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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열심이 이루실 것이다 (사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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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열심이 이루실 것이다 (사 9:2~7)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노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오늘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 가운데서, 우리 삶을 단정하게 바로잡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맘 때면 늘 떠오르는 것이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입니다. “님이 오신단다,/길 닦아 예비하자”는 말로 시작되는 이 시는 님을 기다린다면서 늦잠을 자고 만 사람의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방은 이것저것 늘어놓아 어지럽기 그지없고, 마음도 심란하기만 합니다. 할 일은 많은 데 시간은 부족합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물을 뿌리자,/묵고묵고 앉고앉고/이 먼지를 어찌하노?/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 자리 위엔 때가 끼었고, 천정엔 거미줄이 쳐있습니다. 앞길에는 돌이 드러나고, 다리는 무너졌습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들의 마음 풍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면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세월의 빠름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허둥대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 때문일 것입니다. 희노애락애오욕의 물결에 떠밀리며 사느라, 마음은 누추하고 몸은 고단합니다. 

마치 신랑이 온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일어나 등불을 밝히려 하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고 노래했던 윤동주의 절실한 마음조차 없이 살던 나날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주님의 지엄한 명을 받고도, 여전히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지 못한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모실 시간이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부끄러워하며 허둥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한 것보다 늘 후하게 셈쳐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움조차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이 애 이 애 걱정 마라,
나도 같이 쓸어주마,
나 위해 쓸자는 그 방
내가 쓸어 너를 주고,
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이게 은총입니다. 쓸자 닦자 하던 마음 그것도 마음뿐인데 님이 손수 쓰시고는 우리에게 앉으라 하시니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대림절기는 삼가는 절기인 동시에 기쁨의 절기인 것입니다. 

• 먹구름의 나날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이사야서의 말씀은 희망이 어떻게 도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대는 주전 8세기 아하스(737-715)가 다스리던 때이고, 장소는 유다의 예루살렘입니다. 유다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발흥은 약소국들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앗시리아가 동방의 강자로 떠오르자 주변국들은 존망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앗시리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그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하고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앗시리아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동맹에 주변 나라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을 벌였습니다.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던 주변 나라들은 대체로 그 동맹에 가담했지만, 남왕국 유다만큼은 그 동맹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은 유다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국경의 남쪽에 있는 화근을 먼저 제거한 후에야 앗시리아와의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사7:2). 

왕과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 보았지만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연합군을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길이 하나이고, 누군가의 힘을 빌리는 일이 다른 하나였습니다. 앞의 것은 신학적인 해결책이고, 뒤의 것은 경험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유다 왕실은 경험적인 해결책에 매달립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신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 위기를 돌파해나가려는 왕과 문무백관들에게,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 당장에는 좋아보일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되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풍랑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풍랑 이후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다닙니다. 그 아들은 전쟁의 위기 앞에 서있는 유다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입니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습니다. ‘노략이 속히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피눈물로 겪어내야 할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막연한 낙관론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절망을 낳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 없는 평안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게(호8:7) 우매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긍휼의 주님은 광풍을 만난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워 주십니다.

• 큰 빛

이사야는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짙은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광경 앞에 서는 순간 목석같은 사람이라 해도 그 장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마치 초월적 세계의 메시지를 접하는 듯 그 광경 앞에서 넋을 잃습니다. 이사야는 먹구름의 나날을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런 햇빛의 날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계시록은 옛 세계가 끝나고 새 세상이 도래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내야 할 온갖 고통을 다 예고합니다. 

일곱 봉인이 열리며 세상이 겪게 되는 심판의 고통, 일곱 나팔 소리가 울리며 다가오는 재난의 그림자, 진노의 일곱 대접이 땅에 부어지며 나타나는 재앙들…그러나 계시록은 그 사이사이에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온 무리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을 찬양하는 광경(7장),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이 함께 부르는 찬양(14장), 어린 양의 혼인잔치 광경(19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예언자는 이미 그 일이 실현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눈부시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그 빛,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그 빛을 볼 때 그들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지금은 어둠의 날이지만, 기쁨의 날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이사야는 매우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 기뻐할 것이고,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즐거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날은 모두에게 기쁜 날이 아닙니다. 압제받는 이들, 무시당하는 이들, 마치 세상에 없는 사람들처럼 취급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기쁜 날이 됩니다. 그날은 세상의 모든 압제에 대한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4-5)

이 날은 역사에 대한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실현되는 날입니다. 이런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 어둠의 날을 견디는 힘이 됩니다.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는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정치의 목적은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계의 삶을 온화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날 예언자는 오히려 그런 세상을 사람들 앞에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기존의 세상에 길들여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되어 역사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not conformed),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but transformed)”(롬12: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비롭고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하자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그 꿈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만 붙들려, 공적 영역의 일들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물론 저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입장은 있지만, 그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시키는 일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 용기(courage to be different)입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메마른 용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연약해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마치 물처럼 자신을 낮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

‘가장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한다.’ 성경의 가장 큰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는 백성의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입니다.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평화의 왕’.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분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존재 속에 깃든 신령한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항상 타올라야 하는 빛입니다. 그 빛은 경외심과 연민과 사랑이라는 연료를 통해서만 타오르는 빛입니다.

1569년 어느 추운 겨울날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종교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더크 윌렘스는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곧 박해자들이 그를 뒤쫓았습니다. 윌렘스가 강을 건너는데, 박해자 한 사람이 그의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강엔 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습니다. 강을 건넌 후 그는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었습니다. 윌렘스는 몸을 돌이켜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박해자에게 달려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곧 이어 다른 박해자들이 당도했고, 윌렘스는 체포돼 얼마 뒤 산 채로 불태워졌습니다. 그는 차마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갈 수 없었고, 그 마음 하나 때문에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요?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죽음이 누군가의 가슴에 붙인 불꽃 때문일 것입니다. 그 신성한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윌렘스는 누군가의 가슴에 붙인 그 신성한 불꽃을 타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희망은 언제나 이렇게 위태롭습니다. 역사는 이런 이들의 희생을 통해 조금씩 진보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지킬 수도 없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아기를 통해 나타난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할 분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은, 누군가 그분의 품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의 마지막 장면은 지혜의 스승인 알무스타파가 떠난 후의 광경을 보여줍니다. 제자인 알마트라는 홀로 방파제에 서서 스승이 한 말을 가슴으로 되새깁니다. “잠깐만 있으면, 바람 위에 잠깐만 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을 것이다.” 떠나간 알무스타파는 누군가를 통해 이 세상에 다시금 오게 될 것이라는 말일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꿈꾸셨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주님의 왕권은 우리를 통해 점점 커지고, 그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은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땀 흘림일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지, 그리고 얼마나 믿음이 부족한지. 하지만 이런 세상의 꿈은 우리의 꿈이기 이전에 주님의 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치고 낙심할 때에도 주님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열심이 그 꿈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움츠렸던 가슴을 펴십시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주님을 영접한 자의 기쁨으로 세상에 나가 생명의 일꾼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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