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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롬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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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롬 4:1~12) 
  

25세 된 한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8시간을 기어올랐습니다. 그 빌딩의 높이가 433M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입니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쳐다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방송국 헬기가 떠다니면서 그것을 생중계했습니다. 그 빌딩은 바로 시카고의 110층짜리 ‘씨워즈 타워’라고 하는 빌딩입니다. 이 청년은 50Kg의 등산장비를 등에 매었고, 시속 40Km의 강풍과 싸우면서 그 110층 정상에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 이 빌딩 벽을 오른다는 것은 거의 말도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생명 걸고 하는 것입니다.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110층 꼭대기 옥상에 딱 다다랐을 때 불행하게도 그를 기다리던 것을 꽃다발이 아니었습니다. 신문기자의 인터뷰가 아니었습니다. 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현상수배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높은 정상에 올랐지만 그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결국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재물을 통해서 세상의 정상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학문을 통해서, 어떤 권력을 통해서 세상의 정상에 오르기를 원하지만 그에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시 그는 끌어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인간의 문제, 인생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제가 로마서 강해를 계속 하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로마서 강해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그래서 “끝날 때까지 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는 계속해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이 지은 죄에 대한 목록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유대인들도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죄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에 빠른지라.”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하나 뽑으라면 로마서 3장 23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말씀인데 함께 성경을 찾아 읽어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원래의 형상을 이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했을 때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죄로 더러워졌습니다. 죄로 그 본심이 얼룩져버렸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역사가 흘러 오늘에도 동일합니다. 역시 인간의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죄를 해결하는 데에서부터 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죄를 해결할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만 할 뿐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을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한계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은 율법을 가리켜서 ‘몽학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정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 “이것은 착한 것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야.” 선악을 구분시켜 줍니다.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이것은 해도 괜찮아.” 죄인 것을 죄로 깨닫게는 해 주지만 문제는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뿌리박힌 죄의 뿌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할 능력이 율법에는 없습니다.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한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길입니다.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심으로 그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길이 열려졌습니다. 이것은 바로 은혜로 주어진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 의인 것입니다.

이것을 또 사도바울은 뭐라고 설명하는지 봅시다. 로마서 3장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안 됩니다.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의롭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잘못한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의 지갑에서 돈을 만원을 훔쳤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엄마의 눈을 똑바로 못 쳐다봅니다. 엄마의 눈이 무섭습니다. 자기 마음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이렇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숲 속에 들어가 숨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관계, 의롭다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관계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까지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중요한 진리를 반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진리를 한번 말하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계속 반복합니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할까봐, 우리가 워낙 건망증이 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반복해서 4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셨고, 그 피가 나의 죄를 씻으셨고, 그리고 그분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을 믿는 것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믿기만 된다고 하니 어떤 분들은 ‘그거 너무 시시하지 않나? 좀 더 힘든 것 없나? 뭐 구원을 받으려면 적어도 사법고시 정도는 통과할 정도는 되어야지, 40일 금식기도 정도 해야 된다거나, 헌금을 1억씩을 해야 된다거나 이러면 좀 해볼 만 할 텐데 너무 쉽지 않나?’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길은 너무 쉽습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의심이 많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길로 행로를 찾아가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행로가 자기들이 마음하고 안 맞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상하면 불평하고 불순분자가 됩니다. 계속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길로 하나님이 인도해 가신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셔서 심판을 내리시는데 불 뱀을 내리셨습니다. 무서운 독사 같은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했습니다. 

이 뱀에 물린 자들은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리로 만든 뱀. 놋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은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불 뱀이라는 것은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창세기에 나오는 뱀으로 위장한 사탄 마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그 뱀에 물리듯이 불 뱀에 물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 그 놋뱀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의 길이 열려졌고, 이 뱀에게 물린 상처가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던 백성들은 너무 쉽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며 되는데 대부분이 못 바라봅니다. ‘말도 안 돼. 불 뱀에 물렸는데 약을 발라야지, 어떻게 저 구리 뱀을 쳐다본다고 치료가 돼. 말도 안 돼.’ 그들은 멸망당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많은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의 축복에 들어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박사학위 가진 사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재벌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귀천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주 예수를 부르는 자마다 구원받는 길이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넓습니다. 좁은 길 같지만 넓은 길입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 길은 좁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자기부정의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저가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은 아주 넓고 쉽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너무 넓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어렵게 느낍니다.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길은 단순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이 간단한 진리를 4장에서 또 한 번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2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또 다른 하나는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설교할 때도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나서 거기에 대한 예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좋은 예화라던가, 간증이라든가, 실화를 설명할 때 그것이 더욱 구체화되고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설명한 후에 2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첫째가 아브라함이고 둘째가 다윗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다윗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시작하고 있고, 이어서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한 책의 1장 1절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한 메시아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도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로마서 4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육신적으로 조상된 아브라함의 예를 한 번 들어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면 그는 자랑할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행위로 아브라함이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들어갔는데 그 가나안 땅에 기근이 왔습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하나님의 음성도 듣기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서 결국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자기 생명이 위험해서 자기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도 흠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그의 행위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공로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업적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것을 사도바울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아주 좋은 예를 사도바울은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가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15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나가라. 그리고 내가 네게 자식을 줄 것이다. 그리고 자녀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5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나이가 이렇게 많은데 왜 자녀를 안 주십니까? 그러면 내 청지기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내 상속자로 삼을까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에게 아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문 밖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브라함아! 저 하늘의 별을 봐라! 저 하늘의 별을 세어 봐라.” 아브라함이 별을 셉니다. 하지만 너무 많아서 세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별만큼 너의 후손이 번성할 것이다.”

놀라운 소식은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은데, 자기 자식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진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는 아멘이라고 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부흥강사님이 오셨는데 아멘 안 하면 실망하실 거예요. 아멘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황수관 박사의 말에 따르면 아멘은 보약입니다. 약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살찌게 하고 영혼이 풍성하게 만드는 약이 바로 아멘 약입니다. 그래서 아멘만 잘 해도 그 사람은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늘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멘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별이 더 많을까요? 바닷가의 모래알 수가 더 많을까요? 하늘의 별이 훨씬 많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동해안에 가서 삽으로 한 삽 퍼서 모래알을 세어보십시오. 일생을 세어도 못 샐 거 같은데 하늘의 별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주는 가도 가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 하나님을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고도 안 믿는다면 바보 같은 것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온 우주가 끝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별의 숫자가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습니다. 셀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그 믿음이 더 훌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러한 놀라운 응답을 주실 때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목이 안 좋아서 걱정을 많이 하고 교우님들도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셨습니다. 지난 주간 갈멜산기도원에 가서 집회를 가게 되었는데 사실 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번 기도원에 가서 부흥회 인도하는데 목 때문에 전혀 고생하지 않을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마음속으로는 인간적으로 의심이 되었지만 ‘아멘’ 했습니다. 가서 7번 설교를 했는데 한 번도 목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습니다. 

목이 지금 안 좋은데 아멘하고 받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목을 다 치료하셨다. 내 목은 다 나았다. 하나님이 치료하셨다. 온전케 하셨다.” 선언했더니 7번 설교하는 동안 한 번도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주시는 음성을 아멘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적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의심이 됩니다. 하지만 그때 아멘으로 받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로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가 좋아서, 공로를 많이 쌓아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행위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그가 믿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멘으로 믿을 때 그가 의롭다하심을 얻고, 그가 구원받은 백성이 되고 믿음의 조상이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책을 지은 ‘멀린 캘러더스’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아주 유명한 공수부대 대원이었는데 제대하고 나서 아주 타락한 삶을 삽니다. 사기도 치고, 나쁜 짓도 하고 감옥도 들어가게 됩니다. 한 번 감옥에 들어가 살다가 가석방을 받아서 한 일주일 동안 나오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 되어서 다시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들어가기 싫고 해서 형무소장을 찾아가서 며칠만 더 있다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형무소장이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당신은 이번에 특사로 사면을 받았으니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이분이 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예수를 믿고 나니 그것이 바로 우리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공로 때문에 우리 죄가 이미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의 백성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 본문 4장 4절, 5절 말씀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삯을 받는 자에게는 그것이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도원 품꾼이 필요해서 주인이 시장에 가서 일할 사람들을 구합니다. 아침 6시에 가서 사람들을 구하고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결정하고 포도원에 보냅니다. 아침 9시 나가서 또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12시에 가서 또 데리고 옵니다. 오후 3시, 오후 5시에 나가서 또 데리고 옵니다. 

6시가 되니 이제 해가 저물어 가고 모두에게 임금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은 1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줄까?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니까 10분의 1울 줄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1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일을 조금밖에 안 했는데 10시간 일한 삯을 그냥 주인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 6시부터 와서 저녁까지 일한 사람은 1데나리온을 받을 때 그는 보수로 일한 만큼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행위와 공로가 훌륭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죄를 이미 십자가에서 해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치를 모든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하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예입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한 번 읽어봅시다. 본문 6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는 수고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입니까?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32편 1절 이하의 말씀을 사도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입니다. 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성군입니다. 그러나 그도 연약한 때가 있습니다. 전쟁 중인데 그는 목욕하는 한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를 데려다가 동침해 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우리야 장군을 후방으로 소환해서 아내와 동침하도록 유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야 장군은 정말 훌륭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동료들을 전쟁터에 두고 아내와 편안히 잘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명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 깊숙이 보내서 적군에 의해 죽도록 함정을 팠습니다. 결국 그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단이 와서 다윗에게 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왕이시여! 한 마을에 아주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양 때가 수백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암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 암양을 자기 가족처럼, 새끼처럼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잣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부자는 손님을 대접하려는데 자기 양을 잡자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보내어 가난한 사람의 양 한 마리를 빼앗아 오게 했습니다. 빼앗아다가 그것을 잡아 대접하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그런 나쁜 놈이 있나? 그 놈을 당장 죽여라.”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가가 다윗을 향해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린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에게는 많은 후궁이 있지만 우리야의 하나밖에 없는 아내를 빼앗아서 당신의 아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경고 앞에 무릎을 꿇고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 “내가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그가 회개합니다. 

여호와 앞에 “하나님이여! 나는 여호와 앞에 범죄하였나이다.” 그가 회개하였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죽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 이 놀라운 선언을 듣는 순간 다윗은 너무 좋아서 시를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32편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죄가 용서받는 사람, 죄가 가리워지는 사람, 그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목욕탕에 불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 목욕탕에서 나온 분들이 목욕탕 하다가 급히 나왔기 때문에 벌거벗고 뛰어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구경거리라고 볼 수 있지만 누군가 모포를 가져다가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 덮어줍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TV에 보면 잘못한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나옵니다. 

자기 얼굴을 못 내밉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모습을 누군가 덮어주고 가려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다윗이 말하고 있는 행복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림을 받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행복은 다른 데서 오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것입니다. 출세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가려지고 죄가 용서받은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미국의 한 교사가 자기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 법정시효가 30년인데, 30년이 되기 딱 나흘 전에 법정에 출두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교사는 30년 전에 반전 운동을 하던 운동권 여학생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베트남에 군인들을 많이 파병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그곳에 가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과격하게 벌이다가 학교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도망을 다니면서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교사가 됩니다. 너무 너무 훌륭한 교사가 되었습니다. 상도 많이 받고 인정받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가 지은 죄 때문입니다. 그 죄가 그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은 받지만 그 마음의 괴로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 죄 때문에.

결국 그는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받는데 그 상담자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교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너무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 주셔서 당신을 위해 대신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고 그 마음에 평안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 출두했습니다. 나흘만 참으면 되는데. 그리고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기자가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자신 앞에 떳떳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너무 행복합니다.”

여러분! 죄를 자백하는 자, 그리고 죄가 가리움 받고 용서받는 자가 진정 행복한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이 행복해지고 잘되는 길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말합니다. 또 ‘이신득의’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서 우리는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4장 3절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그가 구원받았고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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