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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 (롬 1:5,16:26, 히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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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 (롬 1:5,16:26, 히 11:8)

지금 우리는 신앙의 여러 유형을 살피면서 바른 신앙의 자태(姿態)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의 신앙과 관련된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살피면서 구원의 신앙의 ‘바른자태’를 살폈고 또 구원의 신앙이 어떻게 실증되는 것인가와 관련해서 ‘사명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구원의 신앙은 시간이 감에 따라서 초보가 지나면 사명에 대한 자각이 뚜렷하여지는 것으로 실증된다고 하였습니다. 왜 나를 구원하셨는지? 무엇을 위한 구원인지?에 대한 자각이 서가면서 존재의 성격과 관련된 사명의식을 갖게 되고 그러한 성격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오는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에 대한 자각이 서지 않는다면 구원의 신앙임을 실증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 신앙의 두면

이제 오늘은 구원의 신앙을 가진 자가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에는 크게 둘로 나누어서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신앙과 구원받은 이후에 신뢰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구원을 받는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가는데도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생활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데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하여 신앙생활을 하여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신앙과 관련해서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살피고서 어떻게 구원의 신앙이 실증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은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과 관련해서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살피면서 참된 신뢰 의 신앙의 자태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Ⅰ. 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헛된 유형들
우리는 이미 구원에 필요한 신앙을 생각하면서 몇가지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살핀바 있습니다. 역사신앙이나 일시신앙 기적 신앙과 같은 것들은 구원의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후에 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과 관련해서도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첫째는, 여전히 자기를 신뢰하고 살아가면서 종교적인 몇가지 신행들에 정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그 이후의 삶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도 자기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구원을 받는데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구원받은 이후부터는 자기 힘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 종교적인 신행들에 참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생활을 자기 힘으로 꾸려 가면서도 정규적으로 종교적인 몇가지의 신행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공부를 해도 자기의 성공과 번영을 의하여 자기 힘으로 하고 사업을 해도 자기의 야망과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의 힘으로 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도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이 없이 없다면 종교적 신행들에 아무리 열심히 참여한다 해도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2. 둘째는, 자기 신념이나 소원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줄 믿는다 하는 경우입니다.
신뢰의 신앙 가운데 또 하나의 헛된 유형으로써 자기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즈음 흔히 오용되는 용어중의 하나가 ‘믿음’이란 말입니다. “이렇게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된 줄로 믿습니다!”라는 말은 흔히 열심있고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튀어 나오는 말입니다. 거기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와 같은 구절들은 잘못 이해되어 더욱 그러한 신념들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사실 그 내용에 대하여는 그 약속을 근거로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라 주실 줄로 믿는 것이며 이미 받은 것이나 진배가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는 나의 구체적인 어떤 문제에 대해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아직 그 사실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나 증거를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이 절실한 나의 필요이기 때문에 이루어 질 줄로 믿는다고 “믿사옵나이다!” 하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나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겠다고 작정하셨다면 나의 편에서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얼마나 우스운 말이 되겠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그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들어 주겠다고 확실한 응답을 주셨다면 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는 더 이상 믿는다는 기도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여야 할 것이고 그는 더 이상 믿는다는 기도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응답이나 확신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직 주신줄로 믿는다는 말은 얼마나 일방적인 언사입니까?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할 일도 아닙니다. 내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휘망거리가 신앙의 내용으로 항상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님을 현실적인 자기 필요에 사용하려고 하고 그렇게 성공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Ⅱ.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바른 자태

1.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이란?-‘생활’속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종교적인 몇가지의 신행들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다가 ‘생활’이라는 말을 붙여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몇가지의 신행들에 정규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매일 매 순간 전개되는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주된 내용입니다.

◉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출발점’은?

따라서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심정을 가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조금치라도 내 안에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출발점은 ‘자기부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 파악에서 자기를 부인할 때에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발생’은?

그런데 하나님을 의뢰하는 심정은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분이시고 자신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정당한 인식에서만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 지를 알고 인간된 자기에 대한 인식이 바로 되어질 때에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지식과 자기인식에서부터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는 심정이 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모든 터전과 나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시오, 내가 몸담고 있는 역사에서 되어지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경영해 가시는 분이시오 나의 운명을 쥔 능력의 하나님이시오, 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쪽으로 인도해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인식과 나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인식이 바로 되어질 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께서는 참되고 건전한 지식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난 뒤 그 다음 자기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하나님께 대해 의뢰하는 심정이 서는 것입니다.

2. 신뢰하면서 구하는 바른 자세는?

믿음이란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인도를 믿으면서 어떤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만한 확증과 내용을 쥐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확증이 아직 없는 경우에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성급하게 믿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자기 일방으로 결정으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소원을 아직 받은 줄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었던 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허락치 않으셨다면 그의 믿음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그의 신념대로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닐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그가 믿는다고 하면서 이루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전혀 하나님의 손과는 무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다음 구절에서 혼돈하게 됩니다. “받은 줄로 믿고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 할 때 기도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는 어조(語調)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아빠가 양자를 삼아 온 어린아들에게 너무 사랑스러워 말했습니다. “애야, 이 아빠는 부자야 너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어! 아빠는 너에게 뭐든지 해 줄꺼야! 말 만해 저는 이 아빠 아들이야!” 

며칠후 이 어린아이는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나 뭐든지 사줄래?” 아빠는 “그래 이 아빠를 못 믿니? 말 만해! 뭐든지 사줄게 이 아빠만 믿어. 언제든지 말만해! 너는 이제 내 아들이야!”

이제는 이 두사람은 새로운 관계로 들어왔기 때문에 서로의 수수관계가 새롭게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그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그러나 만일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아빠! 난 아빠 말만 믿어 내가 사 달라고 하는 것 꼭 사주실 줄 믿어 나 다이나마이트 하나 사줘!” 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것 사주실 줄을 믿는 그의 신뢰는 과연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빠는 아들이 구하는 다이나마이트를 사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생각하고서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절실한 필요가 있는가를 생각하고서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절실한 필요가 꼭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꼭 필요한 것인가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절실한 필요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주어서는 안될 것이기에 주시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절실한 필요라고 무조건 주실 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은 능력과 사랑의 관계의 문제이지 아직 언제든지 필요성의 문제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주셔야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하나님으로서의 필요의 문제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필요까지 내가 결정하여 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건전한 신앙은 하나님을 깊이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사실들을 잘 알아 깨달아 가는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저돌적인 감정으로 신앙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의 신앙의 전형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전형(全形)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내용을 잘 음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마26:39)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는 자세입니다. 자기의 필요를 구하면서도 그것이 아버지께서 보실 때도 필요한 것인가를 살피면서 아버지의 필요를 따라 허락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자세입니다.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Ⅲ.신뢰하고 살아가는 신앙은 어떻게 실증될까요?- 순종으로!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에는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한가지 특별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그의 생활이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입니. 그가 믿음이 잇느냐 없느냐 하는 말을 우리가 쓸때는 대개의 경우 그의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데 그 신앙의 여부는 그의 생활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신앙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증명될만한 생활상의 ‘독특한 점’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로 실증됩니다.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신뢰하는 자의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처음과 끝으로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 믿음을 순종과 함께 동반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생활을 하나님께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1:5)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롬16:26)

○아브라함의 신앙

구원적 신앙과 의뢰로서의 신앙은 결코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작용하는 사실을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의 구원의 사실을 실증하였고 계속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 갔습니다. 그의 그러한 신앙의 성격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자기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서 낯선 땅으로 여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대상에 대한 신뢰감에서 나옵니다.
콩으로 매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할 만한 신실성이 결여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대상이 문제가 되어서 믿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에게 신실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라 우리편에서 주님에 대한 신뢰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신실하신대도 왜 우리편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선 주님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분이신가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대상에 대한 신뢰감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신뢰감은 그 대상의 신실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상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분인가를 여러모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신지식(神知識)으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는 심정이 나오는 것이요 그 신뢰감으로부터 순종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해서 자꾸 깨달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신 대도 내 편에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현상을 빚어내는 것입니다. 

Ⅳ.신뢰하지 못하는 자의 심상(心狀)

반면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지 아니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생활상의 독특한 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의 심상(心狀)은 ‘원망’과 ‘불평’과‘불안’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조그만 어려움에도 쉽게 원망과 불평을 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순종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쉽게 감사하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쪽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힘에 한계를 느낄 때마다 불안해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쪽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잠시 어려움이 닥쳐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살아갈 때에 늘 마음에 평정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롬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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