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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세주를 대망하는 삶 (눅 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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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를 대망하는 삶 (눅 3:7~17)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여기에 성령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이 소극적인 의미의 기다림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앉아 수동적으로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선포는 이 계절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의 입술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무한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3-5). 이 같은 예언을 입고 세상에 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온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그는 요단강에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개하고 정직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촉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에게 세례를 받고자 나온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독설한 후에 뒤이어 선포한 복음입니다.

그는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입으로만 경건한 척하지 말고 삶에서 실질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이 오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올바른 자세임을 가르치면서 또 오실 주님의 모습을 조명하여 줍니다. 대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 세례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함께 들으며 오실 주님을 기다리되 부끄러움이 없이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몸 말

본문 9절은“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씀하며 몹시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으나 3년이 되도록 열매를 얻지 못하자 진노한 주인이 찍어 버리라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눅 13:6-9). 또 실제로 예수께서 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즉시 그 나무를 저주하였고, 그 나무는 뿌리째 뽑혀 말라 버린 일이 있습니다(막 11:13).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때입니다. 결코 무화과나무가 자신의 때를 정할 수 없고,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그 때가 곧 자신의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어느 때든 하나님이 찾으시면 열매를 드릴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그 때가 가까운 줄 알고 있습니다. 본문은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긴박하다는 경고입니다. 자칫하면 나무가 몽땅 잘리어 불에 던져질 위기의 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임박한 이때를 느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냥 예사로 이 말씀을 듣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지기를 바랍니다.

8절은“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촉구합니다. 앞의 두 비유처럼 주님께서는 열매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어떤 과실나무의 가지는 목재로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열매로만 그 나무의 가치가 드러나고 그 열매의 있고 없음이 존재의 이유가 됩니다. 본문에서 비춰볼 때 주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의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회개를 하였는지 아니면 회개하는 척하였을 뿐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회개의 열매는 외적으로 표현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삶의 모습에서 그것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참 회개는 전 인격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삶이 바뀝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그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임박한 때를 아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주님이 찾으실 때를 기다리며 항상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분명한 것은 그 때가 아주 가깝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임박한 때를 인식할뿐 아니라 그 때를 준비해야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말씀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먼저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그릇된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증받은 것인 양 생각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확신은 당시 지도자 계층이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다 모든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의 이런 그릇된 안전 심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갇혀 있으면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정죄했고, 화석화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그들의 마음에도 그릇된 확신에 안주하려는 이와 같은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세례 받는 것만으로는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세주를 대망하는 삶은 이런 그릇된 자기확신, 공로주의, 형식적 신앙을 벗어 버리고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의도로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혹독하게 질책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릇된 확신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면서 좋은 나무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열매맺는 삶을 살지 못하면 그것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은혜 받은자, 구원 받은 자는 열매맺는 삶을 통하여 구원의 확증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라는 사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신앙의 연륜과 직분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그릇된 확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말라’고 하는 세례요한의 말씀에, 10절에 보면“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는 것이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인지 그 방법을 묻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각각의 삶에 맞는 실질적인 정의로운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이웃사랑의 가장 실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웃사랑은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규례 중의 하나였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은“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였으며, 예수께서도 친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웃사랑이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행하는 것이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나와서는‘선생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물었을 때에“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아부하고, 또 자신들의 치부를 위하여 썼습니다. 그만큼 부정이 심하였고, 따라서 원성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원망의 대상이었고 미움을 당하였으며 부정한 사람들이라 낙인되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더 유대인들을 괴롭혔고, 정한 세 이상을 거두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직업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들에게 그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한 법을 지키는 것이 그들이 행할 정의임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병들에게도 가르쳤습니다.“사람들에게 강포하거나 무소하지 말라.”“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군인 또한 합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거나 군대를 이탈하여 군대를 해산시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강포를 행치 말라 하였습니다. 폭력을 사용하여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정의의 칼이든지 전쟁의 칼이든지 악을 행하는 자에게만 공포가 되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 칼은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야 합니다. 무소하지도 말라 하였습니다. 거짓 고소하여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유 없는 피를 흘려 원성을 사지도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합니다. 그들의 직업을 인정하였습니다. 단 봉급이 적다고 힘없는 백성을 괴롭혀 늑탈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리들에게의 가르침은 회개의 실질적인 모습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 회개요 올바른 성도의 열매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리요 군병일지라도 그 직업 때문에 멸시를 당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그들 또한 합법적인 직업인으로서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온전한 회개의 삶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참 회개는 내게서 가장 쉬운 것부터 고쳐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의 것을 송두리채 뒤엎고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것을 인정하십시오. 거기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 봅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세례요한이 오실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16절에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라고 말씀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는 무리들에게 자신은 아니고 오실 그분은 자기 뒤에 오실 분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오실 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신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신을 풀고 매는 것이 노예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그 노예조차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자신을 낮추어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그 만큼 삶과 행적이 그리스도처럼 비춰졌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마치 그리스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실 그분을 준비하는 자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회개의 외적 표현일 뿐입니다. 회개에 동참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나 오실 분의 세례는 다릅니다. 그는 불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불은 태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분은 불로 죄를 소멸하실 분입니다. 불로 회개자의 죄를 도말하시고 회개치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새 영을 불어넣어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회개하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실 그분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눌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과 버릴 사람을 구별하는 도구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요, 또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비추고 그 피를 발라서 진위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염소가 아무리 양의 탈을 쓰고 위장하였을지라도 그 말씀 앞에서 그리고 그 피에 의하여 본색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가 나뉘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것입니다. 

또 그 키는 말세에 있을 대환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곳간에 들일 것과 아궁이에 던져질 것이 구별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백성들을 권하여 가르쳤습니다. 오실 주님을 선포하며 속히 회개하고 주를 영접하라 하였습니다. 회개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참 회개의 길을 제시하며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오실 주님은 처음 오신 아기예수의 탄생과는 사뭇 다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이렇게 기다리고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몇일전 국민일보에서 이런 예화를 보았습니다. 어느 부자가 하나님께 재산을 천국으로 가져가겠다고 졸랐습니다. 끈질기게 졸라대는 통에 하나님은 마지못해 허락하십니다.‘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네 재산을 가져와도 되지만, 가방 하나에만 담아야 하느니라.’재산을 모두 팔아 비싼 금으로 바꾼 부자는 흐뭇해하며 말했습니다.‘이렇게 할 줄이야 하나님도 미쳐 모르셨겠지….’천국문에 이르니 베드로가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방을 열어본 베드로는 깜짝 놀라면서‘이런 도로 포장 재료는 무엇하러 잔뜩 가져왔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닥친 상황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이라도 다 세상에 속한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의 기쁨은 한계가 있습니다. 유한한 세상의 기쁨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들려지는 좋은 소식이란 하늘의 소식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의 영원한 기쁨의 초대가 가장 큰 소망이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초대장을 전달하였습니다. 고대하던 주님이 오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분을 기다리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하였습니다. 회개를 위하여 특별하게 소란을 떨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처럼 요단강으로 가서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확신을 버리고 다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냉철하게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을 살펴보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을 버리고 가장 작은 것 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을 지나며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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