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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화목하라 (막 9: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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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화목하라 (막 9:38~50)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은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가버렸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았지만 역시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게 되었을 때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그렇다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면 사마리아 사람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승객 중 누구 하나가 잘못해서 철길로 떨어졌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보고 철길로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런 장면을 우리가 보았다면 과연 우리 중 그리로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겠습니까? 아마 어쩌면 어어 어어 하고 비명만 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쩌면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있냐고 하겠습니까? 경우야 다르겠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 서슴없이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주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을 대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같은 수고를 하여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할 때는 좀 시원찮게 해도 잘 했다고 정말 수고 많았다고 하지만 별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할 때는 그것도 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또 같은 일을 해도 그렇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 안에 바로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일하는 것을 보고 잘 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 비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일하는 것을 볼 때 더욱 더 칭찬을 아까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 지금 요한이 꼭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자기들은 어떻습니까? 실상 자기들도 하지 못하는 일이 아닙니까? 내가 못하는 일 남이 한다고 해서 안 될 것 있나요? 아니 우리 교회가 못하는 일 다른 교회에서 하면 안 되는 건가요? 

모든 것이 나와 친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법이 없습니다. 또 별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사람은 좋은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조금 흐리멍덩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잘 한 것은 잘 했다 일을 한다고는 했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는 수고가 참 많았다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하는 일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서 평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평가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찌 됐든 그 하는 일이 주를 위해서 한다고 할 때는 더욱 그 수고하는 모든 수고에 대해 격려와 칭찬을 아까지 말아야 하고 수고하는 분들이 더욱 힘을 내서 수고할 수 있도록 때로는 힘도 합하고 뒷받침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속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못하는 일인데 다른 제자들 역시 아직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는데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니 이거 자존심 상해서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금하였다고 하지만 그럼 그러기 전에 예수님의 뜻을 먼저 알아보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뜻은 상관하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너희는 우리와 한 편이 아니니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 아주 으쓱대며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 잘했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수고한 사람이 나를 금방 욕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이름의 권세가 어떠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보통은 두려워서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비록 예수는 따르지 않지만 그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이건 아직 제자들조차도 갖고 있지 못했던 믿음입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신 모습을 함께 동행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목격을 합니다. 

그곳에 나타나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던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산 밑이 떠들썩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그리고는 귀신을 꾸짖습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 가운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는 것은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만큼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의 사람이요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람을 그 누가 막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찬가지로 오늘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이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냐 아니냐, 나와 가까운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지기에 앞서서 그 수고하는 모든 수고를 알아주어야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우며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오도록 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모든 친절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거니와 우리의 모든 섬김과 격려와 베푸는 친절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100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물 한 잔만 주어도 받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주의 일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이들을 섬기며 대접할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급을 주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내가 섬기는 그 섬김대로 나도 섬김을 받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요 내가 대접한 것 이상으로 나도 대접받게 하시며 물질로 섬긴 것 이상으로 물질로 섬김 받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대로 주의 일을 위해 수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기쁨으로 섬겨나감으로 더 신이 나서 주의 일에 힘쓰도록 도울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복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상급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써 수고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나는 열심을 다하지만 그런 나의 실족하는 모습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손으로 하는 범죄란 무엇입니까? 손으로 누구를 친다든가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것도 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본다면 여기 모든 범죄가 다 마찬가지로 내가 저지른 쪽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데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한 쪽에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연약하고 부족해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가 있을 때 그들이 넘어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어야 하는데 붙잡아주지 못한 것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 역시 능력이 부족해서 붙잡아주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흩어 구제하고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했고 네 주위에 없는 자가 있거든 그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주지 못한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마땅히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데 그저 내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과 더불어 내가 힘들 때는 나를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민 손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잡아주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손이 나를 죄 짓게 하는 것들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 짓게 만드는 손을 찍어 버리고 장애인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온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이 말은 그러니까 찍어버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렇게 섬기는 일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이 죄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건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지 않고 다른 곳을 찾는 것이 그 첫째가 되겠습니다. 마땅히 예배 시간에 교회를 향해야 할 발로 다른 곳을 찾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곧 발이 죄 짓게 하는 것이요 마땅히 도움이 필요할 곳을 찾아가야 하는데 찾아가지 않는 것, 마땅히 연약한 자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돌아보지 않는 것을 또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눈이 죄 짓게 하는 것 역시 같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마땅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한다면 그것이 곧 눈이 죄 짓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가 되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냐고 성경 기자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기보다는 내가 해결하려고 하고 누군가 나를 도울 자가 어디 있겠나 하고 엉뚱한 데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눈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 그래서 보잘 것 없고 가난하고 추하고 더러운 자를 찾아 눈길을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있는 사람 갖춰진 사람만을 행해 눈길을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을 향해 우리의 눈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바로 그런 나를 향해 눈을 들어 나를 보시고 나를 불러 자녀삼아 주셨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데 손이나 발이나 눈은 잘라내거나 빼버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럼 우리 마음은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이 죄 짓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내 마음이 주님만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고 주님의 영광만으로 가득해야 하고 주님의 은혜만으로 가득해야 하며 주님의 사랑만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로 내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가득히 주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어야 하고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져 있어야 되고 모든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미움과 시비하는 마음과 의심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면 그런 내 마음은 어떻게 무엇으로 끊어낼 수가 있겠습니까? 작은 일에도 금방 실망하고 또는 흥분하기도 하며 속상해 하기도 하고 잠시 해가 비치는가 했더니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손과 발과 눈이 죄 짓게 하는 것 역시 결국은 우리 마음 아닙니까? 손과 발과 눈은 단지 마음의 앞잡이 일 뿐이죠. 그러기에 해결책은 우리 마음을 죽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마음이 죽을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또 한 번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죽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접근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잘 들어보세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죽여야 한다고 죽으라고 몸부림을 쳤으니 괜한 헛수고만 한 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있는 나는 더 이상 지난 내가 아닙니다. 이제는 내 마음도 내 마음이 아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각대로 살면 됩니다. 그 주님의 생각이 바로 “우리 안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야 말로 소금된 우리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소금은 그 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맛을 잃지 않으려면 맛을 내려면 소금 자기가 녹아져야 합니다.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로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죄 가운데 있을 때 나를 보셨습니다.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님 안에서 우리 역시 그 누구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 성 우물가를 찾아가셨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 성에 사는 상처받은 여인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사람의 눈길을 피하여 뜨거운 한낮에 우물을 찾았던 여인을 주님이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 여인이 동네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던 여인 율법대로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자 그에게도 주님은 친절을 베푸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로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이도록 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지만 그 누구도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여 찾아보았지만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과연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는 죄 없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 모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가고 여인만 남겨졌을 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결국 이 여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충실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는 사람까지도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래야 나 또한 주님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손을 내밀면 됩니다. 친절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손을 잡아주면 됩니다.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하는 세리를 주님이 칭찬하듯 그렇게 감싸주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나 역시 그러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우리 가운데 하나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신 대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맛이요 우리를 불러주신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입니다. 이제 주 안에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랍비에게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화목과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형제우애를 강조하면서 격려하며 살 것을 권면했습니다. 어느 날 밤. 가족이 잠들 무렵, 한 아들이 랍비에게 와서는 

“아버지. 다른 형제들은 잠만 자는데 저는 자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얘야,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형제의 흉을 보는 것보다 다른 형제와 같이 자는 편이 훨씬 나은 거란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예수님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받아들이실 때 무엇을 보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니 사실은 그 믿음마저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주 안에 머물 수 있는 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또한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자들을 향해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믿은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들 안에 있는 예수님 역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서로 화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 가운데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비결입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 가운데 지옥 백성은 하나도 없이 다 천국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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