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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복 (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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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복 (롬 5:1~11)


어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설교실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졸업할 때 같은 동료학생들 앞에서, 교수들 앞에서 설교실현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같이 평가를 나누게 됩니다. 한 신학생이 설교실현을 하러 강단에 올라갔는데 강단에 올라가니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긴장해서 외운 것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료학생들과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무슨 말을 할 지 아십니까?” 다들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신학생이 말합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고 그냥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설교학 교수가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또 이 학생을 강단에 올라가라고 시켰습니다. 신학생은 할 수 없이 다시 올라갔습니다. 신학생은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무슨 말을 할 지 아십니까?”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들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을 제가 굳이 설교할 필요가 없군요.”라고 대답하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교수가 또 화가 났습니다. 

고집이 센 교수는 그 다음날 또 설교를 시켰습니다. 이 신학생이 다시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무슨 말을 할 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랬더니 웅성웅성하더니 한 쪽에서는 안다고 대답하고 한 쪽에서는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분이 모르는 분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냥 내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참 들을 때는 그런 것 같은데, 전하려고 하니까 생각처럼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석에서 어느 집사님에게 “혹시 집사님! 복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면 말문이 막힙니다. 어렴풋이 알긴 아는데 어떻게 정리해서 설명해야 할 지 고민인 것입니다. 세례문답을 하기 위해서 목사님이 며칠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탄절을 앞두고 세례문답을 하는데 한 할머니 성도님이 문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죠? 그 예수님이 누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아십니까?” 할머니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런 답을 했습니다. “네,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 적용한다는데 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도 올바른 복음의 적용은 아니라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로마서는 계속 강조해서 복음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그처럼 중요한 책입니다. 교우들에게 “당신이 만약 몇 년 동안 무인도에 가서 생활한다면 66권의 성경 중에 어떤 성경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99%가 로마서를 가지고 가겠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로마서가 그들의 생애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에서 죽더라도 그는 천국에 갈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로마서를 가장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우리가 계속 반복하고 있는 이 복음의 진리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일학교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좀 유치한 방법으로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유치할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법입니다.

여러분! 먼저 이 첫 번째 색지를 보여 드립니다. 검은색입니다. 검은색은 죄를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악 가운데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범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식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잘 사는 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나 죄악에 빠져 있습니다. 이 죄의 문제가 우리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누가 이 죄를 씻어 버릴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의 죄는 하이타이로도 안 됩니다. 고성능 세제로 씻어도 안 됩니다. 이 죄를 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가 씻음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피가 아니면,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우리 죄는 씻음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피가 아니면 우리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5장 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은 우리 죄를 하나님은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저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모든 죄는 다 이미 기억치도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 모든 죄가 씻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렇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하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소서.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우리가 너무나 잘 부르는 찬양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268장 찬양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로 인해서 고통 받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이후에 주님께서는 이제 놀라운 선언을 주십니다. 바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 죄가 다 씻음 받았고 네가 깨끗한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정결하게 되었다. 네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눈이 오면 모든 더러운 세상의 오염을 다 덮는 것처럼 바로 예수님의 의의 세마포로 저와 여러분의 더럽고 추악한 불법의 죄들을 다 덮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결하다고, 너희가 나의 자녀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로마서 5장 1절에 보니 “우리가 의롭다하심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죄가 다 씻음 받고 우리 죄가 용서받은 이후에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 죄를 다 사했다. 너는 의롭다 인정한다. 너는 거룩한 인생이 되었다.”라고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 이제 교제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의 특권이고 구원받은 자의 특권인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축복이 따라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 본문 5장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관계입니다. 언제 만나도 서로 얼굴을 돌리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화평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 보니 원수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화목의 관계 속에서 오는 것입니다. 화해한 사람만이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설명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가정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는데 아들이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때 아버지가 “야 네가 자꾸 그러면 너하고 말 안한다.” 그리고 한 이틀 동안 말을 안 했습니다. 부자간에 말을 안 했습니다. 가정에 웃음이 없습니다. 미소가 없습니다.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시베리아 벌판 같습니다. 원수 된 관계입니다. 평화가 깨어진 관계입니다.

부부관계를 보십시오. 이런 저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지고 서로 이야기 하다가 마음이 상했습니다. 부부가 그 날 밤은 각방을 하고 잡니다. 서로 말도 안 합니다. 눈도 맞추지 않습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러다가 부부가 화해했을 때 서로 손을 잡고 “여보! 내가 잘 못 했어.” “아니야, 내가 잘 못 했어.” 서로 화해했을 때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밥 한 끼를 먹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게 바로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인해 단절되었지만 이제 우리는 화해의 관계, 화평의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화평을 누릴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돈 리처드슨’이라는 분이 쓴 <화해의 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아주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돈 리처드슨’이 아프리카 밀림 지역에 복음을 증거하러 갔습니다. 사위부족이라는 부족이 사는 지역에 갔는데 이들은 식인종들이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고 거짓말을 잘하고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그들이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어느 날 아침은 가방을 싸 가지고 그 동네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을이 시끄럽습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사위 부족 가까이에 있는 해남 부족이라고 있는데 그 해남 부족과 사위 부족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치를 판입니다. 하지만 해남 부족은 워낙 강력합니다. 싸워봐야 질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화해의 의식을 채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의식이 아주 놀라운 방법을 사용합니다.

사위 부족 추장의 6개월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을 해남 부족 추장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해남 부족 추장의 아들로 바칩니다. 그 바치는 의식을 통해서 화해가 성립되어집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피스 차이들, 화해의 아이’라고 부릅니다. 두 부족이 화해를 위해서 사위 부족 추장의 아들이 해남 부족 추장의 아들로 입양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의 아이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선교사님이 마음에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독생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위 부족을 향해서 이제 그는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얼마 만큼 사랑 하냐면 화해의 아이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화해를 위해서 화해의 아이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렇게 설교했더니 그제야 사위 부족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해남 부족과의 싸움 속에서 추장의 아들을 그들에게 내어줌으로써 화해가 성립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화해의 아이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성립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렵게 얻은 화평을 깨트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가 불순종할 때 화평이 다시 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 화평한 관계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구원받는 자들의 두 번째 복은 은혜에 들어갈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은혜의 자리는 무엇일까요? 쉬운 예를 들면 성전에 가면 유대인 여자의 뜰이 있고, 유대인 남자의 뜰이 있고, 더 깊은 곳에 가면 레위인의 뜰이 있고, 더 깊은 곳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은 곳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이 지성소 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예루살렘의 지성소와 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은혜의 지성소 앞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우리는 주님과 친밀한 교재를 나누고 주님 앞에 기도함으로 기도의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자들은 기도응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구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응답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보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분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더 아끼겠습니까? 여러분이 구하는 대로 응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3000시간 기도운동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담대히 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성소 깊은 곳 은혜의 자리에 들어갈 때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것이 있겠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특권을 세 번째로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주님 앞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영광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감싸이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천국을 동경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우리 죄가 용서받았기에 천국의 들어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하나님의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삶은 그리 오래 가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때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서 시련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 3절에 보니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고, 고통이 있고, 질병이 있습니다. 실패도 있고, 부도도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우리를 축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냐면 환난은 인내는,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주는 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 잘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에 더 확실한 소망을 붙들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고 연단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 오히려 더 기쁘게 여기라. 그로인해 너희 인격이 성숙될 줄을 알기 때문이다.” 여러분! 좋은 쇠를 만들려면 뜨거운 용광로 속에 더 많이 넣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유학생활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철공소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공정이 시끄러운지 공장 주변 30분 이내에는 민가도 없답니다. 그곳에서 만드는 것은 기차의 바퀴였습니다. 기차가 그 무거운 짐을 싣고 몇 십 년을 달려야 하는데 그 기차 바퀴가 쇠뭉치입니다. 굉장히 강도가 높아야 합니다. 

용광로에서 녹여서 그것이 식으면 다시 그것을 때리는 데 40톤짜리 해머가 있어서 그것이 때린다는 것입니다. 쇠가 쇠를 때립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는 성경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이 깨지면 다시 녹여서 다시 식히고 다시 때리고, 금이 가면 다시 녹이고 때리는 작업을 수십 번 반복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강철 중에 강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깨지지도 않고 기차바퀴로 써도 견고할 정도가 된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환난을 주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수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같은 것의 열매를 잘 맺으려면 가지치기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가치를 치면 아픕니다. 그러나 가지를 침으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연단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줄 알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울함이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즐거워야 합니다. 환란을 받아도 즐겁습니다. 구원을 생각하면 즐겁고, 천국 갈 일을 생각하면 즐겁고 모두가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기쁨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네 번째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내 손으로 만지는 것같이 우리 마음속에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불행합니까? 행복합니까? 행복합니다. 누가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너무 행복합니다. ‘내 아내가 나를 이렇게 사랑했다니’, ‘우리 자녀가 나를 이렇게 사랑했다니’, ‘아니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다니’, ‘내색은 안 하셨지만 어머님이 쓰신 편지를 보니 날 이렇게 사랑하셨어.’ 그 사실을 알고 너무 마음이 뿌듯합니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가난해도,  헐벗어도 춥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물 붓듯이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는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으려야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벅찹니다. 너무 좋은 것입니다.

어제 눈이 오는데 우리 장로님들, 교역자들과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눈이 오니 더 신났습니다. 좀 손이 시리긴 해도 어떤 교인들은 가다가 수고한다고 호떡도 사다주고, 어떤 분들은 커피도 빼다주더라구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이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추위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가 생각해 봅시다. 본문 6절에서 8절까지를 읽어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세 구절이 계속 주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가 앞가림을 못할 때를 말합니다. 연약해서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범죄하고 연약할 때입니다.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화해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값진 생명과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래서 감동받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일주일씩 달려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주일을 달려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산 사람을 죽이려고 일주일을 달려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참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종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나는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는데요.” “네가 내 백성을 핍박함은 곧 나를 핍박함이니라.”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성도들을 의미하고 성도의 몸은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네가 나를 핍박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핍박하는 원수된 그를 오히려 사도로 삼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원수된 자기를 사랑하는 제자로 삼아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사랑에 사도바울은 녹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핍박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도바울이 마음 깊이 깨달은 까닭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소방대원들이 종종 희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이 나와서 다들 빠져나왔는데 어린아이가 그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소방대원 한 분이 그 위험을 뚫고 들어갔다가 어린아이는 구출하고 자신은 결국 화상을 입어 죽었다고 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 깨끗하고 정말 피어나야 할 어린 생명을 위해서 그 소방관은 장렬하게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곳이 감옥이라면, 감옥에 불이 났는데 독방에 아주 나쁜 성추행 범이 있습니다. 열 살짜리 어린 아이를 추행해서 상처를 입힌 추행범이 있습니다. 사기꾼과 도둑놈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뛰어들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의 죽음을 값지다고 말하겠습니까? 강간범 같은 우리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불 속에 뛰어드시는 것입니다. 나를 구해내시고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나 같은 죄인, 강간범 같은 악질범 같은 나를 위해서 주님은 그 사랑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깨달을 때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놀랍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사랑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길을 지나가다 보니까 십자가 그림이 붙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십자가 그림 밑에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 

거기엔 이런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만큼, 주님은 손을 벌리고 이만큼 내가 너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내가 죽을 자리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이만큼,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여러분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고 오늘도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감격의 삶을 살아가시고 또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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