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언약의 성취 (수 4:1~9)

  • 잡초 잡초
  • 346
  • 0

첨부 1


언약의 성취 (수 4:1~9)

 
내 용 

우리 경험 가운데 아주 어렵고 곤란한 일은 어떤 약속을 하고 그것을 취소할 때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늘 경험합니다. 그럴 때 겪는 피차간에 마음 정리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고 관계성이 아주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인 것도 그렇지만 국가에도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정부의 세종시 문제도 이런 종류에 속합니다. 일단 약속을 했는데 그것을 번복케 되는 어려움을 겪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영토권 분쟁으로 가장 오래 가는 곳이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나라 땅입니다. 이 땅의 영토권 분쟁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됩니다. 요즘 언론을 통해서 또다시 큰 마찰이 일어날 것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주거지역을 확장한다고 발표해서 전쟁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옛날에는 이 지구는 임자 없는 땅이었습니다. 몰려다니는 부족들이 아무데나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 땅은 우리 땅이라 하면 우리 것이 되는 역사를 인류가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임자가 분명치 않은 땅이 있습니다. 많습니다. 북극이나 남극은 여러 나라에서 연구팀을 보낸 정도이지 임자가 없습니다. 영토권이 확장되지 않은 땅입니다. 

요즘에 미국은 달에서 물이 발견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물이 있으면 산소만 공급하면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마 미국은 달을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지도 모릅니다. 미국같이 넓고 좋은 땅도 임자가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불과 몇 백 년밖에 안됩니다. 임자 없는 땅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 땅 주인은 정말 누구인가?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장입니다. 

“이 땅은 영토권이 확장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주셨다. 역사적으로 문서가 확실하지 않느냐? 성경에 있지 않느냐? 무슨 잔소리가 많으냐? 이 땅은 우리 땅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종족들은 “너희 아브라함이 잠시 여기서 살다가 야곱 때에 애굽으로 가서 430년이나 살았다. 그 동안에 이 가나안 땅은 정착민들이 확실하게 영토권을 확정했는데 430년 만에 이 땅이 너희들 땅이라고 침략을 해오면 그게 맞는 말이냐? 말도 안 된다. 이것은 우리 땅이다.” 그래서 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아브라함 혈통적 후손들과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성경말씀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종족간의 전쟁기록 역사이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정착이 훌륭하게 잘 이루어진 상황 설명을 자세히 했는데, 오늘 그 마감하는 말을 성경에서 본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성취의 마지막 장애물인 요단강을 건너서 그 기쁨의 기념 돌비를 세운 장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 신앙 현장에 도움을 준다고 봅니다. 이 사건들은 먼저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입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충격이 닥쳐왔습니다. 그 충격이란 모세가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마 세계무대에 나타났던 그 많은 민중 지도자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 있다면 저는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긴 시간, 가장 나이가 많은 80세에서 120세, 40년의 긴 시간을 가장 많은 악 조건 가운데서, 또 가장 많은 적들과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정착시켰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지도자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가 그토록 능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기록만이 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도움을 받는 지도자 한 사람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가장 큰 어려움이 닥친 것입니다. 더군다나 더 어려운 일은 이제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일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뭐냐?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성을 쳐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는 목표지점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모세가 죽었습니다. 더군다나 여리고성을 견고하게 지키는 부족들이 매우 강하게 항전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모세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롭게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 대신 후계자 하나를 세우셨는데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런데 이 후계자는 지금 어렵고 힘이 듭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늘 경험을 합니다. 세상에 힘든 일이 후계자가 되는 일입니다. 저도 후계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자리에 후임자가 와서 목회를 했는데 뭐가 어려워졌다는 고난스러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제가 그 분을 만났습니다. 날 만나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제에게 “아무래도 목사님이 다시 오셔야 되겠습니다. 

목사님 후임자 정말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실 제가 인정할 만한 것은 이 후임자는 아무리 잘해도 빛이 잘 안 납니다. 먼저 사람이 다 해놓은 것이라고 민중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상 유지 정도는 아무 일도 안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매사에 하는 일을 먼저 사람과 비교합니다. “이 목사님이 이렇게 목회하셨지만 나는 사람 자체가 이렇게 다른데 목사님 하는 일과 내가 한 일을 날마다 비교해서 말을 하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너만 그러냐? 나도 그렇다.’ 또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있어서 과거를 더 많이 집착합니다. 어떤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잘못 하면 본전도 못 건지게 됩니다. 그래서 후계자는 선임자보다 일의 능률이 배나 많아져야 현상 유지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잖아요? 엘리야가 한 엄청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하나님께 기도를 뭐라고 합니까? “갑절의 영광을 내게 주옵소서. 엘리야보다 갑절이나 되어야 현상 유지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주셔서 엘리사가 후계자 사역을 훌륭하게 해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여호수아에게 이런 약속을 해주심으로 일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여호수아는 지나간 40년 동안 모세의 곁에서 조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을 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똑같이 내가 너에게 하겠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자신감이 생긴 겁니다. ‘아! 그러면 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떻게 행하신 것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넉넉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해야 할 몇 가지 조건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과정에는 조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이것은 네 몫이다. 그게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나의 믿음이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몫입니다. 여러분! 어느 공동체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 지도자가 마음이 약해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면 그 조직은 무너집니다. 최고의 지도자는 아주 강하고 담대한 철학을 가지고 분명한 방향 제시를 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벌써 무너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마음을 약하게 가지면 약한 사람이 되고 강하게 가지면 강한 사람이 되고 나쁜 마음을 가지면 나쁜 사람이 되고 착한 마음을 가지면 착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강하게 해야 되겠습니까?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또 대답을 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행하라. 이것이 무기다.” 그래서 두 가지 여호수아의 몫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날마다 읽고 묵상하는 것! “이것을 무기로 가지고 싸우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이 승리한 결론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군인에 비교하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군인은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존재입니다.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훈련을 마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을 내놓고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특전사, 해병대, 특공대에 세례를 주러 다 다녔습니다. 

사단장들 다 만나서 이야기하고 사병들하고 이야기하고 저는 세계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미국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공군사관학교를 우리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심방 다 가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훈련이 잘 된 군인들은 전쟁을 하고 싶어 합니다. “목사님! 세계에서 제일 강한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최고의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최고의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 언제 써보죠?” 그래서 웨스트포인트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해마다 조사합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세계 어디에 배치되기를 희망하느냐? 희망 배치 지역을 말하라.” 제일 많은 곳이 언제나 전쟁 일어날 수 있는 지역입니다. 거기 가면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겁니다. 안전한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의 희생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이 잘 산다고 하는 명분과 거기에 대한 훈련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군인들은 전쟁을 하고 싶어 합니다. 

사실 군인다운 군인은 이런 사람들이지 전쟁이 무서워서 살살 피하거나 한다면 그것은 군인 정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 군병들을 놓고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군인에 비교해서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이런 말씀을 줄줄이 했습니다. 여호수아 성경 1장을 보면 1절에서 9절까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이 6번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 몫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과 똑같이 너에게 할 것이지만 너의 책임은 모세와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으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선한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종족들도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한데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만을 사랑하여서 가나안 종족을 다 물리치라고 하고 그들에게 그 땅에 기어코 주시고자 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벗어나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 해결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이 됩니다. 노아는 세 아들이 있었죠? 셈과 함, 야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아들 가운데 함이 아버지의 저주를 받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유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한 죄 때문이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함의 후손들은 가나안 칠족이 되었습니다. 헷 족속, 아모리 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 족속, 브리스 족속, 여부스 족속, 블레셋 족속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롯의 두 딸과 낳은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 이런 족속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다 내쫓으라고 하셨는데 왜 내쫓으라 하셨는가? 이들의 종교는 바알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셨던 종교가 바알입니다. 이 바알 종교 때문에 야훼 종교가 무수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 종교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함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후손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버지 계열의 축복받은 셈의 후손이나 야벳의 후손과 정 반대의 길을 일부러 간 것입니다. “너희가 야훼 하나님을 믿느냐? 

우리는 절대 안 믿겠다. 너희는 하나님의 축복 받아서 잘 살아라. 우리는 정 반대의 길을 가겠다.” 그래서 다른 셈이나 야벳의 후손들이 믿는 하나님에 반감을 가지고 “하나님 믿고 축복받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우리는 정 반대로 가겠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 종교를 선택해서 다 그 길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 성지로 선택한 가나안 땅을,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서 나오셨잖아요? “몰아내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셈의 후손은 아담과 노아, 셈,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나중에 예수님까지 연결됩니다. 

이 가나안 족속들의 종교가 몇 가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몰렛 종교! 이 종교는 어린 아기를 잡아서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종교이고 다곤 신이라고 하는 것은 농작물 수호신으로 먹고 사는 것이 다 이 다곤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우상 숭배하는 신이고 바알은 생산의 신으로 여러 가지 이름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알브올, 바알세불, 바알림, 바알셈, 바알갓, 바알스본, 바알하솔, 바알헤르몬 다 바알의 이름들입니다. 

이 바알 신들은 다 남성 신들인데 반드시 부인을 데리고 사는 신입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아세라, 아스다롯 다 우상덩어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선택한 아브라함 때 벌써 결정한 인류 구원이 완성된 성지에서 이게 뭐하는 짓들이냐? 너희들이 이 사람들을 다 내쫓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성지로 가나안 땅을 만들라.”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도와주신 겁니다. 

그러한 바알들을 다 때려 부수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는 전 국토의 70퍼센트가 아무 쓸데없는 불모지로 되어 있습니다. 단지 북쪽 갈릴리 지방 이스르엘 평야 지대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먹고 삽니다. 예루살렘 근처에는 오직 여리고가 식량 생산이 가능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을 놓고 언제나 치열한 부족 간의 전투가 벌어져서 여리고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흙더미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토담 방식의 성곽이 옛날에는 전쟁을 위한 훌륭한 방어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려 부수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고 또, 요단강을 건너갈 순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이 요단강이 평소에는 우리 탄천만도 못한 조그만 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가야 할 시기가 되니까 비가 얼마나 왔는지 홍수에 강이 범람해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장애물이 지금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내가 방법을 줄 테니 이렇게 하라. 제사장들이 앞장서라.” 강물에 떠내려가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제사장 즉, 하나님의 종들을 앞세워라.” 

이런 위험한 일에 앞세우는 것은 위험이 배가 더합니다. 여기 소대장 지내신 분들 전쟁터에서 항상 앞장서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이 “어떻게 해야 이 요단강을 잘 건너갈 수가 있겠습니까?” “너희들이 먼저 나서라. 너희들이 먼저 건너가라. 그 대신 내가 방법을 하나 줄 터인데 하나님의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가라.” “아니, 홀몸으로 건너가도 떠내려가기 쉬운데 법궤까지 메고 어떻게 건너가란 말입니까?” “그렇게 해라.”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법궤를 어깨에 메고 많은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서니까 하나님께서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셔서 모두가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서 건너서 가나안 땅 정책이 이루어지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민주 국가에서는 어느 나라나 군목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라에서 다 경비 들여서 월급 주어가면서 합니다. 전쟁하는데 전쟁터에 목사가 뭐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합니다. 왜 하는 겁니까? 국가 예산이 얼마인데요? 필요 없는 것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종교편향이라고 왜 다른 종교는 이런 제도가 없는데 기독교만 유독 군목 제도를 국가 세금으로 이들을 먹여 살리면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그러나 못 없앱니다. 

설사 대통령이 다른 종교인일지라도 군목 제도는 민주국가에서 절대 못 없앱니다. 그러면 왜 하는 겁니까?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1967년도 이스라엘과 중동의 6일 전쟁! 이스라엘은 이 세상 전쟁 역사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큰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6일 만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자기나라 영토보다도 3배나 큰 땅을 6일 만에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전쟁 역사 기록을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수상이 얼마나 결정할 일이 많겠습니까?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방송국으로 달려가서 모든 방송을 중단하고 직접 시편 낭독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성경말씀을 예배 보는 것과 같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국가 군인들은 반드시 군목이 예배를 드리면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성경 전체 교훈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언약성취’입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발표하는 책이 여호수아 성경입니다. 전체 내용을 분해하면 1장에서 12장까지는 가나안 정복에 대한 전쟁 기록이요, 13장에서 21장까지 전쟁 승리 후의 땅 분배 기록이요, 22장에서 24장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여호수아의 설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마지막 영적 교훈은 가나안 땅이 뭐냐?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리고 마지막에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어려운 작업을 마침내 해내었는데 가나안 땅이 뭐냐? 가나안 땅이 뭡니까? 우리가 지금도 찬송으로 부릅니다.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 거기는 우리가 그냥 비행기 타고 가면 되잖아요? 

그 다음에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요단강에 가면 무슨 찬란한 집이 있습니까? 천국을 의미하는 겁니다. 가나안 땅은 영생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겁니다. 파란만장했던 광야 40년의 삶을 마치고 이제 하나님이 허락해주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피할 수 없는 요단강에 들어가야만 그 땅을 들어가게 되는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없는 이 세상의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 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영적 교훈이 이 가나안 땅의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사역 안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이 요단강 같은 장애 역사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평소에는 개울물 같아서 누구나 어린아이도 맨발 벗고 건너가던 강이 왜 이 사람들이 가야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범람해서 홍수가 났겠습니까? 그래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강을 너희들이 쉽게 건너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히 모른다. 

내가 건너게 해 주었다고 그렇게 믿어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너희들이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라고 하는 고난의 요단강을 피 흘리며 건넜기 때문에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요단강을 건너기가 너무 어려워서 겟세마네에서 고민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건너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믿음의 조상으로 확인되었습니까?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들을 어떻게 제물로 드리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어려운 요단강을 드리겠다고 모리아 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네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내가 아노라.” 하시고 그를 살려내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열국의 아비의 영적 축복을 그에게 내려주시는 축복을 보게 되잖아요? 야곱이 12지파 조상으로 이스라엘이 된 것은 얍복강에서 환도 뼈가 부러지도록 기도하고 그날 거기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천사와 씨름하던 그 밤이 지나갔기 때문에 영적 축복을 받아서 이스라엘 12지파 조상으로 남았습니다. 

우리 믿음이 그냥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시련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요단강의 시련을 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시련당하는 일인데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법궤를 어깨에 메라. 그리고 마음을 약하게 하지 말고 강하게 담대히 하라. 이것은 네 몫이다. 그러면 나는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그 어려운 요단강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간혹 십자가가 무서워서 집어던져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야 합니다. 그리고 앞장서서 먼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쓰십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거기다 돌비를 세웠을 때 너무나 감격해서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여호와의 함께 하심이라고 가르치라.” 우리 살아온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와 함께 하신 여호와의 뜻이야.”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주셨는데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그 약속을 다 이룰 때까지 너와 함께 이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죽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실패의 어려운 터널에 빠져도 다시 살아납니다.

저는 젊은이들에게 가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재미에 생명까지 걸지 말라고 합니다. “잠깐 동안의 재미를 위해서 생명을 거는 일들을 하는데, 이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영원한 것에, 거룩한 것에 바친다면 나는 아깝지 않다. 그러나 그 잠깐 동안의 재미, 그것을 위해서 생명까지라면 위험하지 않느냐?” 예를 든다면 TV에서 봤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되지 마십시오. 내가 그래서 어렵게 TV 방송에 나왔습니다.” 호기심에 높이 올라가서 발목을 묶고 팡 떨어지는 오락 있지요? 그것을 했는데 척추가 늘어나서 하반신을 못 쓴다는 겁니다. 몇 초 동안의 재미를 위해서 생명까지 겁니까? 저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등산도 재미있고 행복하면 그런 수준에서 등산도 하는 것이지 도로 내려올 것을 생명을 걸고 절벽을 기어 올라갑니까?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뭐든지 해야지 눈길을 올라가는데 생명을 거는 겁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영원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생명 걸어도 괜찮습니다. 정착된 가나안 땅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개념 천국임을 이 성경은 가르치면서 돌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토록 고난스러운 광야 순례의 길을 걸어왔는데, 우리가 지금 인생 여정에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서 영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도 가는데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다 이루기까지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아니하는 것은 “너는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인데 모세와 함께 하던 것과 같이 똑같이 할 거야. 알았지? 그건 네 몫이야. 그것은 네 믿음이야.” 여러분, 그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는 우리 인생 순례자의 길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적 무장을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하던 거와 똑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그 말씀을 주시고 여호수아가 그것을 믿음으로 실천하여 마침내 수천 년 전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영적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간직하고 나에게 남아있는 이 땅의 순례의 길을 믿음의 승리의 순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