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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업(基業) 무른 자 (룻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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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基業) 무른 자 (룻 4:13~22)


오늘부터 성탄절을 앞두고 4주 동안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됩니다.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사람의 혈통을 빌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이 예수님 성탄의 역사적인 뿌리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그 역사적인 뿌리는, 주전 12C 후반까지(사사시대, 룻기서) 거슬러 올라갑니다(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 섭리하시는 분,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역사는 스케일이 대단히 큽니다). 

요즘 우리 대통령과 정부가 추진하는 세종시 문제나 4대강 개발문제를 두고, 찬반양론이 팽팽합니다. 논란의 이유는, 시각차이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은, 같은 사안을 볼 때 현미경을 들고 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원경을 들고 당면한 문제를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발전이라는 문제는, 미시적인 눈도 필요하지만 거시적인 눈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균형 잡힌 시각도 필요합니다. 

주전 12세기 후반, 사사시대에 있었던 베들레헴 에브랏의 어느 한 집안 이야기인,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역사적인 뿌리 사건이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그 누군들,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보아스와 룻 자신은, 알기라도 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몰랐습니다(秘密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400년 뒤, 주전 8세기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놀라운 예언이 선포됩니다(이사야 11, 1-9; 찬송 101장, 이새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주전 8세기에, 선지자 이사야 통해서 선포되기 시작한 한 싹의 이야기, 한 가지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어디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 이야기입니까? 그때로부터 400년 전, 사사시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살던 ‘보아스’라는 人物과 異邦人 모압 女人이었던 ‘룻’이라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전 8세기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한 싹의 이야기, 한 가지의 이야기의 역사적인 뿌리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사야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선지자 ‘미가’는 또 이런 예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고을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起源은 아득한 옛날, 太初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니라(미 5, 2).

선지자 미가가 예언한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어디입니까? 보아스와 룻의 만남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역사적인 바로 그 장소가 아닙니까? 놀랍습니다. 바로 거기, ‘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의 말씀 그대로 成就되었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1, 1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 1).

마태의 증언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족보를 크게 보면, 구약에서 두 징검다리를 건너서, 형성된 족보입니다. 그 두 징검다리가 누구누구입니까? 첫째 징검다리가 아브라함입니다(이스라엘의 始祖, 믿음의 조상). 둘째 징검다리가 다윗입니다(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지요). 본문 룻기 3, 4장은 두 번째 징검다리인 예수님의 조상 ‘다윗’이 태어나게 된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조상이 된 다윗이, 어떤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가? 그 역사적인 뿌리, 족보의 뿌리에 놀라운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룻기 4, 13 보십시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누굽니까? ‘오벳’입니다. 나오미(룻의 시어머니)가 아들을 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오벳’이라 했습니다. 

그 오벳이 누구입니까? 룻기 저자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인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 17). 즉 오벳이 다윗의 친 할아버지였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된 오벳을 낳은,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룻기서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룻기서는, 곧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그 시대적인 배경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입니다(룻 1,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이스라엘의 영적인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그 시대는, “백성들이(사람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때”였습니다(삿 17, 6; 21, 25).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 각 사람이 자기 눈에 좋게 보이고,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들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을 무시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통치자가 없는 시대, 왕이 없는 시대라는 핑계로(가끔씩 사사들이 일어나, 재판하고 다스리기는 했지만, 그 사사들조차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백성들 사이에, 어느 누구도 옳고 그름을 구분할 자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기준이 없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공권력이 무너진 시대였다고 보면 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준이 없는 시대가 아니지요.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던 시대였다는 이야깁니다. 

바울의 증언을 빌자면,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신 시대”였다는 이야깁니다(롬 1, 28).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후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 29-31).

보아스와 룻이 살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다는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입니다. 그런 패역한 시대, 하나님을 敬畏하던 두 人物의 이야기가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광산에서 금을 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어둡고, 패역한 시대라 하여도 하나님의 마음은 ‘希望캐기’에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관심은 점점 더 희망캐기에 집중하십니다. 들은 얘기입니다만, 금광에서 광물 1톤을 캐어서 製鍊을 하면, 겨우 金 4그램 정도 얻는다고 합니다. 금이 그만큼 귀합니다. 

지난 11월 중순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바른 교회 아카데미가 실시한 2009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발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2009년 한국교회를 신뢰하는 정도가 19.1%라고 합니다. 지난해 18.4%에 비하면 0.7% 상승한 수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지난해는 48.3%였는데 올해는 33.5%로 낮아져서, 전반적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0.7%?! 작지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希望캐기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사시대, 열두 지파 중에서, 그렇게 많고 많은 가문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唯獨 눈여겨보신, 한 가문이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가까운 친족 중 한 사람이었던 ‘보아스’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유다 고을 중, 작은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다 쓰러져버린 엘리멜렉의 가문, 나오미의 큰 며느리인 異邦人이요 모압 女人인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보신대로, 보아스는 어떤 인물입니까? ‘유력한 자’(이쉬 깁보르 하일)였습니다.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보아스는 룻을 가리켜 “네가 賢淑한 女子(에쉐트 하일)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 11). 하나님은 사사 시대, 사람들이 저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던 유력한 자 보아스와 현숙한 여인이었던 룻을 지목하여 보신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人物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역사의 鑛脈을 캐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축복의 통로로 쓰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 福을 받는, 주인공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룻기 3, 4장 말씀을 유의해보면, 보아스와 룻이 하나님 敬畏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저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공짜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구치 않는 십자가 짐이라는 큰 犧牲 위에 서 있습니다. 

마태복음 1, 1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의 중심에 다윗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기까지에는 아무런 代價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代價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룻기 3, 4장에는 그 대가 지불을, [기업을 무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에는, 基業을 무르는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자기 기업(토지, 재산)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 경우도 생기고, 빼앗기는 경우도 생깁니다. 물론, 그럴 때에도 禧年이 되면, 그 땅을 도로 찾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희년이 되기 전이라도, 그 땅을 도로 찾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기업 무르는 제도입니다. 

가장 가까운 친족이, 땅을 잃어버린 친족을 위해서, 대신 빚을 갚아 주고, 잃어버렸던 基業, 땅을 되찾아 주는 제도입니다. 혹, 누구의 노예가 되었을 때에도, 대신 빚을 값고 자유를 찾아 줄 수 있습니다(레위기 25, 23-28 & 47-55).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 무르는 자(고엘, לאג)가 꼭 필요하지요.

그런데, 나오미 가정의 형편을 가만 보십시오. 10여 년 전, 모압으로 이주하기 전에, 永久移民 갈 목적이었기에, 땅을 다 팔고 갔습니다. 기업도 버렸고, 하나님도 버렸던 가정입니다. 그런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팔아버린 기업(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기업, 땅)을 다시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혹, 찾는다 하여도 기업을 이을 後孫도 하나 없는데, 도무지 희망이 없었습니다. 참담했습니다. 한 가지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자기 기업을 무를 자’(고엘, לאג)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그저 기업만 물러 준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기업을 찾아주어도, 기업을 지켜나갈 후손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밑 빠진 독에 물붓기지요. 만일, 누가 나오미 家의 기업 무를 자가 되려면, 異邦人 모압 女人인 ‘룻’과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만만한 일,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그런 어리석은 거래, 누가 하겠습니까? 문화인류학자 C. Levi-Strauss가 말한 것처럼, 고대로부터 인류사회의 결혼은, 철저한 교환가치(재산상의 이익이나, 신분상승 이익이 있어야)가 있을 때, 했습니다. 결혼은, 거래라는 거지요. 손해 보는 결혼, 누가 하겠습니까? 안하지요. 나오미 家의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되려면, 보통 돈 가지고 되겠습니까? 돈만 드는 것 아닙니다. 그 재산을 지켜나갈 후손까지 낳아주어야 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결혼 상대자도, 異邦人입니다. 모압 女人입니다. 이방인,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른 재산이, 자기 재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나오미 家의 재산으로 귀속됩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100% 손해 보는 거래입니다. 그런 거래,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거래를,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의 ‘유력한 사람’인 ‘보아스’에게 요구한 겁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합니다(룻 3, 9). 옷자락으로 자기를 덮어 달라고 한 것은, 청혼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룻은,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행을 요구한 거지요. 결코, 쉬운 요구가 아닙니다.

그 때, 보아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 말대로 기업 무를 자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업 무를 자 중에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건데,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약조해 줍니다.

보아스가 그날 당장, 城門에 올라가 장로 열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자기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친족에게, 나오미 家의 기업을 무를 意思가 있는지, 또 그 며느리 이방인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주어 그로 기업을 잇게 할 책임을 감당할 의사가 있는지, 묻습니다. 당연히, 거절했겠지요. “나는 내 基業에 損害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라. 내가 무를 것을, 보아스 당신이 무르시오.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룻 4, 6). 그리고는 자기 신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주었습니다(신은 힘과 권위의 상징, 권리를 양도한다, 또 힘과 권위를 타인에게 빼앗김으로, 수치를 당하는 행위). 

그런 후에, 13절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는, 희망이 없는 나오미 家를 세우기 위해, 기업 무르는 자(고엘)가 되었습니다. 희생한 거지요. 엄청난 자기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런 보아스는 손해만 본 어리석은 자입니까? 교환가치로 보자면, 100% 손해 보는 거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基業 무른 者, 보아스를 하나님 나라 역사의 중심인, 다윗 家를 일으키는 뿌리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다윗 家의 親 祖上,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 받은 사람 또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기업 무른 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20).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님께 감사하고, 다시 오실 그 주님을 기다리는 待臨節이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基業을 잃어버린 나오미와 같은 우리들에게,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과 구원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구원에 감사하게 하시고, 주님의 것 된 자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기업 무르는 자의 삶을 사는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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