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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된 가치관 (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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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가치관  (빌 3:4~9)

 
내 용 

우리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의 본능 가운데 과시 본능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주변의 자랑거리를 위해서 노력도 합니다. 남보다 공부를 잘했다든지 큰 상을 받았다든지 인물이 잘생겼다든지 체육대회 나가서 금메달을 땄거나 사업을 성공했거나 권세나 좋은 대학을 나왔다거나 등등 뭐든지 사람은 자기 위치를 말해주는 자랑거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은 좋은 창조적인 성취를 이루어간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거리는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아무 노력도 안했는데 역사가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고려 때는 왕 씨들이 가문의 자랑을 하면서 500년이나 살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씨들이 똑같은 자랑을 하면서 500년이나 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TK출신이라는 말이 아주 공개적으로 언론에 오르내려서 TK출신들이 굉장히 괜찮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되니까 고소영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나는 아무 공로가 없는데도 역사 환경에 따라서 생기는 자랑거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공연히 불이익을 당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고향 사람이 출세를 하면 나도 공연히 출세한 것 같은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자랑거리가 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자기의 즐거운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저는 7년 전에 우리교회 처음 왔을 때 취임식을 하니까 교인들이 취임 선물이라고 저에게 선물 하나 주셨는데 시계입니다. 

이 시계 하나를 저에게 취임 선물로 교회가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시계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무 거나 시간만 맞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교회에서 주신 시계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주 굉장히 좋은 시계더라고요. 그런데 평생 처음 이렇게 좋은 시계를 차면서 좋기는 하지만 저는 이 시계를 찬 후에 신체적으로 병이 하나 생겼습니다. 골치가 많이 아픕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이며 “아이고! 골치야.” 이럽니다. 자랑감이 많은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는 자랑감이 많은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 사람의 자랑거리를 한번 들어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유대 민족은 할례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의 차이를 사람과 짐승으로 봅니다. 여러분, 성경에 다윗이 골리앗 앞에 전쟁하러 나갈 때 하는 말을 기억하시죠? “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할례도 못 받은 사람이 어떻게 할례 받은 사람 앞에 나타나서 큰 소리를 치고 그러느냐?”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할례를 받았어도 차이가 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받은 사람이 있고 할례 기회를 놓쳐 13년 만에 받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고 이방인 개종자가 연령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받는 할례가 있습니다. 

난지 8일 만에 할례 받은 사람이 정통 할례자입니다. 그래서 8일 할례자는 그 사회에서 큰 자랑거리, 우월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겁니다. “나는 8일 할례자입니다.” 그러면 누구도 그 사람을 무시 못 하는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는 베냐민 지파요”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문 자랑입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일명 왕 지파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날 때부터 왕 같은 특권 계급으로 취급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왕손이요”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왕 지파에서 내가 나왔소.” 우리 문화도 조상 내세우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이 생긴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이 하나 나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피가 섞이지 아니한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이요” 이것도 무시 못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컸느냐 하면 복음서를 쓸 때 마태복음의 기자가 1장 1절에 예수님을 소개할 때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님을 소개하려면 아브라함을 끌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 조상을 이야기해야만 권위가 있기 때문에 성경에도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자랑입니까? 그 다음에 “나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특권층의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나라에서 바리새인 계급은 누구도 그 앞에 신앙적 자랑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특권 의식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별 요상한 질문을 다해가면서 괴롭혔는지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은 바로 그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다음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인정을 받으려면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으로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던 특권층 바리새인 신자요” 그 사회에서는 이 사울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은 떠오르는 화성과 같이 바라보이던 인물입니다. 여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최고 권위의 율법학교를 졸업한 내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 모든지 그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데다가 산헤드린 공의회 최고 정치인이었습니다. 

나이가 제일 어린 국회의원 아니면 국무장관이었습니다. 공의회 회원 72명 중 제일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울은 그 당시에 최고의 출세 가도를 달리는, 누구도 그 사람과 비교해서 당해낼게 없는 그런 사람이었고 세상 말로 말하면 행운아 중에 행운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이 만약 자랑거리가 있다면 나도 자랑을 할 테니”하고 말하는데 “비교해 보자.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나와 봐라.” 그러는 겁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오늘 성경말씀에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 좋은 것들을 내가 배설물로 여기겠다.” 배설물이 뭐죠? 똥입니다. 오물입니다. “냄새가 나서 코를 틀어막는 똥과 같이 내가 내버리겠다.”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지금 삶의 가치관이라는 것이 완전히 뒤바뀌어서 전에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정반대 방향으로 자기의 삶을 조절해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 해가고 있고 분명히 나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들의 믿음은 자신의 성취 목표를 향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 선한 목표를 이렇게 정했는데 내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지 아니하오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기어코 그 자리에 그 성취를 이루게 해 주시옵소서. 나는 이것도 절대 나쁘지 아니한 좋은 신앙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삶의 가치는 아주 차원이 높습니다. 내가 어떤 목표를 정하고 내 개인적 가고자 하는 길을 가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가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 길을 내가 가고자 하는 겁니다. 차원이 높잖아요? 

그래서 자기 삶의 오직 한 가지 목표가 있는데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자체로 정해놓고 그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인생으로서 자기 발견! “나는 이것을 위해 사는 것이다.” 자기 선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리는 삶을 지금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일이 있다면 그 인간적인 자랑거리는 당연히 내가 내어버리고 절대로 두 주인은 섬기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라고 결정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 비유 가운데 열 처녀 비유가 있죠?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한 성경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란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과 같아야 된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예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게 하나 있죠? 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향한 신랑의 마음이라 하지 않고 신랑을 향한 신부의 마음이라 했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 마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신랑을 향한 신부의 마음이 훨씬 더 간절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여기 남성들의 마음과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삶의 어떤 노선과 최우선권이 자기 성취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취를 목표로 정하고 가는 길에 사랑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것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남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세상을 정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목표가 우선이다.’ 이것에 더 우선권을 두고 생각ㅎ삽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서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여성의 본능입니다. 

우리 세상 역사에서 보세요. 낙랑의 태수 최리의 딸을 보시면 원수의 나라인 호동왕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국가적인 비밀인 자기 나라 자명고를 칼로 찢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자기가 호동왕자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해도 괜찮다. 나는 그이만 사랑하면 된다.’ 이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평강공주를 보세요. 바보 온달을 사랑하기 위해서 공주의 자리를 떠나서 스스로 서민이 되어버리잖아요? 바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삶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지금 바울의 말은 우리가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저것도 좋은 것만 취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를 위해서 다른 것은 버릴 수 있을 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 진리요 가치라고 말하는 겁니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고담 가운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딸을 시집을 보내려 하는데 두 군데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동쪽에 있는 집은 대단히 부잣집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몸이 약합니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을까?’ 아버지가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서쪽에 있는 집은 신랑은 천하장사 건강한데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어디로 보내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들은 딸이 말하기를 “동가식서가숙” 하겠습니다. “밥은 부잣집인 동쪽에 가서 먹고 잠은 천하장사인 서쪽에 가서 자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에 더 가치를 두는 겁니까? 남자와 여자의 생각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셨죠? 우리 남자들을 어느 유행가 가수가 노래로 잘 불렀습니다.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 아아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그런 노래가 있죠? 남자들의 마음을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괴로운 사람이 생깁니다. 뭐냐 하면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훌륭한 길 인줄 알면서도 마음에 이 가치관의 설정이 잘 안되어서 변화가 안 일어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가끔 예수 믿으면서도 고민스럽습니다. 어떤 때 고민스러우냐? 십자가 부분이 주어질 때입니다. 보세요. 십자가 없는 예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죄 많이 지어도 무한대로 용서해 주지요? 천국과 영생을 보장해 준다고 그랬죠? 회복의 은혜가 있죠? 희망이 있죠?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축복까지 약속했습니다. 예수님같이 좋은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주어질 때는 “아! 이것만은 내가 못하겠습니다.” 이 부분이 괴로운 겁니다. 그러면 이 삶의 가치관이 정리된 사람은 누군가? 바울과 같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남이 도저히 짊어질 수 없는 십자가를 자기에게 달라고, 그 일은 내가 하겠다고 십자가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사역하는지 보세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가치입니다. 변화되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려는 행복한 삶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찾다 보니까 이것이 가장 가치가 있고 훌륭하여서 그것을 하는 겁니다. 제 목회를 오래 해서 간증거리가 많죠? 제가 목회에서 일어났던 일과 간접적으로 내가 들은 두 가지를 소개하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갈 것입니다. 어느 날 평소에 잘 알지 못하던 젊은 부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미션스쿨 나와서 그때부터 하나님 잘 믿고 열심히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나옵니다.” “그럽니까?” “그런데 제 남편은 한 번도 교회 나온 적이 없습니다.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의사들 말이 살아날 확률은 5퍼센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도 ‘이것을 내가 받아들여야 되나?’ 그래서 마지막 목사님 노력을 통해서 세례라도 받고 하늘나라 갔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왔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병원에 가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이 환자에게 심장마비 때문에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심장 뛰는 맥박이 보통 사람이 100이라면 5퍼센트밖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이지 말아야지 잘못 움직였다가는 심장이 멈출 수 있는 환자이니 침대에 가만히 있어야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고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조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어휴! 큰일 났구나.’ 그런데 목사들은 사실 이런 경우가 제일 마음이 힘듭니다. 왜냐하면 5퍼센트밖에 살아날 확률이 없다고 의사들이 과학적으로 판단한 환자에게 가서 어떻게 잘못하다가 죽게 되면 목사가 심방 온 다음에 죽었다고 부담도 되고…. 그런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나야 기쁘고 권위도 서는데 ‘어휴! 이걸 어떡하나?’ 그러나 교인들이 심방 요청하면 목사는 어떤 자리에도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한국의 대기업에서 미국으로 출장 근무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갔고 목사라는 사람을 처음 가깝게 만나는 겁니다. “제가 목사입니다. 실례 안 되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꼼짝하지 말라고 해서 이대로 있겠습니다.” “네, 가만히 계십시오.” 움직이다 죽으면 나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면서 목사는 어디 가든지 예배드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데 병원이지만 잠깐 내가 예배드려도 마음에 큰 부담이 없겠냐고 물어보니 “그러십시오.” ‘아! 됐다.’ 그래서 성경책을 펴고 성경을 읽어주고 설교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환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겁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겁니다. ‘이야!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다.’ 안심을 하고 기쁜 맘으로, 그때부터 제 마음이 기뻐지기 시작하고 ‘이제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그러면 내가 또 들를 테니까 기도 열심히 할 테니 조용히 계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병원을 나오는데 그 아내가 배웅을 하러 따라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환자복 입은 채로 슬리퍼를 신고 나를 따라 나오는 겁니다. “아니, 왜 이러세요?” 움직이면 죽는다고 했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환자복을 입고 주차장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막 가슴이 떨리는데 목사 따라 나왔다가 죽을까봐 ‘이거 어떡하지?’ 그 일이 지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건강하게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건강해지니까 한국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동안 많이 수고했다. 몸도 건강해졌으니 본국으로 귀국하라.” 

그런데 승진 발령으로 더 좋은 자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축하 인사 받느라고, 건강해지고 예수 믿고 승진 발령 나고 싱글벙글…. 그런데 사표를 내버렸습니다. “이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 “왜?” “목사님, 분명히 좋은 자리입니다. 나도 그 자리 가고 싶어서 참 열심히 했고 그렇습니다. 내가 인정받아서 잘 살게 되었고 그 자리 가면 돈 많이 생기고 틀림없이 부자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기업에 대해서 이런 자리 잘 모르시겠지만 그 자리 가면 신앙생활 잘 못합니다. 외국에서 오는 바이어들을 날마다 접대하고 그래야 되는데 신앙생활 절대 못합니다. 떠나겠습니다.” 

사표를 집어던지고 “괜찮습니다.” “아니, 그러면 뭘 먹고 살아요?” “괜찮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하시며 잘 사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한국 신문에 톱뉴스로 “한국 모기업 간부 일행 전용기 타고 가다 추락 전원 사망” 신문에 톱뉴스로 났습니다. “목사님! 이거 보세요. 이 자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따르는 거 손해 안 납니다. 사는 길입니다. 괜히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지 고린도후서 4장에 뭐라고 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가치를 말했을 때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래서 바울과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든지 아무 소리도 안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기뻐하실 것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 이 하나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져 버리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바울 사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설교하는 겁니다. 

이것은 또 제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간접 경험인데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6·25동란 때 북한 인민군들이 와서 쫓겨 갈 때 동네마다 쓸 만한 사람을 전부 납북시켰습니다. 끌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따라간 사람이 많습니다. 육촌형도 그때 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이 동네에서도 그때 쓸 만한 젊은이들이 다 따라갔습니다. 왜? 안 따라갈 수가 있나요? 죽이려고 하는데요. 

지금 남북이산가족들 북한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거의 90퍼센트입니다. 이 목사님도 거기에 끌려서 북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쯤 가더니 인민군 젊은 장교가 부하 몇 사람들을 데리고 총을 들고 그 마을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는데 별안간 미친개가 날뛰듯 욕설을 퍼붓고 온갖 발광을 다 하는 겁니다. “야! 너희들 중에 예수 믿는 반동 아새끼 있지? 나오라우! 그따위 새끼들 우리 인민 공화국에 데리고 가봤자 다 쓸데없다. 방해꾼들이다. 그러니까 그놈들 안 데리고 가겠다.” 그래서 “빨리 나오라우! 너희들 날마다 천당 가려고 하지? 오늘 내가 가게 해 주갔소. 순교자 내가 만들어 주갔소. 빨리 나와! 안 나와? 이거 다 거짓말쟁이들이구나! 천국 가기 싫으니? 예수 많이 믿잖니?” 막 미친개가 날뛰듯 야단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목사요.” “하하하! 그렇지? 내가 당신 보고 그럴 거 같아서 이렇게 했소. 이리 오라우!” 막 총으로 얼굴을 때리니까 피가 터져서 쓰러지게 된 겁니다. 그러더니 “이 놈은 내가 즉결 처분해야 돼. 이리 오라우! 너희들 여기서 잘 지키고 있으라우.” 목사를 개 패듯 패서 질질 끌고 산모퉁이로 돌아갔어요. 총 소리가 요란하게 5~6발이 나고 그 목사는 거기서 죽고 이 인민군 장교는 시뻘건 얼굴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이 인민군 장교는 산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아까부터 목사님이 목사일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납북 인사 전원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 사람들 다 죽여야 됩니다. 안 그렇게 되면 내가 죽습니다. 목사님 살려드리는 길이 이 길 밖에 없어서 이렇게 했습니다. 목사님! 빨리 도망가시고 부디 몸 건강하게 주님의 일 많이 하십시오. 빨리 가세요.” 그래서 살아난 목사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때 그 일 때문에 평생 부흥회 설교하시고 지금도 잘 살고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가치관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교회 다니면서 기쁨이 없는 겁니다. 날마다 불평스럽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길을 가지 않고 주님이 원하는 길에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렇게 가치 있다고 평가했던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삶의 기준이 설 때 비로소 그 사람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오늘 우리가 35장 찬송을 불렀잖아요? 예수 믿는 것이 죽는 것 같지만 사는 길이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를 인도하셨네 크신 사랑 찬양하리 나의 주 찬양하리” 내가 반주 없이 이만큼 부르는 게 얼마나 잘하는 겁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복되신 겁니다. 그래서 죽는 것 같지만 사는 길이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해 지는 것이요 이렇게 파라독스적 진리를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울 같지는 못해도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신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역사하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던 사람들은 다 그러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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