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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히 떠나라 (신 3: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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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히 떠나라 (신 3:23~29)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29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이제,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의 종착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 생애 마지막’이라는 진짜 주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담대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담대히 떠나라는 것은 한 때 어느 광고의 카피로 유명하였던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떠나라, 열심히 일한 당신!’은 일 중심의 문화에서 여가 중심의 문화로 변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대히 떠나라’는 이 세상 중심에서 저 세상 중심으로 변화하여야 할 것을 주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고, 온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두려움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나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정은 우리가 살아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살아야 할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며 사는 것을 겸손히 배운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 땅에서 다 이룰 수 있을까요? 

23절 말씀입니다.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구하다’[@n"j/하난]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다고 여겨졌기에 제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40년간을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서 또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 광야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40년이었습니다. 이제 고통스러운 훈련의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기시를 간구합니다. 
   
무엇을 간구합니까?
   
25절 말씀입니다.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모세는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요단강 건너 저 아름다운 땅, 저 풍요한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합니다. 모세는 ‘구하옵나니’[an:/나], ‘제발, 바라건대, 청컨대’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모세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생명은 여기에서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로써는 하나님의 결정이 야속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도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몇 년 만, 아니 몇 달 만 더 살게 하시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터인데, 120년 인생의 끝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만 퇴장하라니 모세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에게 일 백 이십의 삶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했습니다.

1.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삶 치고 아쉽지 않은 삶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백년, 천년을 산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온 삶은 짧고, 한 일은 없고, 남은 일은 많다고 해도, 더욱이 이제 막 빛을 보게 될 순간을 맞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라고 말씀하시면 아쉬워도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서 덜 살 수도 없고 더 살 수도 없습니다. 아쉽지만 떠날 것을 생각하십시오. 다만 그 때까지 열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십시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할지라도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떠나야 하는 우리의 인생에는 아쉬움만 있는 것입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족하다’[bb'r;/라바브]는 말은 ‘많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 죽어야 했는데 오히려 공주의 아들로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친 모세의 삶은 양 치는 목자로 끝나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로 삼아주셨습니다. 더욱이 그를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존귀한 자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셨고,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만 말씀하셨고, 그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를 사용하셨는지를 헤아려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이상 가나안까지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은 욕심입니다.

2. 만족하고 떠나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와 같은 기도를 하고 모세와 같은 응답을 받은 사람이 신약에도 있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육체에 가기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라고 부르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은 ‘간질’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설교하던 바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것은 바울 자신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도 충격이었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구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는데 정작 자신은 질병으로 자주 쓰러진다고 하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기를 세 번이나 작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이 받은 은혜가 이미 넉넉하고 충분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다가 오히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율법의 노예로 살아야 할 사람이 은혜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약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이 모세처럼, 바울처럼 화려하지 못하더라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많은 아쉬움이 있더라도 헤아려보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건강하게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당신은 오늘 한 순간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던 6백만 명보다 더 행복한 것이다. 전쟁의 위험이 없다면, 교도소에 갇혀있지 않다면, 고문을 당하지 않는다면, 배고픔에서 면제 된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5억 명 중에서 제외 된 것이다. 여러분이 예배를 참석할 때 체포의 위협, 고문이나 죽음의 위협이 없다면 전 세계의 30억의 인구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있고 입을 옷이 옷장에 있고, 지붕이 있는 집이 있고, 잠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은 전 세계의 75%의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에 돈이 있고, 잔돈을 둘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전 세계에서 8%내의 부자에 속한다.”
   
헤아려보면 우리에게는 받은 은총이 많습니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이 땅에 왔다가 가는 이유를 안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만족하고 떠나실 수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쉽지만 만족하고 떠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미 받은 복이 많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또 무엇이 있습니까?
   
27절 말씀입니다.
   :27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는 대신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 갈 땅의 서쪽과 북쪽과 남쪽과 동쪽을 둘러보게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요단강 건너 저 건너편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고 강 건너편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그가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한다는 아쉬움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갈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자 우리가 또한 죽음의 요단강을 건넌 후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서는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 못하지만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바라보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것은 요단강을 건넌 후 천국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기에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담대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청원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힘써 모은 재산을 모두 천국으로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마지못해서 허락하셨다지요. 대신 단서를 하나 달았습니다. 
    “가방 하나에만 담아서 가져오라.”
   
부자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금덩어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큰 여행 가방에 금덩어리를 잔득 담아가지고 갔습니다. 천국 문에 도착하자 베드로가 가방 검색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요?”
   “하나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한 번 열어보시오.”
   
부자가 가방을 열었더니 금덩어리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요.
   “천국에서 보도블록으로 사용하는 것을 왜 가져 왔소?”
   
천국 문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보도블록이 온통 금으로 다 깔려있고 새 예루살렘과 본향 집은 각종 보석들로 지어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기에 이 세상을 담대히 떠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였기에 담대하게 살았습니다(히 11:16). 구두 수선공이었으나 가장 훌륭한 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죽음 저 건너편에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담대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기에 천국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아쉽지만 만족하고 바라보고 떠나면 이 땅의 남은 일은 어떻게 될까요?
   
28절 말씀입니다.
   :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여호수아에게 너의 직분을 맡겨서,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어라. 그는 이 백성을 이끌고 건너갈 사람이며, 네가 보는 땅을 그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줄 사람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출애굽을 완성할 사람으로 생각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백성의 앞장을 서서 약속의 땅에 건너가 백성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줄 자로 세우셨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모세의 몫이었지만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몫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야 했습니다.

4. 맡기고 떠나야 합니다.

리더십학자인 존 맥스웰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복면을 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로 막고 서있었습니다. 자신의 길을 방해하고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달려들어서 복면을 벗겨보았더니 자기 자신이더랍니다. 

무슨 얘깁니까?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고 제한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매우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생각이 자신이 모든 일을 하려는 독선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일 수도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자장과 자하는 대조적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자장이라는 제자는 활달한 기상과 진보적 사고를 가졌기에 일을 지나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하는 만사에 신중하고 현실적인 행동하여 일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낫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을 때 공자는 지나친 사람이나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나 똑 같다고 즉 과유불급[過猶不及/논어(論語):선진편(先進篇)]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지나치는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나 똑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일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고 그 이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모든 곳에 친히 가셔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맡기고 떠나셨는데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을 맡겨 그들도 또 다른 사람을 양육하도록 하여야 합니다(딤후 2:2). 
   
훌륭한 지도자는 또 다른 지도자를 길러내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사명은 영원합니다. 유한한 사람이 영원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만 남아서 하나님의 일을 계속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남아서 계속 일할 사람을 세우고 그 사람을 믿고 맡기고 담대하게 떠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세우고 남은 사명을 맡기는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밀라노 성당’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글귀가 하나씩 새겨져있다고 합니다. 첫 째 문에는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고 새겨져있고, 두 번째 문에는 ‘모든 고난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져 있고,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늘에서 영원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영원을 위하여 이 땅을 영원히 떠나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홀연히 찾아옵니다.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으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도 있고, 부족이 있더라도 이 땅에 귀한 생명으로 왔었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만족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담대히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던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담대하여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땅에서 열정을 가지고 온전 사랑하기 위하여 겸손히 배우고 담대히 떠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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