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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망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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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망 (요 5:1~9)


I. 동해야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유럽 미술전이 있었는데 그 성화 전시실에 백발 노인이 들어왔습니다. 주름진 얼굴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과거를 읽을 수 있는 노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70년 성 목회생활을 마치고 외딴섬에 내려가 작은 예배당을 지키던 목사님께서 성화를 감상하시기 위해 올라오신 것입니다. 이 그림 저 그림 구경을 하다가 어느 예수님의 상 앞에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인즉... 갈대처럼 머리칼은 솟구쳐 있어 자신을 전혀 돌보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크게 뜬 눈은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계신 듯 했습니다. 크고 깡마른 손은 병든자 어루만지고 상처받은자 치유하던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신은 맨발이었습니다. 그 발은 바로 물건너 산넘어 잃은 자 찾던 목자의 발이었습니다.

경건되고 감격스런 마음으로 한참 그 그림을 쳐다보다가 노 목사님의 눈에서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말았습니다. 가슴 뭉클하게 끓어오르는 그 무엇.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늙은 종이 주를 사랑합니다.” 곁에서 함께 그 그림을 지켜보던 한 여학생이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을 듣게 되었고 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저도 주님을 사랑해요.” 노신사의 손을 움켜 쥐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서로의 뜨거움은 통했고, 가슴과 가슴이 함께 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삽시간에 7-8명이 그 그림앞에 모여, “이와같은 때엔 난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께. 이와같은 때엔 손높이 드네 손높이 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찬송을 하며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감동을 나누었다는 토막소식을 어느 교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지금은 무한정 고객 감동시대라 합니다. 여러분 주님전에 찾아 나올 때 마다 감동이 있으십니까? 예배하는 감동, 주님을 만나는 감동, 찬송하는 감동, 기도하는 감동 말입니다.

주님을 향해 사랑의 물이 움직이는 사람.
세상을 향해 선교의 물이 동하는 사람.
교회를 향해 비젼의 불길이 타오르는 사람.
주님 앞에 자신의 거룩한 소원을 내어 놓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영상으로 소망의 물이 끓는 사람.

오늘 아침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은 보기는 좋을지 모르나 역사하는 힘이 없습니다.  물이 농토로 흘러 들어가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이 힘차게 흘러 주어야 발전소를 가설하여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움직이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17번째 시간 「물이 움직이듯 마음이 동해야 한다」 「열망」입니다. 

어떤 성경 주석가는 성경에서 기적을 빼고 나면 앞껍데기 뒷껍데기 두 장만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창조로 시작해서 계시록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나는 위대한 기적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이적 가운데 세 번째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이적을 표적이라고 하여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분명한 일곱 가지 이적만 골라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표적들은 나름의 영적인 의미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요 질적인 변화는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다음 네 번째 표적은 오병이어의 이적사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양적인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을 크게 적은 것을 많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II. 명절에 그늘을 찾아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명절만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느라 한바탕 귀향전쟁을 치루곤 합니다. 도시에 올라와 있던 사람이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 우리네들의 명절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시골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서울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명절을 지내는 것이 저들의 명절의식이었습니다. 

우리의 명절이 고향중심이라면 이스라엘의 명절은 성전중심이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으로 저들은 살았습니다. 즉, 교회가 저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저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명절입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셔서 38년된 난치병 환자를 고쳐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간단한 표적속에 숨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는 웬만큼 교회 밥 먹은 사람이라면 단번에 스토리를 줄줄 꿸 정도로 대단히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와 관련된 모임이나 사업체에도 그 이름을 붙인 데가 많습니다. 베데스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베데스다 기도원, 베데스다 복지재단, 베데스다 요양원, 베데스다 합창단, 베데스다 선교회, 베데스다 상담소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한 술 더 떠서 베데스다 옷가게와 베데스다 스포츠 마사지 센터 등도 있습니다. 베데스다가 등장하는 성서적 맥락과 별 상관없이 보이는 업종에까지 버젓이 그 이름이 사용되는 데서, 시쳇말로 베데스다의 브랜드 가치를 엿보게 됩니다. 

베데스다, 병든 사람이 그 물에 들아가면 무슨 병이든 낫게 된다는 신통한 연못이다. 한번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이 구름떼처럼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게 중에는 정말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베데스다를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꼭 곁다리가 끼는 법! 그저 호기심에 구경삼아 온 사람, 또 앞으로 어떤 병에 걸릴지 모르니까 예방 차원에서 한번 목욕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온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 4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마리아 사역 이후에” 그런 뜻입니다. 

무대는 예루살렘 명절로 옮겨집니다. 수십만이 몰려든 작은 도시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축제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여러 구경거리와 도시의 황홀경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잔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환자를 만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즐기기보다는 사랑을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전도서7:4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명절의 축제속에서도 주님은 그 축제속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고 음침하고 괴로운 삶에 지쳐 쓰러져 있는 병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1960년 슈바이쳐박사가 노벨 평화상을 타기 위해 잠시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공항에 내린 박사님은 덴마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세계에서 몰려온 신문 기자들이 기차에 동승을 하게 되었고 슈바이쳐를 만나기 위해서 특등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찾지 못한 사람은 1등석으로 그리고 2등석으로 가 뒤져 보았지만 슈바이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3등석 시골 촌부들과 함께 사과 괴짝을 엎어놓고 슈바이처는 촌노들의 손을 붙들고 맥을 짚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박사 학위가 3개, 명예박사학위가 20개 였습니다. 영국황실에서 그에게 백작칭호를 주었고, 노벨상으로 막대한 상금을 손에 쥘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선생님, 몸도 피곤하실 터인테 어찌 이런 3등석 자리에 있습니까?” 슈바이쳐박사는 한마디 말을 남깁니다. “3등석 밑엔 열차가 없어서요. 그리고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 살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닌다.”

성경의 예수님은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찾아가 만나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탕자 비유정도를 빼고 나면 성경 모든 곳에서 언제나 주님은 찾아가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Waiting God! 이 아니라 Seeking God! 곧 기다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찾아가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쇼핑 따위는 안하시더라도 당시 권력가들을 찾아가 자기 삶의 보장을 받기위해 안면을 익힌다든지, 선교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뒷배경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속물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날 축제 속에서도 그 속에 매몰되어 희희낙낙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축제와는 거리가 먼 곳에 절망과 한숨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그늘진 장소가 있음을 잊지 않고 저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 맹인, 혈기 마른 신체 불구자, 가난에 지쳐 야윈 무리들이 있는 곳, 세상에서 버린바 된 그곳, 중환자들의 수용소를 찾아 가셨습니다.

이 시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의 실패, 고난과 아픔을 안고 오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몸과 마음 - 삶이 아프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III. 은혜의 집(?)

2절 말씀에 의하면 본문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엔 실로암 샘으로 가는 샘문이 있었고 서쪽엔 망대문이 있었고 남쪽엔 배설물을 버리는 똥문이 있었고 오늘 본문 북쪽에 바로 성전에 이르기전 양을 사고파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양문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가장 먼저 수축했던 문이지요. 무너진 나라, 무너진 백성, 무너진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는 제사 즉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느헤미야는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를 양문으로 안내합니다. 여러분의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양문이 수축되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회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 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시험이 있다고 가정이 힘들다고 죄를 지었다고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배 즉 양문을 무너뜨립니다. 아닙니다. 그럴수록 양문이 수축되고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바로 그 곳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여기 “벧”이란 집이란 뜻이고 “에스다”란 은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특별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3절 후반부터 보십시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여기까지 괄호가 되어 있죠? 성경의 괄호부분은 성경 원어에는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괄호안의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본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까봐 고대 교부때부터 삽입해 놓은 부분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이 아니고 전설이지요.

생각건대, 이곳은 온천이었던 모양입니다. 한번씩 쿨컥쿨컥하고 온천이 솟구치면 천사들이 물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어떤 난치성 피부병이나 관절염 환자 하나가 병을 고친 모양이지요. 이 사건 하나로 생긴 소문이 전설이 되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믿어지게 한 모양입니다. 언제나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배워야 하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땐 친구 목사들이 모이면 온 가족이 같이 모였습니다. 그중에 늘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호텔 수족관 앞에서 이 아이가 놀다가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물고기는 입만 벙긋거리고 말을 못해요?” 당황한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물 속에 머리 처박고 있어봐 입만 벙긋거리지 말을 못해!” “아, 그렇군요.” 일 이년후 친구가족이 다시 모였습니다. 아이에게 잘못 가르친게 미안해서 이번엔 제가 물었습니다. “왜 물고기가 말을 못하는지 이제 알고 있니?” “목사님, 목사님도 물속에 머리 처박고 있어 보세요. 입만 벙긋거리지 말이 안돼요.” 이번엔 제가 당했습니다. 잘 가르쳐야 됩니다. 

자, 이것 보세요. 잘못 전해진 전설을 믿고 - 
은혜의 집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난치병 환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고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 걸렸어도 다 낫는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우수꽝스럽고 모순된 현장입니까? 바로 이때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은혜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오직 예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통쾌한 결론입니다.

넌센스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은혜는 아무댓가나 노력없이 받는 것인데 은혜의 집에 와서도 은혜와 상반되는 짓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몸을 날려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이 동할 때 1등으로 들어가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신체에 쬐금 이상이 생긴 사람들일 것입니다. 
가령 저 같은 대머리 환자, 무좀 걸린 사람들, 쌍꺼풀 풀어진 환자, 성형수술 후유증으로 코끝에 염증생긴 사람들... 뭐 이런 사람들이었을 겝니다. 그런데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세 종류 - 맹인,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입니다.

맹인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리 못쓰는 사람이 주섬주섬 일어서면 이미 몇 사람 물 가운데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걷기는 틀렸고 몸을 딩굴딩굴 굴려 보면 이미 사람들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고 있습니다. 들어갈 방법과 힘이 없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 뇌졸중환자들이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하고 말합니다.

베데스다가 정녕 그 이름에 합당하게 자비의 샘물이 되려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궁극적으로 모두가 은총을 누리도록 넉넉히 베풀었어야 옳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규칙에 의해 베데스다가 운영되었다면 거기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베데스다에는 그런 협력과 배려와 보살핌의 원리 대신에 철저하게 능력에 따른 경쟁 원리만이 고질병처럼 존재했습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동하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내가 들어간다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여기 모여있는 난치병 환자들은 당시 유대인의 정신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집, 교회에 모여있는 오늘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 얘기요 너의 얘기라는 겁니다.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 신령한 세계가 보이지 않는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 영감을 잃어버린 사람들, 수많은 사단의 공격을 받고 살지만 그것을 물리칠 힘, 영력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된 삶의 능력을 잃어버린 중풍병자들, 사랑과 자비의 혈기가 마른 가련한 손길들... 이 난치병 환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데스다로 가 보십시다. 
물이 움직일 때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정작 난치병 환자들은 들어갈 힘이 없습니다. 이게 베데스다의 모순이요 인생의 딜렘마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의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누군가 싸워서 이겨야 한답니다. 좋다 해보자하고 링에 올라갔더니 “효도르”가 서 있습니다. “효도르”가 누군지 아세요. 소위 60억분이 1의 사나이 세계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지요. 절망, 좌절, 낙심, 포기, 낙망... 그곳이 베데스다요 인생 현장입니다. 

이 문제의 현장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효도르랑 싸워보겠다고 저마다 주먹을 쥐고 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인 위기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기 한사람은 이천년전 그 환자이거나 저기 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응시하셨단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내 죄를 보십니다. 내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문제를 살피십니다.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시길 바랍니다. 이세상 권력자와 과학자들이 다 모여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우리주님이 1초만 당신을 도와주시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IV. 네가 낫고자 하느냐?(열망) 

드디어 예수님께서 가까이 걸어 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얼마나 엉뚱한 질문입니까? 아마 보통 사람같으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병신이 되어있으니 네가 나를 조롱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음직한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 “네가 나를 놀리냐?” 그랬을 거예요.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냐? 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이때 기껏해야 33살인데 이 환자는 태어나자마자 병이 들었어도 38살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만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대단히 의미 깊은 질문입니다.

자 38년동안 앓아 누웠던 이 환자를 보십시오.
그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몸은 거동할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참으로 낫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끓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이 베데스다의 물이 동해야 낫는 것이 아니고, 네 심령의 물이 동해야 하느니라.” 이 말 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진정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 죄악속에 파묻힌 그대여 참으로 거기서 헤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오랜세월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열망이 있느냐? 이 질문입니다. 이 도전입니다. 38년된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물음은 그를 일깨우는 소중한 물음이었습니다. 가슴에 물을 휘젓는 값진 질문이었습니다. 심령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물이 끓어야 쌀이 익어 밥이 되고
물이 끓어야 고기가 익어 반찬이 되듯이
심령이 끓어야 기도가 익어 응답이 되고,
소원이 익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이 동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향하여 사랑의 물이 끓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은혜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지만 사실 천당 가는 은혜만 받고 다른 은혜 받고 싶지 않은 사람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성전건축 할 때 은혜 받을까봐 겁내는 사람 - 얼마든지 있지요.

베데스다 물이 아니라 심령의 물이 동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로 네 입이 동하게 하라. 내가 채우리라.

네가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참으로 달라지기를 원하느냐?
네가 진정 예수 만나기를 원하느냐?
네가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심령이 하늘을 향하여 말씀을 향하여 동하고 있느냐?

소원이 적은자는 신앙이 적은자입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절망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힘의 원천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주경가 바클레이는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자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자도 게으름에 널 부러져 있는 자도 하나님의 도움과 기적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죄가 있다고 낙심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주님 앞에 나와 “용서해 주십시오” 고백하기만 하면, “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덧입고 싶습니다. 예수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요청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잊어 버리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상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지 아니하겠다 말씀하시면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의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느냐”
“너의 심령이 물이 동하고 있느냐?”
정말 거룩한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느냐?

아멘 주 예수여!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오 주님, 나의 심령이 당신의 은혜를 사모하여 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당신을 향하여 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당신을 향하여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오시옵소서. 이 백성이 새로워 지고자하는 소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달라지게 하옵소서. 부흥되게 하옵소서. 이 땅이 당신으로 끓게 하소서! 
불이 붙게 하소서.

V. One man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물음에 이 환자는 ‘아이구 선생님 살려주세요’ 한다든지 ‘낫고싶고 말구요’ 한다든지 ‘한번만 걸어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문서답을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보시오. 내가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좀 밀어 주시오. 내 손을 좀 붙들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조력자로 바라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 항복하고 나아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인생의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 대신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남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내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내 탓이 아니올시다.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고 그래서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는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이렇게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행이 남의 존재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근원을 자기 아닌 남한테서 찾으려는 것과 똑같은 착각입니다. 열쇠는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바로 너의 손에 있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다.(不怨天, 不尤人 - 孔子)

환경을 바꿈으로써 행복을 맛보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거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만년필을 바꾸는 것으로 ‘좋은 글’을 써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여기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 이 말을 원문에 보면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없다”가 아니라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로 “I have not a man”입니다. 나를 도와줄 그 어떤 사람,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한줄기 희망마저 살졌을 때 One man 단 한사람의 소망마저 사라졌을 때 바로 그순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하나도 붙들 수 없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지요. 그때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당신을 찾아 갈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못남을 비웃고 우리의 죄를 조롱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주님께 우리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이제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물이 동할 때 너를 넣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미신적인 신앙이다”라고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너 오래 누워있더니 정신까지 이상해졌구나” 질책하지도 않았습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으시대거나 과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너 왜 신앙이 그 모양이냐” 무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 그래 받아주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VI.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의문점이 한 두 가지 생깁니다. 
첫째 왜 그 많은 환자들 가운데 여기 한 사람만 고쳐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 사람을 고치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시므로 예수께서 왜 안식일 논쟁에 휘말려 곤혹을 치루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부터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 “자리”란 짚으로 만든 일종의 깔개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침상입니다. 말고 펼 수 있는 작은 방석으로 환자들이나 거지들이 많이 사용한 일종의 이동용 침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도 문제지만 안식일에 물건을 운반하지 말라는 구약 안식일 법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38년된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환자들 중에는 “선생님, 저도 일어나고 싶습니다. 고쳐 주십시요” 하고 매달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누워있던 환자들이 모두 “안식일인데 어찌하여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느냐?” 비난했습니다. 혹 어떤 환자들은 이 사실을 율법사들에게 고자질하여 시비거리로 삼았습니다. 이 꼴이 진짜 중병이라는 것입니다. 중병이 든 것은 유대 종교 전체였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에 들어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싸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가만히 누워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영적 싸움을 피하기 위해 눈치나 살피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귀와 질병을 대적하는 종교입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곳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키는 종교입니다.
내가 흐트러놓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종교입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율법을 깨부수는 종교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 걸어가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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