탄’ 즉 ‘거룩한 탄생’이라 부르는 겁니다. 성탄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기적입니다. 성탄이 기적이다 보니까 성탄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하나같이 다 기적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도 기적, 처녀인 마리아가 자기 몸에 잉태를 받아들인 믿음 자체도 기적,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음을 인정한 믿음도 기적입니다. 또 동방 박사들이 멀리서 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를 만난 것도 기적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이 당연한 사실로 믿어집니다. 
  

[1] 성탄 역사의 현장 : 2천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  

오늘 본문 성경에 기록된 아기 예수의 탄생 과정을 보면, 이 역시 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2천년 전 성탄이 이뤄진 역사의 현장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겁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역사적 배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B.C. 27~A.D. 14 재위)를 가리킵니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죠. 그가 천하(로마제국 전역)에 호적령(요즘으로 말하면 인구 센서스)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효과적인 치안과 징세 등 정치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적령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4절~5절을 보세요.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지방의 산골 마을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한 지 오래 되어 거의 만삭 상태였습니다. 호적령만 없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을 떠나 먼 여행(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45km)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들은 황제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아 부득불 남쪽 유대 지방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절에서 마리아를 가리켜 ‘그 약혼자 마리아’라고 소개합니다. 그 이유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유대인은 약혼 기간 중에 철저하게 순결을 지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 기간 중에 잉태한 겁니다. 요셉이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점점 불러오는 마리아의 배를 보고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 ? 평소 정숙한 마리아가 ... ? 그들은 산골 동네에서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한 동네에 살았는데, 매일 생활하는 모습을 뻔히 보고 있는데, 외간 남자를 만날 기회도 없었는데, ...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오해를 풀어줬죠. 

마1:18 이하의 기록입니다. 천사가 고민 중인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미 안심하고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마리아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로 쳐 죽입니다. 다행히 요셉은 믿음으로 순종했고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마1:24~25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와 동거했지만 동침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니까 아직 정식 결혼한 것으로 볼 수 없고, 그래서 ‘그 약혼한 마리아’라고 기록한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만삭인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해산하게 됩니다. 6절~7절.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 ” 첫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후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 생활 중에 자식들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강보는 포대기이고, 구유는 먹이를 담아두는 여물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그것도 가장 낮은 인간보다 더 천하게 마구간의 구유에 나신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왕궁에 오시거나 호화로운 저택에 오셔도 시원치 않은데, 저택(Mansion) 대신 구유(Manger)에 오신 겁니다. 

베들레헴 마구간! 그곳이 바로 성탄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 사건은 성탄 이전 7백년 전 미가 선지가가 예언했던 바입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만약 그때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그냥 탄생했더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성경은 그냥 틀리는 겁니다. 성경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거부해도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구약 성경 보면 성탄에 관한 예언을 포함해서 350개의 예언이 나오는데, 만약 그 중에 하나라도 틀리면 성경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딱 들어맞았으니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고 놀라워요.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이 장소와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춘 겁니다. 여러분, 이런 걸 가리켜 뭐라고 부르죠? 하나님의 섭리! 아닌 말로 로마 황제와 목수 요셉이 짜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휴대폰으로 중간 중간 서로 연락해서 딱 맞추었겠습니까? 그들은 각각 자기 의지대로 행동했지만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다. 


[2] 마구간에 태어나신 이유 : 빈방 없음(No Vacancies) 

그러면 예수님이 굳이 마구간에 태어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얼마든지 좋은 데서 태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죠. 그런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낮고 천한 인생의 고통을 몸소 경험(체휼)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특별히 어떤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까? 

7절 하반절 보세요. “ ...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에 빈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요셉이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다니면서 방을 구하는데 여관마다 빈방 없다고 거절할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면 분명히 빈방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사실은 여관 주인이나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에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방을 마련해 줄 수 있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 불쌍한 여인과 태중의 아이를 위해 방을 마련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사악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앞에서 성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요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면 그들에게 왜 마음속에 빈방이 없었을까요? 그 이유를 몇 가지 살펴봅니다. 

① 욕심 :

그들은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해서 마음속에 빈방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 차 있으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무엇이 옳고 그리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관 주인이 빈방을 확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때는 최성수기였잖아요. 방값을 따불, 아니 따따블로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행색이 초라한 요셉과 마리아를 보고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욕심에 눈이 가려진 거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여유만 있었어도 성탄을 목격하는 행운을 얻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이 원숭이 사냥하는 법이 흥미롭습니다. 조롱박에 손이 겨우 들어갈 만큼 구멍을 뚫고 열매를 넣어둡니다. 그 조롱박을 원숭이가 다니는 길목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으면 원숭이가 좋아라고 손을 집어넣고 열매를 움켜쥡니다. 움켜주니 손은 아무래 애를 써도 뺄 수 없죠. 사냥꾼이 닥쳐오면 움켜쥔 손을 풀고 손을 빼내고 도망쳐야 되죠. 그런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세상 욕심으로 가득차면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다가 오셔도 안 보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영생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따르라고 말씀하자 어떻게 하죠?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의 마음속에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함으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실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② 향락 :

그들은 향락에 빠져 마음속에 빈방이 없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 몰려온 사람들은 오랜만에 친척도 만나고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세상의 향락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요셉과 마리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요셉과 마리아가 “빈방 있습니까?” 울부짖듯 소리쳐도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옛날 소돔 성이 멸망할 당시 그곳 사람들도 향락에 젖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심지어 롯의 사위들조차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창19:14 “ ...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문자 그대로 우이독경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세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밀러낸 이상한 성탄절이 되어버렸습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Christ)와 예배(Mass)라는 말의 복합어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향락에 빠져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합니다. 향락은 좋은데 예수는 싫다는 겁니다. 1년 중 거리에 나와 흥청거리는 사람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1년 중 범죄 사건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러 오신 예수님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1년 중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자살충동을 가장 많이 느낀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크리스마스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③ 분주함 : 

그들은 세상의 분주함 때문에 마음속에 빈방이 없었습니다. 여관 주인은 어쩌면 손님들을 돌보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정신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방을 달라고 간청하는 요셉과 마리아는 단지 귀찮은 존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 분주함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큰 잔치 비유(눅14:15~24)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종들을 보내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핑계를 대고 오지 않습니다. 밭을 샀으니 나가 봐야 된다, 소를 샀으니 시험해 봐야 된다,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한다, ... 우리도 바쁠 때 흔히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눈코 뜰 새 없이 ... 그러니 보이는 게 없죠. 정신없이 바쁘다 ... 정신이 없으니 마음에 여유가 없죠. 만사가 귀찮은 거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욕심을 추구하느라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세상 재미 보고 다니느라 교회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일에 분주해서 하나님에 대해, 내세에 대해, 자기 인생에 대해서조차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엄벙덤벙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큰 비극입니다! 
  

[3]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결과 : 천국의 상실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결과 어떻게 됐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어떻게 될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천국을 상실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예수님을 거부하면 후일에 그 결과가 닥칩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여관 주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눈앞에서 예수님을 거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을 겁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자입니다. 예수님이 임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장차 들어갈 내세 천국도 하나님 나라지만(미래적인 하나님 나라), 현제 이 세상에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곳도 하나님 나라입니다.(현재적인 하나님 나라)

① 마음 천국의 상실 :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는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십니다. 그리고 다스리십니다. 이게 곧 ‘마음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축복을 놓쳐버리는 겁니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축복을 상실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안에 ... 무슨 말입니까? 성도의 모임 즉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임함으로 현재적인 천국이 된다는 뜻도 있지만,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에 천국이 이뤄짐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자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 살 동안 마음속에 천국에 속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천국을 누리는 게 무엇인지 설명해준 말씀들이 여럿이죠. 

요4:13~14 “13 ...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마음속 깊은 데서 영생의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겁니다. 세상 것으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이런 축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요14:27 보면 평안을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 ” 

세상 것은 일시적인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설사 세상에 살면서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마음속에 천국이 임하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마음속에 승리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② 내세 천국의 상실 : 

우리가 이 세상 살 동안 누리는 이와 같은 축복을 놓치는 것도 큰일이지만 가장 큰일은 무엇일까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들어갈 내세 천국을 놓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전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요14:2~3,6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many rooms)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 )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except through me)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란 내세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 고할 곳이 많다고 했는데, 거할 곳을 영어 성경에 보니까 방들(rooms)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세상 살 동안 내 마음속에 빈방을 준비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면, 예수님도 내세 천국에서 내가 영원히 거처할 방을 마련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4] 아기 예수를 영접할 자리 : 내 마음 속의 빈방 

고급 호텔일수록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살 동안 미리 예약해야 됩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내 마음 속의 빈방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계3:20에 보면, 예수님이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서 ‘문’은 마음 문을 상징합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독고동락하고, 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그린 성화「세상의 빛」(1853-4)이란 성화가 있습니다. 영국인 화가 윌리엄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의 작품입니다. 문의 빗장과 못이 녹이 슬었고, 잡초가 무성합니다. 담쟁이 넝쿨마저 문을 칭칭 휘감고 있습니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어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문에 손잡이가 없죠. 어떻게 문을 열 수가 있나요? 문 안에 손잡이가 있습니다. 인간이 각자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조용히 나 자신을 살피고 내 마음속에 빈방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마음속의 빈방에 예수님을 모심으로 마음 천국이 이루시고 이 세상에서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장차 내세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세상 욕심과 향락으로, 세상 일로 분주해서 마음속에 빈방에 없는 사람들에게 “빈방 있습니까?” 이렇게 외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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