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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에의 초대 (마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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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의 초대  (마 4:12~17)


성탄절 열흘 남짓 남겨놓고, 대림절 셋째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성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저자의 증언을 보십시오. 예수님 성탄하신 그 밤 성탄의 첫 소식이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베들레헴 들녘에, 밤에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생각만 해도, 아주 浪漫的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자와 양 떼의 관계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더러운 작업복, 냄새나고 지저분한 양 떼들). 牧者들은, 비천한 자들입니다. 유대종교에서, 목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정결치 못한 不淨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들 중, 하납니다(賤民). 

예수님 탄생하신 그 밤, 베들레헴 들녘에는 자기 양 떼들을 지키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새의 末째 아들 다윗도, 왕으로 기름부음 받기 직전까지도, 들에서 양 치던 목동이지 않았습니까? 양치던 다윗이,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어떤 취급 받는 아들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기름 부으러 왔을 때, 이새의 집에서 벌어진 일, 기억하십니까? 모두 여덟 아들이 있었지만, 이새는 맏아들 엘리압부터 일곱째 아들까지만 차례로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합니다. 말째 아들 목동 다윗은, 아예 대상에서 제외시켜버린 거지요. 일곱 아들들 모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묻지요.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막내가 있긴 있는데, 그는 양을 지키는 자니이다.” 이 무슨 소립니까? 막내, 여덟째, 다윗, 그가 내 아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는 깜이 못 됩니다. 우리 집에서, 양 떼나 지키는 牧童인데, 그런 아들도 보시겠습니까? 그러실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관두시지요. 그러나 사무엘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다윗이 오자,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 6-13). 

유대 사회에서, 牧童(者)은 이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성탄하신 밤, 천사들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성탄소식을 전합니까? 목자들입니다(여기 秘密). 

主의 天使가 목자들 옆에 섰습니다. 主의 榮光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천사가 이르지요.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洞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襁褓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러고는 忽然히, 數많은 天軍이 성탄 소식을 전해준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 14).

여기, 주목할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 성탄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榮光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平和라는 겁니다. 이 점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맘이 담겨있습니다.

마태의 증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실 때,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이 때부터(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때),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悔改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 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는 말씀이, 공생애 첫 말씀이라 증언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무서우십니까? 그렇잖으면, 부드러운 하나님 나라 초청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行間을 읽어야, 이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글의 줄과 줄 사이, 행과 행 사이, 속뜻, 감추어져 있는 뜻). 문자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지요.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 성탄 소식을 전할 때, 목자들은 두려워 떱니다.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洞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분위기가 매우 밝지요? 그런데, 예수님 길을 예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의 증언한 예수님 오심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무섭습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회개케 하는 세례를 베풀며,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가 베푼 세례와 심판말씀 선포 분위기를,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분위기의 그림일 것 같습니까? 바탕색은 매우 짙고 어둡지 않겠습니까? 요즘 회자되는, 2012년 지구의 종말 영화처럼, 두려워서 벌벌 떠는 분위기가 묻어나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요한이 요단 江에서 세례를 베풀 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에서, 요단 강 사방에서, 나와서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 받으러 나왔습니다. 그 때, 요한이 뭐라고 선포합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臨迫한 震怒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러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도끼가, 줄기나 가지에 놓인 것도 아니고, 나무 뿌리에 놓였다 합니다. 날선 무서운 도끼날이,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의 가지도 줄기도 아니라 아예, 뿌리를 잘라 내기 위해서 나무 뿌리를 막 내려찍기 일보직전, 일순간 정지해 있는 상태, 임박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시퍼런 날 선 도끼날이, 나무 뿌리에 닿을락말락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만 해도 섬뜩합니다. 그의 심판선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한 후,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시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키? 바람이 불 때 곡식을 공중으로 던져 올려서,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보내고, 알곡만 남게 하는 곡식 까부르는 기굽니다. 쭉정이를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라 합니다.

이런 요한의 선포를 듣자, 사람들이 두려워서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에게는, 賦課된 것 外에는 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給料를 足한 줄로 알라”(눅 3, 7-14).

예수님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은 이렇게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때가 지나고 드디어 예수님의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과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 17; cf. 3, 2). 말씀은 똑 같은데, 예수님과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는, 세례 요한이 선포하던 하나님 나라와 전혀 다른 분위기입니다. 깜깜 어두운 나라가 아닙니다. 무서운 나라가 아닙니다. 임박한 심판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해맑고, 밝은 나라입니다. 어두움이 물러가는, ‘참 빛’으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고, 선포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이 없는 생명 그 자체이셨습니다. 절망에 빠졌던 자들에게 희망이셨습니다. 수고하게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쉬운 멍에, 가벼운 짐이셨습니다. 

그릇된 율법주의에 병든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眞理이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眞理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새 삶을 살도록,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유대종교에서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 稅吏, 娼妓, 罪人들, 難治病患者들, 異邦人들, 女人들, 그들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보가, 누구에게 시험(걸림)이 되었습니까? 獄에 갇혀 있던, 예수님의 예비자였던 세례 요한에게, 시험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생각하고 외쳤던 예수님 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 혼돈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마태복음 11, 2이하 말씀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獄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자기)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메시아, 그리스도)가 當身이오니이까?(당신이, 진짜 메시아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 2-3). 세례요한조차도, 이런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 혼돈이 일어난 겁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 선생 요한에게)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알리되, (이렇게 알려라) 盲人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癩病患者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者에게 福音이 전파된다 하라(이, 무슨 말씀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고).” 

그리고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일, 말씀하시는 그 말씀, 비록 우리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신앙습관과 다르다 할지라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셨습니다(마 11, 6). 또 말씀하셨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예수님을 집적, 눈으로 보고 증언한 선지자). 그러나 천국에서는 至極히 작은 者라도 그보다 크니라(세례 요한, 그가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 하여도, 그는 예수님의 준비자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예수님 준비자가 아닙니다. 오신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듣고, 본 자이고, 증언해야 하는 자이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에, 예비자에 불과했던 세례 요한과 비교하면, 그 보다 훨씬 더 큰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까? 세례 요한과 같이, 무서운 심판자로 기다리십니까? 날선 도끼날을 나무 뿌리에 올려놓으신 분, 심판하실 하나님으로 기다리고 계십니까?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서,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사르실 하나님으로 기다리십니까? 물론, 역사의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은, 그리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영광, 우리에게는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임하는 하나님 나라 초청에 응답하는 자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 하나님 나라 얻습니다. 교만치 않는 자, 자기 義를 자랑치 않는 자, 자기 죄로 哀痛해 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 얻습니다. 자기가 義롭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는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稅吏들과 娼妓들이 (바리새인, 서기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 31하).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그런 사람이, 자기를 義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者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멸시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삭되지 못한 早産兒, 마치 유산 된 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自畵像입니다. 나의 나 된 것, 하나님의 은혜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가치함, 비천함을 말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 영광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딤전 1, 15). 

위대한 聖人으로 추앙받은, St. Augustinus는 불멸의 거작인 懺悔錄을 기독교 역사에 남겨놓았습니다. 그가 언제 참회록을 썼습니까? 그가 존경 받는 주교가 된 이후, A.D. 396년 以後입니다. 45세 때입니다. 32세 때, 방탕과 이교도 생활을 접고 개종했습니다. 로마령 아프리카의 한 도시, 히포(Hippo) 의 주교(396-430)로 있을 때, 썼습니다. 

높은 덕망과 탁월한 학식으로 아프리카는 물론, 전 세계 교회 위에, 그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는, 생존 당시에(참회록을 쓸 당시) 이미 전 세계교회적으로 聖者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가 붓을 든 것입니다. 붓을 들어 가차 없이 자기 자신을 벌거벗겨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참회록입니다. 가만있으면 더 추앙 받을 수 있고, 聖人待接을 받을 터인데, 존경 받는 정점에서, 그는 자신의 죄와 연약함,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교회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각처로부터 그에게 쏟아졌던 찬사와 선망羨望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은 고사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아도, 도무지 분수에 맞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추함, 거짓됨, 죄인 됨을 보여 주려고 참회록을 쓴 것입니다. 참회록의 내용보다, 참회록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더 위대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면, 늘 작아집니다. 커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작아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그 사람이 점점 더 커지고, 자기는 점점 더 작아지는 거지요. 

사랑으로, 구원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자비와 긍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도리어 자기 영광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 내어놓으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부터 임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우리가 어찌 회개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감히 내가 義롭다 하겠습니까? 그 의미가, 예수님 말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는 말씀입니다(마 4, 17). 천국을 얻는 우리 모두 되십시다. 천국의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이 다 되십시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우리 위해 오셔서 十字架에 죽으시고 復活하시고, 昇天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우리의 驕慢, 義, 자랑, 다 내려놓습니다. 우리의 軟弱함, 허물, 罪惡들, 다른 사람 앞에는 내어 놓지 못하나, 主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옵소서. 하나님 나라 구하는 자 되게 하시고, 증언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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