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정말 말씀을 사모합니까? (시 119:145~152)

  • 잡초 잡초
  • 475
  • 0

첨부 1


정말 말씀을 사모합니까?  (시 119:145~152) 
 

1. 말씀은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떼면서부터 형님들이 읽으시던 古典과 武俠誌를 함께 떼어온 저는 “세 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고 지금도 武俠小說을 열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에게 이 무협지 이야기를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무협지에는 ‘소림, 무당, 아미, 화산, 곤륜, 점창, 청성, 공동, 장백’파와 ‘개방’ 등 전통적인 九派一幇이 등장합니다. 각 문파들은 문하생들을 받아들여 각기의 고유한 무술을 전수합니다. 훈련을 통하여 각 문파마다 고수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련된 고수들은 天下에 당할 자가 없는 절대 고수가 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무협지에서 주인공이 절대 고수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단계가 있는 데, 그것은 “奇緣”을 얻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하면서도 신비로운 인연을 만나서 절대 고수가 됩니다. 

그 과정을 보면,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일반인이거나 혹은 평범한 무술인, 혹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武術人에 불과했는데, 자기보다 훨씬 강한 고수와 싸워 패배하거나 혹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주인공은 切望의 奈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주인공은 奇緣을 만납니다. 그것은 前代의 절대 강자 혹은 역대 최강 고수의 武術書, 즉 武術 비급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 무술 비급을 통하여 天下無敵의 무술을 익힌 뒤, 그는 절대 강자로 거듭납니다. 

많은 무협지들이 절대 무공이 기록된 무술 비급에 얽힌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무협지는 누군가에게 절대 무적의 무술 비급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천하의 武術人들이 모여들어 그것을 차지하려고 싸운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天下無敵의 무술 비급과 그 무술 구결을 알면 그것으로 절대 강자가 되기 때문이지요. 

저는 일반인이거나 평범한 무술인, 혹은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고수인 주인공을 절대 강자로 만들어주는 이 ‘무술서’, 이른바 ‘무공 비급’에 대한 내용을 읽을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이야말로 평범한 우리를 이 세상의 절대 강자로 살도록 만들어 주었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는 <정말 시리즈 설교>의 6번째로 여러분의 ‘말씀 생활’에 대하여 묻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성경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여러분을 어떻게 만들어 줍니까? 여러분은 그러한 성경 말씀을 얼마나 필요로 하시는지요? 정말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2. 말씀을 향한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시편 119편은 22개의 히브리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각 8개 구절의 22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시입니다. 작자와 기록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시편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작자를 다윗이라고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시인은 히브리어 알파벳 전부를 동원하여 이 시편을 기록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낼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완전한지, 그리고 그 말씀이 얼마나 풍부한지, 나아가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편에서 주님의 말씀을 여러 가지의 이름과 표현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략 10개의 단어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데요. “법”(토라; 25번), 다바르로서의 “말씀”(20번), 이므라로서의 “말씀”(19번), “계명”(미츠와; 복수형 21번, 단수집합명사 1번), “율례”(후킴; 21번), “규례”(미슈포트; 단수형으로 4번), “법도”(피쿠딤; 21번), “증거”(에다; 복수형으로 22번, 단수형으로 1번), “도”(데레크; 복수형으로 5번, 단수로 6번), “길”(오라흐; 시편에서 5번 사용됨) 등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어떤 마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표현합니다. “즐거워한다(16,24,35,47,70,77,92,143,144).” “사랑한다(47~48,97, 113,119127,132,159,163,165,167).” “지킨다(8,17,34,44,566-57,60,67,88,100-101).” “묵상한다(15,23,27,48,78,97,99,148).” “기뻐한다(14,74,162절).” “사모한다(23,37,40,50,88, 93,107,149,154,156,159).”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는 시인은 원수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23, 46, 161). 

즉 “즐거워한다.” “사랑한다.” “지킨다.” “묵상한다.” “기뻐한다.” “사모한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그가 누구든지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추적하고 괴롭히는 원수들이 사라지는 것이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는 拷問과도 같은 고난이 그치는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安全과 平安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상황에서 시인이 가장 바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괴롭히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시인은 그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며, 그 곤경에서 자신을 건져줄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뿐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22개의 각 연에서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 19번째 “코프”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1)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첫째로 시인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145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 “전심으로 부르짖으면서 구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어린아이가 소리 내어 울면서 부모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말합니다. 시인은 말씀을 사모하여 구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울면서 부모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부르짖었다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내가 주의 교훈, 주의 증거를 지키겠다!”고 고백합니다(145,146). 이러한 시인의 기도는 어떤 특별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응답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구한 것은 주님의 교훈, 주님의 증거, 주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향한 시인의 태도는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시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31절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헐떡이다”는 말은 ‘숨이 차서 힘겹게 호흡하다, 숨이 넘어갈듯 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한여름 땡볕 아래서 타는 듯한 열기로 인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찌들어 가는 가운데서 한 모금의 시원한 물, 혹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자주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시편 42편 1절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허덕이는 것은 단순히 詩的이고 文學的인 표현이 아닙니다. 높은 산지의 바위들과 깊은 계곡을 뛰어다니던 사슴들은 쉽게 목이 모르게 되는데요. 목이 마를 때 제 때 물을 찾아 마시지 못하면, 氣盡脈盡하다 못해 헛것이 보여서, 흙이나 모래를 퍼먹기도 하고, 물 한 방울 없는 나무 밑이나 바위 밑을 앞발이나 주둥이로 파다가 발이나 입이 다 헤어져 많은 피를 흘리다가 죽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슴이 물을 찾아 갈급해 하며 허덕인다는 것은 ‘삶이냐 죽음이냐’와 관계되는 처절한 싸움을 뜻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다는 것은 시간이 남고 형편이 좋아서, 삶의 여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生死의 岐路에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말씀에 대한 기갈, 즉 굶주림을 구구절절이 표현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도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굶어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요즘 세상에도, 전 세계적으로 5세 미만의 아이들이 하루에만도 약 4 만 명이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굶어 죽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서, 마침내 어떤 음식도 먹고 싶지 않는 단계에 이른다고 합니다. 

영적인 굶주림도 이와 같은 절차를 밟습니다. 날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던 사람이 하루 정도 말씀 읽기를 거르게 되면 그때는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말씀 읽기를 계속해서 멈추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말씀에 대한 배고픔조차 못 느끼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말씀에 대한 배고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아닙니까?

또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든지 때로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때로는 밤을 새워 가면서, 또 어떤 날은 자다가 깊은 밤중에 깨어서, “주의 말씀을 사모했노라”고 말합니다. 62절,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147,148절,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스위스의 철학자인 카알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잠을 이룰 수 없는 많은 경우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왜 불면이 생기는가를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불면은 대개 병이나 걱정되는 일이나 불안한 생각으로부터 생긴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친 휴식, 안일한 생활 방법, 갖가지 무절제, 혹은 긴 시간의 낮잠 등으로 해서 오는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파서도 그렇고, 자녀의 일이 걱정이 되어서도 그렇고, 혼자 있게 된 일이 서럽고 가슴 아파서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사업이 풀리지 않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엉망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직장을 잃어버리고, 가장의 자리를 상실하여 잠을 못 이루기도 합니다. 부도를 막지 못하여 그러하고, 아이의 병치레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인이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 즉 밤을 꼬박 새우거나 혹은 자다가 깨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함 때문이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사울 왕에게 쫓기기 시작한 다윗은 10년 조금 넘는 세월을 도망자로, 마치 사냥꾼에 의해 추격을 당하는 짐승처럼 서글프게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쫓겨 다니던 시절에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망 다니지 않고 안정되게 살아가는 것? 저녁 식사를 준비한 식탁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식사하는 것?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들과 함께 지내는 것?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이 도망자 시절에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그리고 가장 많이 부르짖었던 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경우에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다윗은 그 말씀을 얻고 난 다음에 주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시19:10). 그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이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주님의 말씀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162절,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잠16:19 참조).” 그리고 추수를 끝낸 농부들이 만끽하는 수확의 즐거움보다 더 큰 것이라고 했습니다(시4:7, 참조 사9:3). 심지어는 127절,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 세상의 돈, 그 어떤 재물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더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여러분도 시인처럼 이렇게, 아니 시인보다 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에서 뜻을 찾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大韓民國을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세종시 계획을 수정하는 것이 주님의 뜻일까요? 분당 샘물교회 성도 두 명이 순교한 아프카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주님의 뜻일까요? 겨울철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운데, 돌연 화폐개혁을 단행함으로서 민중봉기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북한, 탈북자들을 비롯하여 국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고 있는 북한 당국과 북한을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불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에 대한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어디 이러한 일반적이며 큰 범위에서의 하나님의 뜻만 궁금합니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나’를 중심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 아닙니까?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내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것일까? 내가 가야할 인생길의 방향은 어디일까요? 

신라 시대의 학자이자 최고 문장가였던 최치원의 漢詩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笑指門前一條路(소지문전일조로) 纔離山下有千岐(재리산하유천기)” ‘웃으며 문 앞 외길을 가리키니 겨우 산 아래서 천 길로 갈라지네.’ 시인이 시골집 마루에 앉아 그 앞에 난 외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좀 더 멀리를 바라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앞에 보이는 산 아래에서부터 그 외길은 천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외길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 앞에는 항상 천 갈래, 만 갈래의 인생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많은 길 가운데 여러분이 가야할 길은 어떤 길일까요? 

오늘 본문의 시인도 그러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시인은 150절에서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라고 고백하면서,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먼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즉 시인을 해치려는 자는 단순히 자신의 원수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하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개인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은 결국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즉 현재 시인이 처한 상황은 원수들이 바로 곁에 있어서 자신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피해야할 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원수들을 피할 수 있으며, 안심하며 지낼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이어지는 시인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151절,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그렇게 앞뒤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문득 깨닫고 보니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신 것을 알게 해 준 것은 바로 주님의 “계명”, 즉 주님의 말씀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51). 결국 시인은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기 곁에 계신 것을 알았고, 말씀의 지도를 받아 그 위기를 벗어나 안전한 길로, 승리의 길로 나아갈 것임을 믿었습니다.

시인은 105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살이를 어두운 밤길을 자기 앞만 겨우 비추는 등불을 들고 걷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0장 3절에서 죽음과 자신은 겨우 한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자기 앞을 비추는 등불과 같아서, 그 말씀이 비추는 대로, 그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그 말씀이 가라고 하는 대로, 가지 않으면 길을 잃거나 실패의 벼랑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찾는 모든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주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세계와 열방이라는 큰 범위이든지, 나와 내 가족 혹은 건강과 돈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성경 말씀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 대기업을 일구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 유명한 정치인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으며, 수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주 과학자가 되었고, 어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물리학자가 되었으며, 또 화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자기 인생길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그 뜻을 알려줍니다. 오늘도 인생의 길을 묻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그 뜻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책, 즉 기록된 주님의 말씀이지만,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주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성경을 통하여 지금도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인생길만이 아니라 그렇게 고민하던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이나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떠나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꿇어앉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까지 기도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는 작심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항상 들으면서 주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래도 말씀을 안 보시겠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코끼리는 우둔해 보이지만 생존을 위한 지혜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라고 합니다. 코끼리가 더울 때 어떻게 하죠? 귀로 부채질을 하거나, 물이나 진흙으로 샤워를 하여 더위를 이겨냅니다. 또 근처에 개울이나 연못이 없을 때 쓰는 비상수단으로 침을 잔뜩 괴었다가 코로 들이마신 후, 자기 몸에 뿌리는 식으로 더위를 피합니다. 햇볕이 따가우면 나무 그늘을 찾아 가서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코끼리의 지혜는 음식 섭취에도 숨어 있습니다. 

코끼리는 칼슘을 섭취하여 이빨 등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대나무를 즐겨 먹습니다. 단단하고 질긴 통 대나무를 으깬 다음, 코로 말아 올려 먹고, 그냥 입으로 ‘우지직’ 씹어 먹으면서 부족한 영양소를 섭취합니다. 또 건조한 아프리카 초원 지대의 코끼리는 죽은 동물의 뼈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칼슘을 보충합니다. 비록 먹기에 까다롭고 불편하고 더럽게 여겨질지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서슴지 않고 먹는 것이 코끼리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도 그가 어떤 음식을 섭취하는가와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편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밥상에서 편식을 하듯 말씀에 대한 편식을 하는 것이죠. 귀에 거슬리는 설교에는 스스로 방음 막을 칩니다. 좀 까다롭거나 부담스러운 말씀은 그냥 건너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코끼리가 달콤한 야자열매만 찾아다니지 않고, 칼슘을 보충하기 위해 억센 대나무를 씹기도 하고, 죽은 동물의 뼈를 먹기도 하는 것처럼, 비록 여러분에게 힘들게 여겨져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성경 말씀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첫째로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정말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함이요,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 알기를 원하십니까? 넓게는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뜻을 찾고자 하고, 좁게는 여러분 자신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말씀 속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묻는 질문의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질문, 어떤 궁금증,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말씀 앞에 설 때 말씀이 여러분에게 들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성경 말씀을 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펴는 그 성경 속에 주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넓으며, 가장 풍부한 寶物 倉庫와도 같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여러분이 받은 최고의 복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다 누리지는 못합니다. 오직 말씀을 사모하는 자 만이, 말씀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 모든 복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