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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도 써 내려야 가야 (행 29~2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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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써 내려야 가야 (행 29~28:30~31)


벌써 11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참 한해를 시작할 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벌써 팔랑이는 달력 한 장만이 남아있는 한해를 정리하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희망을 안고 이 해를 출발을 했지만, 돛을 올리기도 전에 금융 위기로 전 세계가 고통의 질곡으로 빠지더니 이제 두바이발 쇼크로 인해 또 한번 세계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이 한해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나이로 보아서 어떤 연령에 지금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한 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틀립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또 어떤 연령층에 속했든지 간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을 수 있는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보는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특별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동안 3년에 걸쳐서 사도행전을 강해를 했는데 여러 행사에 겹치다 보니 전하는 저도 아쉬움이 많았고, 아마 듣는 여러분도 사도행전의 흐름을 놓친 분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끝맺음을 잘하느냐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가 예수를 만나고 가졌던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보통 소망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그것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대와 열망이 얼마나 간절하던지, 롬1:13절에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여기 여러 번 가기를 원했던 바울의 그 마음을 아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을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낚아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나는 이제 이 예수를 위해 살리라. 이 예수를 나의 인생의 최대 목표요,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살리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아볼까?’ 그게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마침내 그렇게도 소망했던 로마에 왔습니다. 이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영접한 지 30여년이 다 되는 때입니다. 이 사건은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을 하지 않았나 추측을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가 그토록 오고 싶은 로마였지만, 재판을 받는 죄수의 몸으로 초라한 셋집에 2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아마도 처음 로마에 입성해서는 재판을 받는 동안 그리고 형이 확정되기 까지 일종의 연금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그렇다고 너무 편안한 상황을 연상하지는 마십시오. 존 스토트는 그의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이때 바울은 그의 오른쪽 손목이 로마 군인에게 사슬로 묶인 채 24시간 교대로 감시당하는 상태였다고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이 과정 속에서 그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가장 소중하게 쓰기로 작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보십시오. 이 조그마한 셋집에서 장차 300년 후 로마제국을 접수 할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모든 위대한 일은 놀라울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 할 때가 많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하나, 그런데 그 겨자씨는 자라납니다. 나물이 됩니다. 나물 보 다 더 커다란 나무가 드디어 됩니다. 가지를 펼치게 되고, 펼쳐진 가지, 가지를 가진 울창한 나무가 되었을 때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짓고, 그래서 이 나무는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얘기, 겨자씨 한 알 속에 들어 있는 비전을 이야기를 하십니다. 

한 알의 겨자씨가 땅에 뿌려져도 땅은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요란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겨자씨의 작은 몸짓은 사람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겨자씨가 온갖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랍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시작은 우리 믿음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유럽 역사 2000년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의 첫 걸음이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한 미결수의 셋방에서 시작된 것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바울을 결박하고 감금을 시킬찌라도 그의 가슴에 타오르는 진리의 불은 꺼뜨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제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인천에서 목회를 하시는 은혜의 교회 박정식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이번에 기도원에서 머물고 있는데 그의 딸이 미스코리아가 된 그 과정을 잘 기록한 책이 한 권 나왔더라구요.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천에 창녀들과 극빈자들이 모여 있는 학익동에다 아내와 함께 천막 교회를 치고 이곳 주민과 함께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다부진 각오로 개척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치유 사역이 우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병자도 낫고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안 변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기와 반목, 그리고 분열의 뼈아픈 경험을 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부터 사 복음서를 붙잡고 묵상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말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가르침”이라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쳤다."는 단어였습니다. 헬라어로 "디다케"라는 말인데 말씀을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가르쳤다. 

그런데 똑같은 성경을 봐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가치관의 차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자기가 어떤 가치관으로 보는가가 정말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르쳤다에만 동그라미를 계속 치면서 읽었답니다. '가르쳤다'가 '기적과 이적'보다 아홉 배가 더 많았습니다. 9:1의 빈도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조차도 기적과 이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왜 사람이 안 변하나? 왜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사역을 한 것입니다. 매일 은사집회 하고 매일 성령의 역동성을 구했지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새롭게 목회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목회를 포기하려다가 아니구나 다시한번 해봐야겠다는 불꽃이 가슴에 와 닿자 그는 달동네에서 미친 듯이 제자훈련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교회가 한국에서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교회로 많은 교회의 사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한 평에서 통하는 진리는 1만평에서도 통합니다. 10명에게 통하는 지도력은 천만인에게도 통합니다. 

여러분! 나는 이 제자훈련을 시작하며 늘 고민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기도원에서 이 문제를 안고 씨름을 했습니다. 이미 답이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일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일보다 하나 되는 이 사역이 더 중요합니다. 이 하나 됨의 본질을 놓친 채 우리 교회는 너무 일에 많은 치중을 해 왔고, 또 그 일에 소수의 사람들이 계소 반복 되다 보니 탈진이 이러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에 치여 건강치 못한 모습들이 드러나기도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제자 훈련 역시 성도들 가운데는 또 하나의 교회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일로 생각하니까 부담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의 제자훈련은 단지 고급지식을 나누어 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피를 토하듯 가르쳤습니다. 

그 앞에 자신들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오랫동안 구원의 확신이 없던 자들이 예수를 바로 알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옛것에 매달려 사는 인생들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었고, 무엇보다 삶의 분명한 목표가 생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 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걸 만한 목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그 목표가 있느냐가 그것입니다. 바울은 그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목표라고 하는 말이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입니까?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흐르면 다 먼지 속에 파묻히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하는 그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입니다. 이 세상은 다 심판 받아 없어집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하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분이 영원토록 다스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았느냐 바로 살지 못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목표를 정했다면 그 마지막에 가서 큰 소리를 치고 마지막에 가서 찬양할 수 있는 목표라야 하지, 중간에 있다가 없어지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목표를 푯대로 정해 놓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저를 우리 교회에 있게 하시고 여기에서 사역을 맡기신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모를 때 그 순간부터 고통이 오고 통증이 옵니다. 아예 이것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일 것입니다. 나는 오늘 사도행전을 다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초자연적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시작을 하였다가 지극히 소박한 바울의 셋방 성경 공부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로마의 셋방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바울의 모습은 3000명, 5000명을 일시에 회심시키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장면에 비해 소박하고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요즘처럼 어떤 결과를 중요시하는 풍토에서 본다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도 성령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 속에 장차 온 땅에 펼쳐 질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친 인생이야 말로 투자할 가치가 있는 진정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사도행전 29장>이라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본래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연구 발표한 이론인데, 그가 발표한 논문 제목만 봐도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끼쳐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여기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 받은 사울 한 사람의 가치를 아십니까?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담을 주는 사람입니다. 핍박자이고, 우리와는 너무 먼 길을 가는 삶처럼 보이는 그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하는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 사랑 앞에 세워진 한 사람의 가치는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면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 예수님 만나 회심한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을 복음으로 흔들어 놓은 사건이라면 사울의 회심은 이방세계, 저 로마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놀라운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을 가르쳐 학자들은 ‘오픈 엔딩’(open ending)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났지만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에서 이제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을 위해 이제 다시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인생을 그분에게 후회없이 헌신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주님은 동일하게 여러분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이 미약하다 할찌라도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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