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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눅 3: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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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눅 3:15~38)
  

연예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고충은 바로 자신의 신상에 대하여 돌아다니는 온갖 루머와 스캔들입니다.
그저 겉으로 나타난 일면만 보고 대중들이 제멋대로 단정해 버리는 판단이나 추측들이 특히 요즘은 인터넷을 통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버리고 마니, 그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어떤 연예인이든지 간에 그 자신에 대한 오해나 편견 속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하여 가장 안타까워하면서 속을 태우는 사람이 바로 그 연예인의 부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또한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뉴스나 혹은 토크쇼 같은 데서 연예인의 부모가 나오게 되면 자기 자식을 두고 "그 애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짓는 장면을 흔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누가복음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세례 요한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제 진짜 주인공이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좀 특별한 순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하여 투옥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따라서 세례 요한의 사역은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21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누가복음의 기록에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세례 요한의 이름은 일절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사건 전에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서는 아예 완전히 마침표를 찍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주인공 예수님의 등장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복음에, 아니 우리 모든 사람 앞에, 아니 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무대에 드디어 등장하시는 이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23절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하여 그 정도로 알아 가지고서는 이 구속사의 주인공 되신 분을 도저히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이 점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본문 21절과 22절에 기록하기를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세례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례 받으시는 사건조차 단 하나의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되어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즉 세례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로서 난 소리에 문맥의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공생애의 첫 모습을 나타내시는 장면에서 다른 사람 아닌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주인공을 소개하고 계시는 소리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로서 소리가 난 대로"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의 소리, 즉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소개해 주시면서 알려 주고자 하신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이제 우리 주님의 탄생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오늘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그 두 가지, 곧 '예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가?'라는 사실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사실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과 동시에 '심판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서 난 소리 중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말씀이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구속사를 성취하시게 됨을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 역시 이 주인공 예수님께서 행하실 사역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본문 15절로 20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헤롯 왕 같은 권력자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죄를 책망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그의 힘 있는 외침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혹 세례 요한이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자기는 결코 그리스도가 아닐 뿐 아니라 곧 오실 그리스도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라고 선언했습니다.
즉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라고 공언했던 것입니다.
  
당시 랍비들의 기록에 보면 '종이 주인에게 하는 모든 것을 제자가 스승에게 해야 하지만 신들메 푸는 것만은 예외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종보다도 더 낮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비록 복음의 메시지는 강하게 전파할 수 있었지만, 그 복음의 구체적 능력에 있어서는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종으로 불리는 것만 해도 과분할 정도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사역들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십니까?
우선 16절에 보면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이 회개하면 그 외형적인 표시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세례는 불과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써 사람의 심령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데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하실 수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물세례를 받는다 하더라도 만일 이와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는 자기와는 달리 '성령세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했던 세례 요한의 이 예언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스스로 확증하셨습니다.
  
바로 당신께서 제자들과 작별하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16, 26)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야말로 당시 유대인들이 그처럼 고대하던 메시아로서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모든 택자들을 당신께로 인도하시는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의 능력 역시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예수님을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이것은 탈곡기가 개발되기 훨씬 전 옛날부터 쓰던 타작 방법으로서 소위 '키질'을 함으로써 가벼운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가게 하고 무거운 알곡만 그 자리에 쌓이게 하는 방법으로 타작하는 장면을 가리킵니다.
그런 타작마당에서 농부는 쭉정이 하나라도 알곡더미에 섞이지 않게, 또한 알곡 한 톨이라도 잘못 튕겨 나가서 잃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그 얼마나 철저히 신경을 쓰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마지막 날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친히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시는 '키질'을 하실 분이십니다.
물론 그 키질의 철두철미함은 세상 농부의 키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4-5)라는 말씀의 문자 그대로 의인 '한 톨'과 악인 '한 쭉정이'가 단 한 개도 서로 섞이지 않는 완벽한 '심판 사역'을 행하실 분이 바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심령을 회개시켜 새 생명을 얻게 만드는 '구원 사역'과 마지막 날에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심판 사역'을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크게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꼭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교인들 중에서도 그저 '세례 요한의 음성'만 듣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그저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오면 나름대로 다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정도를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주일학교와 SFC에 다니게 하면 그들의 인격적 성장에 뭔가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실로 '세례 요한의 물세례'로 끝나고 마는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사람은 그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만 감당하고 있을 뿐이지 여러분의 인격과 삶 자체를 '중생인'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것은 세례 요한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단체는 여러분을 영생의 길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방주'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 '구원의 능력'은 오직 여러분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해야만 누릴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현세의 내 인생에 모범이 되고 도움이 되는 성자' 정도로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들이 아는 대로'만 믿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를 통해 자신의 양심에 약간의 자극을 받는 정도에서 멈추어서는 결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영생과 영벌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꼭 알고 그 분의 재림을 소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남들보다 좀 더 선하고 의롭게 살겠다는 것이 크리스천의 진정한 삶이 결코 아니라, 그처럼 의인과 악인을 천당과 지옥으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나누어 버리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날을 준비하면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고 내 인생을 그 주님 섬기는 수단으로 바치는' 데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만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새 생활'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아니 바로 나 자신을 위하여 '구원 사역'과 동시에 '심판 사역'을 행하시는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오신 분이심을 똑바로 깨닫고 진심으로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서 난 소리 중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소개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 역시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3절 이하 38절에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중략)... 34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과 비교해 볼 때 '요셉으로부터 다윗까지' 이르는 부분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몇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즉 여기서 요셉 다음에 나타나는 "헬리"는 요셉의 친아버지가 아니라 장인, 즉 마리아의 아버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마태복음의 족보나 누가복음의 족보나 둘 다 예수님께서 다윗 왕통을 잇는 '메시아의 계보'에서 탄생하셨으며 그 결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입니다.

하지만 이 누가복음의 족보에는 마태복음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54절 하반절부터 나오는 내용으로서, 아브라함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에까지 이르는 족보입니다.
  
왜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에게까지 연결해서 기록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을 뿐 아니라, 바로 '첫 사람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초인간'과 같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담 다음에 곧 이어서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고 덧붙였던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족보를 쓰는 관습을 따른다면 당연히 아담에서 끝났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을 사람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 족보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누가복음의 족보에 이처럼 특이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 첫 사람의 존재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란 원래 이처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즉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에는 결정적인 균열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 없는,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 이후로 그 어떤 사람도 그 하나님과의 원래 관계를 회복할 능력도 방도도 전무하게 되었던 것이며, 바로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완전 타락과 전적 무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가운데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 '아담의 자손'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래 이런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본성이 그처럼 유일하게 특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정확하게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존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 창조주와 첫 사람 사이에서 끊어지게 되었던 족보, 바로 이것을 연결해 주시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이런 분이신 것을 알지도 못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그저 "요셉의 아들"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예수님이 역사상에 현존하신 인물이라는 정도까지는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들이 아는 대로'만 알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소위 '가현설'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저 육신을 입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신성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무슨 허깨비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막말일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이나 '신성' 중에 어느 한 쪽만 알거나 믿는 것은 물론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처럼 반쪽만 인정하는 '역사적 지식'이나 '이단적 신앙' 안에는 참된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수님은 '양척 사이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연결할 중보자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이 증거해 주시는 그대로, 성부께서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통하여 친히 소개해 주시는 그대로, 이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제물로 죽으시기 위하여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분이심을 꼭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빠져나가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중보자'를 의지하는 이 신앙에만 있음을 깨닫고 끝까지 이 믿음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계와 역사를 통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이십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 예수님은 그저 '사람들이 아는 대로'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따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이름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 양식이 있다는 사람들조차 이 예수님을 그저 '드물게 나타나는 현자' 정도로, 혹은 소위 '4대 성인'들 중의 하나로만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명색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까지 이 예수님을 그저 '존경하면서 본받으려고 하는 훌륭한 위인'으로만 믿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어처구니없게도 순전히 '사람이 제멋대로 판단하고 추측하는' 대로만 알려져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친히 가르쳐 주시는 대로 알고 믿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는"(요 14:10)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성부만큼 성자를 정확하게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이 나라의 대통령을 그저 '이명박이라는 이름'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는 것은 사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니 아무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반면에 정치권이나 행정부에서 '대통령이 하는 일'에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대통령의 권위를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국무총리나 장관 등으로 임명을 받아서 일반 국민들보다는 훨씬 더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부인이나 그 자녀들은 그런 대통령의 측근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통령과 훨씬 더 친밀한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그 가족들은 그 대통령으로부터 남편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동시에 대통령의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오는 혜택 또한 함께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들 다 아는 대로 그저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조금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처럼 '역사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신랑으로' 친밀히 알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그 '구세주의 구원의 능력'을 입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까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해 주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속사를 완성하실 주인공으로 이 세상에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바로 그 성부께서 증거해 주시는 대로 '구원 사역'과 '심판 사역'을 행하시는 분으로 맞이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요 17:25)라고 기도하신 것이 바로 그 믿음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예수님을 알게 된 성도만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4)라고 기도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탄의 절기를 통하여 이토록 우리에게 가까이 찾아와 주신 구세주를 보면서 '사람이 아는 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늘로서 내리는 소리'가 증거해 주는 그대로 이 예수님을 '구세주와 심판주'로 또한 '완전한 하나님과 완전한 사람'으로 알고 믿고 영접함으로써 장차 이 예수님과 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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