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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믿습니까?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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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믿습니까?  (막 9:14~29) 
 

1.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정말 씨리즈 설교”의 네 번째 시간으로서 “정말 믿습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信者”로서 믿음에 관해서는 專門家시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죠? 

먼저, 믿음에 관한 몇 가지 정의를 소개해 볼까요? 믿음은 關係입니다.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은 성경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사실이고, 또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믿음이 좋으냐 아니냐를 설명하는 말이 됩니다. 

믿음은 순종이고 실천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고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상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지,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것이죠. 국제 예수전도단(YWAM) 총재이자 열방대학의 총장인 로렌 커닝 햄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라는 책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9세기 전설적인 곡예사인 블로딘(Jean-Francois Gravlet)이라는 사람의 일화입니다. 

블로딘은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안전그물도 없이 외줄을 타고 건넘으로서 유명해졌습니다. 나이가라 폭포의 높이는 평균 50m, 너비는 미국 쪽은 320m, 캐나다 쪽은 900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느 날 블로딘은 무거운 시멘트 주머니를 실은 외바퀴 손수레를 밀면서 밧줄을 탔습니다. 수레를 밀면서도 성공적으로 외줄타기를 끝낸 블로딘은 자기 옆에 있던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밧줄 위에서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럼요. 오늘 하신 것을 보니 그렇다고 믿어져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라고 기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블로딘이 다시 물었습니다. 
"시멘트 주머니 대신에 한 번도 밧줄을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수레에 태우고도 건너편까지 밀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기자는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자 블로딘이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타시지요." 

순간 그 기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과 그 믿음에 자신을 건다는 것은 너무나 달랐던 것이죠. 그 기자와는 달리 그 자리에는 블로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기자를 대신해서 수레를 타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블로딘은 그 용감한 지원자를 손수레에 태우고서 폭포 위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로 나뉘어져서 돈내기를 했습니다. 

이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블로딘은 그 사람이 탄 수레를 끌고 맞은편에 도착했고, 이것을 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돌아올 때였습니다. 약 반쯤 왔을 때, “할 수 없다”에 큰돈을 걸었던 한 남자가 아무도 몰래 버팀줄 하나를 끊어버렸습니다. 순간 밧줄은 요란하게 흔들렸고, 두 사람은 그 높은 폭포 위에서 떨어져 죽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블로딘은 심하게 흔들린 줄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 수레에 탄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시오! 일어서서 내 어깨를 잡으시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일어서서 나를 붙잡고, 그 다음 수레를 던져버려요!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 남자는 흔들리는 수레에서 일어나서 겨우 밖으로 빠져나와 블로딘을 붙들었습니다. 
블로딘은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으시오! 그리고 다리는 내 허리에 두르시오!" 

그는 곡예사의 말을 잘 따랐습니다. 그가 수레에서 빠져나와 블로딘을 붙드는 순간, 빈 수레는 떨어져서 요란한 거품과 함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마치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그 사람을 자기 앞에 매단 블로딘은 흔들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밧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블로딘은 자신이 안고 있던 그 남자를 반대편에 무사히 내려놓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곡예사를 믿고 자신의 생명을 맡긴 사람처럼 그렇게 믿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와는 조금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가르치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2. 믿기는 합니다만 …!

1)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세 제자를 데리고서 변화산이라고 알려진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오르셔서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그때 같은 장소에 함께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꿈에서도 상상치 못했던 너무나 놀랍고 신비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이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세 제자들과 함께 다른 제자들과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큰 문제가 하나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사람이 자신의 병든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했으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함으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본문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요. 그 이유는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꾸짖으심으로서(19) 이 믿음에 관해 언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자, 이 말씀을 들은 그 사람은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고, 이어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신 그 믿음,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그 믿음,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 그 믿음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주제인 것이죠.

2) 믿음이 없는 제자들

산에서 내려와 무리들 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본 무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와 예수님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서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귀신들린 제 외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 주십시오. 귀신이 제 아들로 말을 못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어디서든지 아이를 사로잡아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면서 죽이려 합니다. 또한 이 귀신이 제 아들을 불 속으로 뛰어 들게 하고, 물에도 빠지게 만들어 죽이려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니, 제발 이 아이를 고쳐주십시오(17~18).” 여러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런 몹쓸 병에 걸려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는 것을 본 그 가족들이 아이를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이 의사 저 의사에게 여러 가지 진찰을 다 받아 보았을 것이고, 약이라는 약은 다 먹여 보았을 것이고, 민간요법이나 특수한 치료법도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鬼神에 의한 병임을 알았습니다. 귀신만 아니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귀신 때문에 간질병을 앓아야 하고, 귀신 때문에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귀신 때문에 언제 어떻게 죽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아이였습니다! 이렇게 귀신에게 농락당하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러한 일을 겪는 것을 어릴 때부터 쭉 지켜본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마음고생도 고생이지만, 그들이 치른 수고는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고, 어디를 가든지 동행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도 잠자지 못하고 지키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초긴장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고칠 길도 없고, 해결의 방법도 없이, 아이의 나이는 들어가고 그 부모는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부모가 지켜 주니까 괜찮다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가 없으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던 중에 이 귀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 귀신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로서 귀신, 심지어 군대귀신이라고 귀신 무리들까지도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달아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에 걸려 고통 받는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필 그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예수님이 없으니 그 제자들에게 아들을 부탁한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적이 있다고 하니까, 제자들에게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자주 하신 일이니 제자들인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전에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귀신을 내쫓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 했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도 도무지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가기는커녕 도리어 귀신들에게 농락당하고 조롱당하는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지요. 그들이 그렇게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와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서기관들에게, 그리고 무리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9)!” 믿음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님의 진단의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에게 농락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기 지혜, 자기 방식, 자기 학벌, 은행에 들어 있는 적금, 가족이나 친지 등 그 뭔가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 없는 것이죠. 

이렇게 믿음 없는 것이 자신만의 문제로 끝난다면 다행이지요. 문제는 믿음 없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아들을 부탁한 것처럼 요즘도 자신들의 문제와 사정을 그 누군가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병, 이름은 있어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병, 이름도 알고 원인도 알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 다른 사람은 치료되고 회복되는데 자신은 회복되지 않는 병! 소위 첨단과학의 시대라고 하면서도 자연재해로 인하여 속절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얼만 많습니까? 

글로벌 시대라고 하면서도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교통사고 등 사고로 죽는 경우는요? 그리고 좌절과 절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의욕을 가집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 보려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합니다. 그때 교회가, 그때 성도 여러분들이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도에게 그들의 문제를 풀어줄 믿음이 없다는 것이죠. 제자들처럼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과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믿음 없음은 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3) 제게 믿음을 주소서!

믿음이 없기는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발작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그것이 간질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병의 원인이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악한 영, 귀신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 고치기 어렵고 사람들로부터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병에 걸린 것이죠. 귀신이 그 아이로 발작을 일으키게 하고, 불이나 물속으로 뛰어들게 하여 죽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까지 알았습니다. 상태가 이렇다 보니 어떤 의사라도 다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안된다’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안 되어서 이미 낫기를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흐른 것이죠.

그때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의 소문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소문이 들려왔을 때, 아이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수많은 기적들을 일으키고 다닌다는 소문은 자자했지만,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이상 믿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문난 의사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치료법이나 약도 아무런 효험이 없는데, 의사 자격증도 없고 아직 젊기만 한 젊은이가 병을 고친다는 소문에 쉽게 흔들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제자들에게 아들을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제자들에게 부탁했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가 본 예수님은 추리한 옷을 입고 수염이 덥수룩하여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내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미쳤지. 어떻게 저런 젊은이가 …? 소문을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그는 성경에 쓰여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애원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23).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뭐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을 가진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너무나 절실한 나머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짜로 믿어버렸습니다. 혹시나 티끌만한 의심이 남아있어 아들이 고침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예수님께 다시 부탁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이를 고치기 원하고, 예수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그렇지만 그 예수를 완전히 믿기가 힘드니까 완전히 믿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믿음과 간절한 모습을 본 예수님은 그 아이를 지배하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어 아이를 고치셨습니다.

자, 여러분! 이러한 본문의 상황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이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아이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4)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➊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제자들에게와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경우,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겁 없이 덤벼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아버지의 경우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내가 믿나이다”, 즉 ‘나의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라고 말한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처음에 말한 대로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할 수 있는 것 다 해 보았지만 아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유한한 인생이고 무능력한 인생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전능하신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➋ 두 번째로 믿음은 무엇입니까?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 말은 “믿음을 달라”는 말이며, “믿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입니다. 즉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병이든지 어떤 문제이든지 다 해결 하 수 있는 분이시니 그것을 보여 달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창조의 하나님, 말씀 한 마디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 못하실 것이 없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常識이니 理性이니 合理性이니 科學이니 운운하면서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께는 다 가능한 것이 주님의 전능성입니다.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지난 추석 단기선교 때 동행했던 중국 연길의 최 목사님은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던 탈북자들을 급히 몽골까지 데려다줘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지도로 보니까 연길에서 몽골까지의 거리는 서울-마산 길의 4,5배 정도 되는 것 같고, 조 전도사님의 말을 빌리면 일반 승용차로 열 한 두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길, 왕복으로는 24 시간이 족히 걸리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하룻밤 사이에 왕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다마스’ 같은 경차로 말이죠. 최 목사님은 자신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도로 위를 달린 것이 아니라 날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우리의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주님의 전능하심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3. 바로 믿으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믿음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인터넷으로 알려진 김정숙 집사라는 분의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이라는 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써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지옥에서 건져주시고, 천국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란걸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의 전 영역에 그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킨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이기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전인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아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말씀하실 때 “아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도의 교제를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소득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정의 외에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이 알게 된 믿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믿음은 자신이 무지, 무능하다는 것과, 자신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고,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오늘도 주님의 역사가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의 아버지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바로 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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