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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주도적 사역 (행 8:14~18,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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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주도적 사역 (행 8:14~18, 25~40) 
 
 
본문은 생명의 말씀이 사마리아에 잘 정착한 후에 더 이상의 지경까지 확장되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과정을 주도하시는 성령님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습니다. 사마리아에 내려간 두 사도는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했고 저희는 “성령을” 받았습니다(14-17).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진정한 회심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2:41, 11:1).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전에는 전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람처럼 임의로 역사하는 성령님의 회심케 하시는 사역은 눈에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요 3:8). 그런데 18절을 보면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즉, 오순절에 사도들이 체험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하게 된 것이지요. 이 사건 때문에 ‘안수’를 성령 받는데 꼭 필요한 신비한 의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넬료와 그의 집안은 안수 없이도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 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0:44). 이 사건은 물세례 이후에 성령으로 세례 받는 2차 체험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할 근거도 못됩니다. 8장 말미의 에디오피아 내시를 보면 2차 체험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가 주어지던 그 시대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해석해야만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무시간적으로’ 적용하면 해괴한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에게 레아가 있었지만 사랑하는 여인은 라헬이었다는 말로 외도를 정당화하는 자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러 아내가 있었던 다윗을 내세워 일부다처를 주장 할 수도 있겠지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족 친지들과 관계를 끊고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근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것 같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사악한 해석들이지요.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건 역시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천년이 넘는 반목관계에 있으면서 할 수만 있으면 종교적으로 독립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지만 그리심 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만들었고, 구약 성경이 있었지만 사마리아 오경을 자기들만의 경전으로 삼았지요.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의 반목관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마리아 성도들만의 신약 교회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다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 교회를 거짓 교회나 열등한 교회로 배척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은혜의 왕국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목관계가 꼭 해결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마리아 성도들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서로를 인정하게 하여 반목관계를 청산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안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풍성한 선물을 내려 주셨고, 사도를 통해 마술사 시몬의 악독을 제거하심으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는 사도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또 사도들에게는 사마리아 성도들이 자기들이 경험했던 것과 차등 없는 은사들을 받는 것을 보면서 동일한 교회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빌립 개인을 통해 이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겠지요. 하지만 그 일을 공식 파견된 사도들에게 위임하심으로써 공적으로 자신의 몸인 교회가 하나로 유지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교회가 나뉘지 않고 하나로 유지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한 몸” 혹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으로 설명하지요(롬 12:5; 고전 12:27). 한 몸이라면 동일한 머리의 지도를 받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와 사마리아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심에 있어서 사도들을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실지라도 그분은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지요.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의 하나 됨에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일치 운동들도 언제나 사도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사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면 하나 될 수 없음도 분명히 해야겠지요. 여기서 ‘사도’는 자칭 사도가 아니라 신약 교회의 터를 놓았던 1세기 사도를 말합니다.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1세기 사도들이 오늘날 교회에도 역시 사도들입니다. 그들 외에 새로운 권위를 받은 다른 사도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1세기 교회와 다른 점은 그 사도의 가르침을 더 이상 목소리로 받을 수 없다는 점이지요.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무오류하게 기록하게 한 사도들의 가르침인 성경을 후대 교회에 남겨주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한 몸인 것을 알고 하나 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들만의 독특한 교회를 형성하려 해서는 안 되겠지요. 다만 조직적 연합이 하나 됨이 아니며,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함이 참으로 하나 됨임을 생각해야 하겠지요. 만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 될 수 없음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5절을 보면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교회로 한 몸 되게 하시려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뜻에 즉각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오랜 반감을 즉시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교회의 한 몸 된 아름다운 모습은 평신도와 사도들의 사역적 조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자기들의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벌였다며 빌립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힘써 수고하고 씨를 뿌렸더니 사역의 열매는 사도들이 다 따먹어버렸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까지도 자신을 통해서 베푸시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또 다른 사역지로 옮깁니다. 서로 견제하며 물고 뜯는 모습이 전혀 없지요. 베드로도 빌립도 각자 성령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참으로 한 몸의 지체들처럼 아름답게 협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순종하는 지체들로 인해 생명의 말씀은 더욱 확장됩니다. 주의 사자는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셨지요(26). 신나게 사마리아 대중 사역을 섬기는 도중에 갑자기 인적 드문 광야로 가라시니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27-28). 당시 성경은 개인이 소장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에디오피아 사람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성경을 구해서 열심히 읽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성령님은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셨습니다. 빌립은 “달려가”서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고 물었고, 내시는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했습니다(29-31). 마침 내시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대목을 읽고 있었습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내시는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인지 몹시 궁금해 하고 있었지요(32-34).

모든 것이 예비 된 상황에서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병거를 세우고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35-38). 전도부터 회심까지 일이 술술 풀리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배웠을 뿐이었지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용했습니다.

내시의 회심 기사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이 두드러집니다. 그분께서는 구원 대상자뿐만 아니라 구원 방법까지도 정하십니다. 장소와 시간까지 주관하시므로 절묘한 타이밍에 두 사람이 만나도록 인도하셨지요. 말씀에 대한 무지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가르침을 갈망하던 겸손한 사람과 언제든지 말씀을 가르칠 준비가 된 사람의 예상치 못한 만남이 갑자기 발생했습니다. 하필이면 만나는 순간에 복음의 핵심부분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우연으로 돌려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 만남의 이면에 성령님의 섬세한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입니다. 사람은 구원 사역의 협력자가 아니라 쓰임 받은 자입니다. 협력했다면 공로를 주장할 수 있지만 쓰임 받았다면 감사하며 순종할 뿐이지요. 두 사도와 빌립은 “주의 영이 … 이끌어” 가실 때마다 인도하신 그 자리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39-40). 감사하며 순종하는 태도였지요. 성령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항상 성령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감사함으로 현재의 삶의 자리에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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