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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출 16: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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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출 16:13~27)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의 네 번째 청원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양식”이라고 번역된 원문의 단어는 좁은 의미로는 빵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양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엄격한 의미의 빵만 먹고는 살 수 없습니다. 물도 마셔야 하고 고기류나 채소류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굶주리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만나만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메추라기도 내려주시고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기도 하셨습니다. 

“양식”이란 말 그 자체는 일단 먹고 마시는 것을 뜻하는 말이겠으나 그 의미를 조금 더 확대해서 “우리의 육신적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시는 것 다음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상적인 삶의 염려를 언급하실 때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에 이어 “입을 것”을 언급하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25, 28-31) 의복은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기존하는 물질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오직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써 빛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가 아니라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가지고 지으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첫 사람 아담입니다. 창2: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합니다. 

두 번째가 인류의 첫 여자 하와입니다. 창2:21-23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가 아니라 이미 창조하신 물질을 가지고 지으신 세 번째 것으로서, 사람 외에 친히 손으로 만드신 첫 번째 작품이 옷입니다. 옷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의 첫 번째 산물입니다. 창2:25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3:7에 의하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나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합니다. 

두려움과 함께 수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최초의 작품인 치마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 인간 최초의 작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의 산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치마를 만들어 걸치고서도 두려움과 수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3:8). 창3:9-11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에게 그 이후의 그들이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알리시고는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걸친 무화과 나뭇잎 치마 대신 새 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창3:21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죄 많은 인간들이 마치 아무런 죄 없는 존재인 듯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히신 옷을 자꾸 벗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다 죄인 된 사람이라면 옷을 입어야 사람입니다. 사람만이 옷을 입습니다. 스스로 옷 만들어 입는 짐승 보셨습니까? 사람이 짐승과 다른 중요한 차이의 하나가 옷을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옷은 사람만이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의 증거물입니다. 옷은 인간의 수치심을 가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릇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양식을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 국한시키지 않고 “우리의 육신적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로 확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먹을 것, 마실 것보다도 우선하여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몇 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또 빛이 없다면 근본적으로 모든 생물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잠 또한 먹고 마시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래 잠을 못 잔 사람은 먹고 마실 것 다 제쳐놓고 우선 잠부터 자고 보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편 127편 기자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고 전적으로 그의 은혜에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려 하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거창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청원하고 그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기원하며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좀스럽게 먹을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청원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는 당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일갈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게다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하시며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3)”고 말씀하실 주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양식을 주시기를 굳이 기도하라 하셨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신 데서 “오늘 ... 일용할”이라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봅니다. “오늘 ... 일용할”이라는 말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가르치시면서 구하라고 하신 것이 그저 “양식”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만의 양식”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청원은 양식에 관심하는 청원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양식에 관심하지 않는 청원이라는 것입니다. 

양식에 관심을 두는 청원을 한다면 굳이 구차하게 “오늘 하루 먹고 마실 것만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매일같이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기도할 때 최소한 십년 치의 양식을 구하든가, 아니면 은퇴할 때까지의 양식을 구하든가, 아니면 구하는 김에 아예 죽을 때까지의 양식을 구할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매일 실컷 먹고도 남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데 소용될 만큼의 양식”을 달라는 것은 양식에는 관심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주시고 또 내일은 내일대로 그렇게 해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빌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참된 의도일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양식으로 내려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지정하신 몇 가지 제약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매일 각 사람의 머리수대로 하루 먹을 분량의 만나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많이 거두거나 몇 일분의 식량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출16:16). 
둘째는, 매일 그 날 거둔 것을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출16:19). 
셋째는, 제7일 즉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 것이며, 그 대신 그 전 날, 즉 제6일에 이틀 분의 식량을 거두어 그것으로 그 다음날 안식일의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출16:23-26). 

이러한 제약들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매일 매일의 양식과 삶의 염려를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만나를 거둘 때 각 사람이 그날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고 거둔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도 또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의 양식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하는 염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염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었던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은(출16:20)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의 풍족함은 자연이나 인간 스스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거둔 만나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데 반해 여섯째 날 거둔 만나는 다음날 아침까지 간수해도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기 않은 것이(출16:23-24) 만나 자체의 성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일주일 중 여섯 날에는 만나가 있고 일곱째 날에는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던 광야 자체의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출16:25-26, 29). 오직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일 뿐입니다. 

넷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행하는 수고는 실상 얻을 것이 없는 헛수고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으나 얻지 못했음이 그것을 보여줍니다(출16:27).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주신 명령처럼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라 가르치신 뜻이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일상생활의 염려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하루도 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오.”라는 믿음의 간구입니다. 

허황되고 부정한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벼락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정직한 갈망입니다. 잠30:8-9에 보면 이런 간구가 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물질적 부요함에서 오는 교만의 유혹과 물질적 궁핍에서 오는 실족의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만을 살기를 열망하라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라고 가르치신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8)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을 고려할 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기”를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아니 언제나 우리의 삶이 유지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요 그를 믿는 믿음뿐이라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지켜주실 것을 비는 청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청원은 오늘도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살게 해달라는 기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기원은 오늘도 우리의 삶이 육신적 삶에 그치지 않고 영적 삶이 되게 해달라는 기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네 번째 청원 속에서도 “우리”가 강조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내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타적인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식구만 사람답게 살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사람답게 살게 되기를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과 은혜 아래 살게 되기를 기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도가 또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아래 들어와 살게 하는 전도의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전도를 더욱 힘쓰기를 다짐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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