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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막 9: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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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되고자 하면 (막 9:33~37)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약점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약점을 알까봐 숨기고 싶은 그런 약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강점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점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강점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우리들의 약점이 하나님의 손에 들리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도 아름답게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되고 난 다음에는 살리기에 목숨을 겁니다.

예전에는 믿는 자들을 감옥에 넣는 자였는데 변화 받고 나니 자신이 감옥 가는 자가 됩니다. 율법에 충만한 자가 이제는 복음에 충만한 자가 됩니다. 웃음이 없던 자가 웃음이 있는 자로 변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지요. 그런데 복음도 바울의 약점 하나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 약점이 바로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바울은 병든 자를 고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질병은 고치지 못하였기에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고쳐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바울이 그 약점으로 인해 교만에 빠지지 않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이겠지요.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점까지 들어서 사용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점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프란시스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생애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선생님을 보면 성자 같은 인격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거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내려다보시고 사람을 찾고 계셨어.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군지, 가장 불결한 사람이 누군지, 고통 가운데 고민하는 사람이 누군지, 가장 병든 인생이 누군지 찾고 계셨어. 그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렀어.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난 후에 ‘저 사람이야. 저 사람을 붙들어 내가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 줘야겠어’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거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뛰어나고 아름답고 잘못이 없고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렁이 같은 야곱을 찾으십니다.
인간은 참으로 허물 많은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부셔지고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하나님의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사용해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기에 어두운 때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추악한 경쟁심을 먼저 보게 됩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어느 집에 들어가 잠시 머물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지만 제자들은 잠잠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다투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언제나 부딪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누가 크냐?”는 다툼일 것입니다. 여기엔 내가 다른 사람보다 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아니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내가 낫다는 마음이 더 솔직할 것입니다. 물론 전혀 상대도 안 되는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지금 함께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부름을 받기 전에는 서로의 형편이 다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디다 내 놓을만한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다른 제자들에 비하면 내가 낫다는 마음들을 먹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보다 낫다는 것 내가 누구보다 크다는 말은 곧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잘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나가 대접을 받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좀 더 낫게 살고 싶다는 것이 단순한 욕심만은 아닙니다. 이건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꿈꾸는 것이 것입니다. 능력만 된다면 보다 큰 집 보다 비싼 집에서 이것저것 다 갖추어놓고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럴 형편이 안 되니까 나는 그냥 이 정도면 만족하다고 하지 솔직히 능력이 된다면 그래도 이 정도면 만족하다고 하겠냐고요? 

하지만 다시 돌이켜 보면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추악한 욕심의 끝자락일 뿐입니다. 조금 심한 표현으로 정욕이다 탐욕이다 하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그냥 욕심이라고 하면 또 건전한 욕심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도 욕심이라고 한다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미 욕심이라고 할 때는 바른 길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게 마땅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합당하도록 나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데 우리네 마음 속에는 그래도 내가 남보다는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들이 조금씩은 다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정욕이나 탐욕으로 바뀌게 될 때도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욕심이라고 할 때는 그것은 내가 가지거나 누리기에 합당치 않은 것을 가지고자 하고 누리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분명 내가 가져서도 안 되고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남들이 다 한다고 나도 가지고 싶고 남들이 누린다고 나도 누리고 싶어하다보니 그것이 아픔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로 인한 자존감 상실이라든가 실망감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들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상황이나 대상은 다를지언정 갖고 싶고 되고 싶고 또 무언가나 누군가는 붙잡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수 없다보니 상처로 남게 되어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힘들어하고 못 견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무언가 의지하고 싶은데 그 대상이 때로는 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명예나 권세 지위가 되기도 하며 부족함이 없이 살고자 하는 부귀영화에 대한 갈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누군가 나에게 힘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봅니다. 당연히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다. 도대체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듣기나 하신건지 아니면 내 마음을 알고나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하염없이 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이왕 해 주시려면 쇠뿔도 단번에 빼랬다고 그냥 속시원하게 빨리빨리 해 주시면 뭐가 어때서 이건 정말 답답해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또 다시 기댈 언덕을 찾아 눈길을 돌립니다. 

하지만 내가 기댈 언덕이요 나의 위로자라고 생각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실망감이라든가 좌절감내지는 상처들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넘어뜨리고 맙니다. 그래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합니다. “이건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아무리 도리도리 고개를 저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수록 더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래서 하소연 합니다. 이건 다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런 아픔이 목사를 비롯한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직 때문이기도 하고 성도들 서로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 때문이든 이제는 다 털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목사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저도 더 노력할게요. 말이든 행동이든 오해나 상처 없도록 더 조심할게요. 기도해 주세요. 이건 다 아무개 때문이라고요? 이제는 용납하고 용서하고 감싸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딱히 그렇게 하겠다고 장담은 못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다고 각오하고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내 아픔이 누구 때문이든지 간에 서로를 이해해 주세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감싸 안아준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망정 함께 손잡고 가자고요. 그래야 서로 편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나만 손해가 아닙니까?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건 누구 때문이 아닌 바로 나 때문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의 예수님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모든 짐을 지고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내가 대신 죽어가면서 거기다 대고 나쁜 놈 좋은 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 이제 죽었소 하고 더 이상 누가 크냐 누가 잘했냐 못했냐 따지지 말자구요. 더군다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아무 쓸모없던 제자들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이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온갖 추하고 더러운 가운데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있게 하자구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도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모든 굴레에서 풀어 자유하게 하고 새생명을 누리며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모든 아픔을 다 내려놓자고요. 

나 혼자 끌어안고 힘들어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시도록 주님께 맡기자고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로 쉬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따라 주 안에서 참된 은혜의 감격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이 보여주신 해결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한 어린이가 정원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 근처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계속해서 커다란 바위를 들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커다란 바위를 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네 힘을 다 사용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녜요 아버지, 저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온 힘을 쏟고 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힘을 쓸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다시 말했습니다. 
“너는 나에게 도와 달라 청하지 않았잖니? 그것 역시 너의 힘이란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잖니? 네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해결책은 먼저 너희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동시에 주님을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겠고 오히려 첫째가 되고 싶은데 뭇 사람의 끝을 자원해서 되겠습니까? 먼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입니다. 

그 마음은 내 스스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이 주시는 온유와 겸손 가운데 살아가기를 시작하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아등바등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먼저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냥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도 모르게 나도 좀 섬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눈에 띤다 싶으면 나 좀 도와달라고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말을 못하고 미그적미그적거리다가 남의 마음도 모르고 너무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요. 

그러면 아 많이 힘들었나 보다 하고 기쁨으로 도와주면 참 좋을 텐데 또 그 마음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대뜸 한다는 말이 아니 당신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당신만 피곤해 나도 피곤해 왜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하냐고 합니다. 아니 그걸 도와달라고 할 때는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러겠나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곧 온유요 겸손입니다. 짜증낼 상황이기에 온유가 필요한 것이요 내가 왜 그것 까지도 해야 돼 하는 마음이기에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며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너와 나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는 것처럼 너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것처럼 나도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온유한 것이요 겸손한 섬김이 이루어지게 하는 첫걸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입니다. 한데 우리네는 주님의 은혜로 마음의 온유와 겸손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표정이나 말투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곧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면 긍정적인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배려하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다음으로 온전한 섬김을 위해서는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죽어가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에게 뿌려주심으로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자격이 있고 갖춰진 것이 있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나를 주님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우리를 주님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고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바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딸네 집에를 잠깐 들렀습니다. 처갓집 장조카가 늦둥이를 나아서 돌잔치를 하는데 같이 갈겸 새로 이사도 했으니 한번 둘러볼 겸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같이 밥을 먹다가 애가 칭얼대니까 그냥 달려가 아이를 안습니다. 아이를 안은 채 밥을 먹어요. 아버지 혼자 식사하게 할 수 없으니 같이 먹기는 하는데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있어요. 

그런다고 손자 녀석이 봐주는 것도 없잖습니까? “어머니 식사 중이시네요. 제가 잠깐 그냥 혼자 있을 테니 먼저 식사하세요.” 어디 그럽니까? 식사 후에 같이 차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젖을 물립니다. 너도 이젠 진짜 엄마가 다 됐구나 했더니 아이를 위해서 그냥 여자이기를 포기하니까 되더래요. 나는 여자이기 전에 엄마라고요. 그리고 이건 아이의 밥통일 뿐이라고요. 가슴이 다 찡합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는 그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되고요. 엄마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서 섬기는 거죠.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배설물을 보면서도 참 색깔도 이쁘다느니 참하다느니 그런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섬김의 근본 밑바탕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랑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내 안에 있는 내 사랑으로는 얼마 감당치 못합니다. 샘솟듯 허락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섬기는 대상 모두를 주님으로 여기고 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보잘 것 없는 사람 또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보니까 섬기기가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주님으로 본다면 주님을 섬기듯이 섬길 수가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단지 그 사람의 어깨에 어떤 계급장이 달려있는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나보다 계급이 높으면 다른 것을 볼 것도 없이 경례를 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나보다 계급이 낮아도 그 옆에 나보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졸병은 상관하지 않고 경계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상대하는 모두가 다 주님이 그 안에 계신 것으로 우리가 믿는다면 이건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우리가 섬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 모두를 주님으로 알고 섬긴다면 거기에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외면한다면 그건 주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그건 주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큰일입니다. 하지만 정말 눈꼴사나워 볼 수 없었던 사람까지도 주님처럼 섬긴다면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십니다. 아니 우리로 섬김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오히려 존경 받게 만드십니다. 이 섬김의 원리를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줄 압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신 말씀을 따라 날마다 주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본 구주 지방에서 탄광의 석탄을 실어 나르는 차들을 연결하는 쇠사슬에서 못이 한 개 빠지는 바람에 탄광이 폭발하여 400여 명의 사람들이 안타깝게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꼬하마와 도쿄 사이에서도 기차 바퀴에 있는 못 한 개가 빠지는 바람에 기차가 삼중 충돌하여 200여 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두 큰 사고는 모두 한 개의 못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작은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무시합니다. ‘요까짓 것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작은 하나를 대단치 않게 여깁니다.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가도 ‘나 하나 바로 산다고 세상이 뭐 달라질까?’ 하며 자포자기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으로 역사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요셉이 머무는 곳에는 늘 복이 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한 사람의 믿음으로 그 가정이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과 민족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바로 그 작은 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십시오. 언제 어디서건 사소한 일도 최선을 다해 섬기도록 하십시오. 

“누가 크냐고 다투기 전에 주님,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일꾼 되게 하옵소서.” 이 귀한 간구가 항상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그리고 그 고백처럼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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