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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누지 못할지라 (막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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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지 못할지라 (막 10:1~12)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을 청춘 남녀의 사랑에 국한하지 않고 부부애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을 듯싶습니다. 원앙새 같은 부부라고 하면 항상 얼굴을 마주보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 금슬 좋은 부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어서 한 마음으로 한 목표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부부야말로 이상적인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은 한 발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호흡을 맞춘다면 부부 사이의 문제는 해소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혼은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혼을 합의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결혼기간 서로 사랑했고 보람도, 행복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녀가 11명 있었습니다. 서로 자녀를 더 많이 데리고 살고 싶어 했습니다. 양보가 없었습니다. 공평하게 하자며 11명을 절반씩 나누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명이 남았습니다. 한 명을 놓고 옥신각신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랍비가 명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 하나를 더 낳으라. 그런 다음 각각 6명의 아이를 나눠 가져라.” 
부부는 랍비의 말을 따랐고 부인은 임신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니까? 쌍둥이를 나은 것입니다. 자녀 수가 도로 홀수가 된 것입니다. 
부부는 먼저 새 생명을 둘이나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끝까지 잘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지으셨는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시고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가정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 하와를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듯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만남을 허락하시고 가정을 꾸리도록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가정의 시작이 사랑의 고백으로부터 또한 시작되고 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지으신 여자를 보고서 처음 한 말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는 고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고백으로 시작해서 서로 돕는 배필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 나가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가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하듯이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요 그래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도구로서 말을 사람에게 허락하셨고 말의 권세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아담이 처음 하와를 보았을 때 했던 사랑의 고백은 가정이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한 집이 되도록 만들었던 것이요 하나님 역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고 하셨고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정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함께 짝 지어진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의 고백을 통해 교제하며 아무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곳이요 바로 그런 가정을 또한 하나님께서 복되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러기에 부부 서로는 서로를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데도 우리는 무심결에 믿음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당신 하나는 잘 만났어” 하는 말은 언뜻 좋은 말 같으나 이는 자기는 하나님이 잘 만나게 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은 잘못 만나게 하실 경우도 있다는 뜻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왕이면 “당신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짝 지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는 잘못이란 있을 수 없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가정으로 하여금 최고의 장소요 가장 행복하고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당신 하나는 정말 잘 골랐지” 해서 이는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주려는 뜻이 있기는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교만을 떠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내가 눈이 뼜지 어떻게 당신과 같은 사람을 좋다고 했는지 몰라” 라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어리석은 말이요 또한 가장 사랑하고 함께 행복을 이루어 나갈 돕는 배필로 하여금 큰 좌절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어리석은 말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허락하신 가정이 마치 불구덩이처럼 되고 만 것입니까? 

그것은 곧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다음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고백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당신이 곧 나라고 했던 고백이 이제는 그 여자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함께 있으면 촌수가 없지만 등지면 남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엇이 이들로 이토록 등지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너는 남편을 다스리길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해서 가정의 주도권 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도권이 바로 서지 못하게 될 때 다시 말해서 가정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지게 되면 결국 이런 저런 핑계를 들어 서로 갈라서게 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닌 것이 이혼을 너무 쉽게 생각들 하고 또 너무 쉽게 이혼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여기 예수님은 그 어떤 가능성도 이야기를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따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한 마디 더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잘못 저런 잘못 때문에 또는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때문이라고 이혼에 대한 이유를 대고 또 옆에서 차라리 이혼하라고 부추기기도 하지만 해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불복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멸망할망정 갈라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면 갈라설 수가 있는 것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왜요? 어떻게 멸망을 선택할 수가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갈라선다면 그 둘은 지옥에서도 영원토록 마주보고 있게 될 텐데 그렇다면 이거야 뭐하자는 겁니까? 그러니까 주요한 것은 신뢰의 회복, 믿음의 회복 다시금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는데 그 책망이 곧 오늘 우리들을 향한 책망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누구는 된다고 하는데 뭐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건 내가 앞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실 때 돕는 배필이 되도록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돕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부터인가 내가 먼저 도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어떻게 도울까는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나도 힘들고 나도 피곤하고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여보 마침 당신 잘 왔다고 이것 좀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나만 보면 그러냐고 나는 힘들지 않느냐고 하면 그럼 나는 하루 종일 놀고 지냈냐고 합니다. 이거 바꿔야 합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온 종일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쉬세요.” “아니야 당신도 힘들 텐데 무얼 도와줄까?” 이런 식으로 간다면 무어 다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같이 나 힘든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 큰 맘 먹고 도와달라고 하면 짜증내고 그러니 도와달라고 했던 사람이나 나도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짜증나고 이게 악순환이 아니겠습니까? 기억하세요. 우리 서로는 돕는 배필로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우리의 행복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돕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도 부부가 서로 돕고 가족이 서로 도울 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사회에서도 사로 도울 때 거기에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면 누구는 도와주겠다면 또 펄쩍 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돕는 것도 요령이 필요합니다. 어찌 됐든 우리가 명심할 것은 가정의 행복 누가 주는 것 아닙니다. 내가 행복지킴이 행복 도우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돕는 배필로서의 신뢰입니다. 믿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어떤 조건을 따지지 마십시오. 이런 저런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는 것이요 신뢰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의 책임이 언제든 나에게 있다는 마음으로 행복 지킴이 행복 도우미 행복 나눔이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품을 떠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우리를 신부로 그렇게 비유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신랑이시라면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실 때 우리에게 신부될만한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온갖 추악함으로 가득한 우리였습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서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죄 없다 하시고는 우리에게 혼인 잔치자리에 참석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복까지도 주님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나는 부르심을 따라 부름에 합당하게 예복을 입고 잔치 자리에 참석했을 따름입니다. 그 예복이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갖추어서 주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랑은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밖에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곁을 떠난다고요? 그럴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투정은 부릴 수 있겠죠? 나름대로 불만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주님께 섭섭한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된 다른 이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있을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험하고 힘들어서 투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주님도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우리의 상한 마음도 다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울어주시고 웃어주십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아파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의 보좌를 놓아두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가난한 집안 가장 촌구석으로 오셨고 어려서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쩌면 소년 가장의 역할을 감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공생애에 나서서도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누구처럼 대접받고 호화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로부터 시험을 당하시고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본문의 상황만하더라도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전례대로 가르치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늘 시험을 당하시고 핍박을 당하고 배척당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그 험한 고난도 다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우리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무엇 때문에 실패하고 넘어지는지 무엇 때문에 좌절하는지 잘 아십니다. 그래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만입니다. 다 아시면서 왜 이대로 두십니까? 아니 냄새피운 사람이 오히려 성질부린다고 꼭 그런 꼴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를 주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까?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행복해 하는 그 모습을 주님 역시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내가 부족한 것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내가 문제 많은 것 주님도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내가 얼마나 몹쓸 사람인지 주님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버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어떤 경우로도 주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품을 떠나면 남는 것은 죽음 그리고 멸망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누구는 그런 말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고요. 그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면 더 지켜주는 것입니다. 더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조건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더 손울 내밀어주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몹쓸 사람이라고만 탄식하지 마시고 이제 주님의 손길에 나를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나를 깨끗이 씻겨 주시고 새 옷을 입히시며 상속자의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하늘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나 또한 나 같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서슴없이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며 항상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주님과 더불어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행복 지킴이 행복 나눔이 행복 베품이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권면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여기 왜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라는 것일까요? 아내는 뼈로 이루어졌습니다. 뼈는 겉이 살이 붙고 가죽이 붙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결코 뼈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뼈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 부러뜨려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흙으로 지어진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뼈도 온전히 살도 온전히 그럴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돕는 배필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온전케 만들어가는 비결은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신뢰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문제를 들추지 마세요. 덮어 주시고 감싸 주세요. 봄이면 들판에 쾌쾌한 냄새가 풍길 때가 있습니다. 우분이나 계분을 뿌리면 온 들판에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런데 그 위에 흙을 덮어주고 잘 감싸주면 그것이 좋은 비료가 되어 나무가 자라고 이윽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냄새 난다고 다 파헤쳐버리면 더욱 냄새 진동에 나무는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과 신뢰로 함께 할 때만 온전한 행복을 열매 맺을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고 바로 믿음 안에 사랑을 나누는 그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어 참된 행복을 우리들에게 열매 맺게 하심을 기억하여 오직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과 함께 하며 이웃과 함께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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