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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 목자들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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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 목자들 (눅 2:8~20)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의 중반을 맞고 있습니다. 누구나 결산을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누구나 다 이런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멋진 한 해를 결산할 수 있을까는 뭐, 여기 모인 모두의 한결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여러분, 한 해의 결산은 한 해의 청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새해의 바람직한 설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멋진 송년회를 계획할 수도 있고, 잠시 한 해 결산 여행이나 조용한 곳을 찾는 시간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사는 지혜를 갖는다는 것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두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사도요한은 요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좀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좇아오신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목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 8절에 보십시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누가 나옵니까?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당시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도 아니요 구별된 사람들이라 자처하며 경건을 쫓아 살았던 바리새인도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멸시당하고 소외받던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나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라든지 산지 또는 벌판에서 양이나 치면서 야영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진행되는 각종 예배모임에는 참석조차 할 수 없었고 심지어 법정에서 증 인 노릇할 권리 마져 박탈당할 만큼 사람들은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시하고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이 메시야의 탄생에 누가 초대를 받았습니까? 당시 그 나라를 통치하던 정치적 실세인 헤롯입니까? 아니면 영적 지도자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사를 통해 영향력을 끼쳤던 대제사장입니까? 아니면 평생 성경에만 파묻혀 살았던 서기관들입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상식에 커다랗게 빗나간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외로 당신의 그 영광을 당신의 그 탄생의 거룩한 신비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밤의 양떼들을 밤새 지켜주는 것을 업으로 삼던 목자들, 제 이름 석자 하나 제제대로 쓰지 못하는 무식자들이고,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도 바깥마당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와야 할 목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천사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던 이 목자들에게 한 가지 소식을 들려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 엄청난 소식을 세상에 전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그러면 그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예수입니다. 마1:21절을 보면 그 구주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신 속죄양이었습니다. 죄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가 받아야 할 그 죄의 값을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은혜입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이라는 시를 아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소녀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생을 살면서 이런 기쁜 소식을 들을 때 목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15-16절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빨리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들은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양을 지키며 치는 천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실 목자들은 피곤합니다. 한밤중입니다. 양들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위험합니다. 맹수들은 목자들이 졸거나 한눈팔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맹수들에게 양들이 밥이 될는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움직인다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들이 하던 중요한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던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에게 찾아가 경배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서’라는 단어는 원어 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입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한 밤중에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 노력 끝에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탄생하신 예수를 맞는 저들의 모습을 보세요. 세상은 다 고요하죠, 별들만 반짝이는 그 깊은 밤에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이 구유에서 초라한 목동들이 이 광경을 보고 이들이 한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목자들이 한 행동 앞에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사가 전해준 소식 앞에 그들은 일어섰고, 또 빨리 갔고, 그 현장을 보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에게 다가온 이 성탄을 이런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은 주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드릴 때, 얻어지는 축복이 엄청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목동들이 네비게이션도 없는데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 구유를 찾는 모습을 보고 제가 젊은 시절 광산에서 작업하던 것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좋은 보석을 찾는 것은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닙니다. 

첫째, 땅을 파헤쳐야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표면에 보물이 있으면, 누구나 취할 수 있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 머리 잘 도는 사람이 먼저 취하게 될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느끼는 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눈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세상 사람에 비해 느립니다. 뒷북의 천재들입니다. 항상 아차하면서 한숨을 쉽니다. 세상과의 경쟁해서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표면에 있는 보물은 믿는 자가 먼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 속에 숨겨 두신 것입니다. 왜? 성도에게는 ‘파헤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다림, 인내, 묵상, 그리고 순종의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삽’이 있습니다. 기도의 삽으로 땅 속의 보화, 흑암의 보물을 파내라. 그래야 내 것이 됩니다. 

둘째, 원석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힘들여 파낸 원석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단순한 흙덩이같이 보입니다. 원석은 세공이 필요합니다. 숙련된 사람들이 세공하면, 거기서 가치가 나옵니다. 좋은 보석이 되려면 원석이 좋아야 합니다. 동시에 누가 세공을 했는가에 따라 가치는 달라집니다. 최고의 보석 업체 티파니 같은 곳에서 세공한 것은 다른 곳에서 세공한 보석보다 빛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갖고 싶어 하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세공하고 기회를 세공하면 멋진 것이 될 수 있습니다. 5년 전 비디오를 분석한 사람들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실력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나타납니다. 왜? 김연아는 특출한 세공이 있었고, 아사다 마오는 세공이 부족했습니다. 김연아의 표정연기, 거의 압권 아닙니까? 눈빛연기는 바로 은사의 차이라기보다는 세공의 차이입니다. 세공하라. 가치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큰 압력이 보석을 만듭니다. 돌들은 흑암 속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고 그래요. 그것이 보석이 되는 요소입니다. 다이아몬드가 대표적인 예가 아닙니까? 다이아몬드는 원래 탄소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큰 압력을 받으니 다이아몬드가 된 것입니다. 엄청난 압력이 최고의 강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압력이 없으면 숯덩이가 됩니다. 압력이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절망의 압박 속에서 눌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내 속에서 아름다움 보석이 생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눌림이 한 단계 높은 신앙과 인격을 만들어 냅니다. 

자, 20절을 보세요.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 가니라” 바로 찬양입니다. 그들은 동방박사처럼 준비한 예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세상이 자기를 무시하고 멸시해도, 이 구유에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인생을 죄에서부터 건져내실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천사들이 전하여 준 소식을 듣고 빨리 베들레헴으로 달려갔고 이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 이 사랑 앞에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은 원로 목사님으로 계시지만, 제자 훈련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옥한흠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뭐, 여러분도 한 번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양을 통해서 그 사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까지 했습니다. "찬양을 드릴 때, 아무 감정 없이 입으로만 찬양을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든지, 신앙이 병들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진단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입술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찬양이 나옵니까? 아니면 원망이 나옵니까? 입만 열면 주님을 송축합니까? 아니면 입만 열면 돈을 송축합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입술에서 찬양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번 성탄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정말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이번 성탄에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일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은 세계에서 10대 교역량을 자랑하고 있고, 15번째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요즘 메이드 인 코리아 하면 10년 전만 해도 싸구려라고 생각했어요. 중국에 가니까 삼성 애니콜을 갖는 게 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60년 전만해도 전쟁의 폐허화 속에 희망을 찾아 볼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원조를 받아야 살 수 있는 나라였는데 이젠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이젠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서 그 일을 실천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곳도 절망이 서려 있는 현장이었지만, 그곳을 희망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 교회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한파 때문에 이 추위와 함께 떨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가난을 벗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렵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 있어요. 남이야 죽든 산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남이야 어떻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이 영광스러운 현장을 가장 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신 섬김과 나눔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사랑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풀 수 있는 뜻 깊은 성탄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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