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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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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 (빌 1:3~11)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곳곳에서 의사가 찾아왔지만 아무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세는 악화되어 모든 희망이 사라져 가던 어느 날 곳곳을 떠돌던 한수도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셔츠를 등에 걸쳐주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갑니다. 가족들은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남자와 그의 셔츠를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완전하게 행복한 남자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반드시 그런 사람을 찾아서 아버지를 살리겠다고 결심하고 사막 길을 헤매다가 밤이 되어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장소를 찾던 중에 동굴하나를 발견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동굴 안에서 한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난 정말 행복해! 정말 멋진 하루였어! 자, 오늘도 푹 자볼까!”이 아들은 이 소리에 목적을 이룬 것 같아서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동굴로 들어가서 그 남자의 셔츠를 벗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남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는 남자에게 아들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행복한 남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만약에 나에게 셔츠가 있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는 이렇게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행복의 원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생각하는 대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행복의 첫 걸음입니다. 행복은 가짐으로 누리는 것보다 버림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이 훨씬 크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의 이론으로만 정석으로만 알 뿐이지 정말 실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것이 늘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매여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적은 문제에 매여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걱정해야 될 일은 생각조차 못하면서 걱정하나 마나한 것에 대해서 늘 고민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모르고 있는 내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최선이 있고 차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최선으로 여기고 무엇을 차선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삶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결혼은 최선이 아니고 차선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만난 사람이 내 인생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단 결혼을 하셨으면 물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의 사람에 만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자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연 인생의 운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결혼이냐는 겁니다. 결코 독신주의를 부르짖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결혼이란 삶의 방법일 뿐이지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결혼을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혼은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그의 생이 끝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결혼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라는 말은 만약에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최선이 될 수 있지만 더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방법이라면 차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말입니다. 

하여간 최선이든 차선이든 이제 이 선(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곧 선이요, 때로는 참는 것이 선이라고 합니다. 혹은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해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주는 것도 선이라고 하겠습니까? 무능하게 망해가는 것을 보고도 참는 것이 선이라고 하여 보고만 있다면 그걸 선이라고 해야 됩니까? 가만히 지켜봤더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간이하의 모습으로 점점 빠져 가는데 보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선입니까? 더군다나 최선은 아니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선입니까? 

선에는 보통<목적적인 선>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목적이 옳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이 저절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목적이 있다고 합시다. 이건 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안 받아준다고 살인을 했습니다. 이것이 선이 될 수 있는 겁니까? 목적만 선하다고 다 선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의 선은<결과적인 선>이 있습니다. 뚜렷한 목적이나 방법이 있어서 시작한 게 아닙니다. 잘못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았습니다만 그 결과가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하도 싸워서 그 가정환경이 싫어서 아들이 견디다 못해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가서 정말 성실하게 살아 성공을 했고 금의환향을 하여 부모님 앞에 아주 좋은 아들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들이 집에 붙어있을 수 없을 만큼 잘못된 이 부모님의 행동이 이제 정당화될 수 있는 겁니까? 말하자면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 결과적인 선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선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소위<방법적인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우리는 이것을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이 말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최선만 가지고 다 통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가진 지혜대로, 내 마음, 내 방법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 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믿어 달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나에게는 최선이지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겨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만인이 원하지도 않고 또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닌데 자기 혼자만 최선을 다한다고 땀을 흘리면서 선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발하지 말았으면 하는데도 자기는 최선을 다하는 선이라고 생각하면서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적 선이 없는 주관적인 선에 매여서 이럽니다. 무조건 나 나름으로 다했고, 내가 할 일 다 했고,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것으로 통하는 게 아닙니다. 객관적 의미에서 선의 기준이 따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객관성을 잃어버린 주관적 선에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릭 프롬]이 말하기를“사람에게는 생존욕구가 있고, 초 생존욕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존욕구라고 하는 것은 동물에게도 있는 욕구입니다. 먹어야 되는 본능, 입어야 되는 본능, 자야 되는 본능, 그리고 생식적인 본능 등은 동물적 본능에 의한 생존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적인 이 생존욕구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초 생존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생존욕구를 초월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적인 것이요, 성취적인 것이요, 성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소 예술적이요 심리학 적이며 진선미를 추구하는 욕구가 채워지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아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선이 객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생각하고 자신이 정해놓은 것이 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더구나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심리적 욕구를 생각했을 때 누구도 선을 완성할 수 없다는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맙니다. 이것이 고민입니다. 

그런고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고선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선한 것 중에서 선한 것은 하나님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게 향한 하나님의 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으면서 성도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삼년 동안 재판도 받지 않고 억울하게 감옥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빌립보 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도대체 하나님의 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복음전도자가 저렇게 감옥에 갇혀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선이 있단 말인가?’하면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도들 모두가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 더욱 열심히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들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바울은 조금씩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을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확신하기를 6절처럼 확신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자기가 감옥에 있다는 것이 더욱 전도자들에게는 자극이 되어서 복음이 전파되고, 친위대 속에 복음이 전파되고, 로마의 고관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오늘본문 바로 뒤에 12절을 보면“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의 고난이 낭비가 아니었음을 생각합니다. 깨달음이 오자 그는 성도들에게도“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압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다방면에서 유식하고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간의 지식 대부분은 지적 지식입니다. 정보라는 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들인데 현대인들에게 이런 지식은 넘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관찰적지식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안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고 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깊이 관찰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세계를 이성으로 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이 아닌 신앙적으로 관찰해서 지식을 얻습니다. 이것을 관찰적지식이라고 말하고 좀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체험적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내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얻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 역시도 그 체험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그리고 7절 하반 절입니다.“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말하는 바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 실천 하고, 실천하면서 또 깨닫고.... 이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선을 알고 누릴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 지식과 총명으로 깨닫게 될 때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립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깨달아지십니까? 그렇다면 실천해 보십시오. 그러면 체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선하심이 내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내 주관적인 생각이나 판단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가는 기쁨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후회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내가 흡수되는 그러한 충만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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