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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 (사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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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 (사 6:6~8)


어느 성공한 실업가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행운아”라고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기 싫은 일은 돈을 주고 다 남에게 시키고 나는 하고 싶은 일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돈이 참 좋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인생 황혼기에 남에게 결코 시킬 수 없는 것 두 가지 일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는 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남에게 돈을 줘도 맡길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 돈으로 다 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도 정말 중요한 일은 돈으로 다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참 신비한 존재이고 오묘한 존재입니다. 특히 내 인생은 더욱 더 중요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순한 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부분이고 소명의 존재입니다. 내가 소명의 존재임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강력한 존재로 변합니다. 사람은 깨달음과 생각에 따라 엄청나게 변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연히 주어진 존재로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그 배경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은 단세포로부터 분열과 진화를 거쳐서 오늘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내 존재도 그런 과정을 거친 개체 중의 하나입니다. 진화론에는 하나님의 섭리나 예정이나 창조성이 전무한 사상입니다. 

윤회설도 전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 따라 내 인생도 돌고 돈다고 말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전생의 부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우연히 생긴 부산물이라면 기분이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이론입니다. 또 하나는 내 인생은 누군가에 의해서 계획되고 만들어진 존재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이 이신론적인 인생관입니다. 

진화론 보다는 조금 발전된 이론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내 부모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형식입니다. 내 인생은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자가 염라대왕이든지 옥황상제이든지 아메바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론적인 인생관입니다. 아주 막연한 종교적 인생관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계획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성서적인 창조론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와 경륜에 따라 내가 만들어져 태어나서 존재하고 지금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고로 나는 그 뜻에 순종하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고 진화한 존재도 아닙니다. 더구나 전생의 부산물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닙니다. 성경은 나는 하나님이 조성하시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나는 지금 그 사명에 따라 살아가는 엄숙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인생에 엄숙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 중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내 인생에는 목적이 있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엄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삶이 신앙의 삶이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소명의 삶입니다. 

다음은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소명의 사람이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그 다음에는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꼬”하고 탄식하십니다. 그때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하고 응답합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게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는 예만 있습니다. 많은 소명자들이 다 예 하고 응답했습니다. 

제자들도 엘리사도 바울도 모두 예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삭개오도 내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예하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내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나를 조성하신 분이고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 앞에서 내 것은 없습니다. 예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고백이고 순종의 삶입니다.  

또 하나는 나의 부실을 보완하신다는 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내가 어떻게, 나는 죄인인데”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이 지점이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나는 언제나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이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셔서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본문에 이사야가 부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지금부터 2700년 전에 존재한 예언자입니다. 그 시기는 몹시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셨습니다. 그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갈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하소연하십니다. 

그 하소연을 듣고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선뜻 응답하였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고 주변에 스랍들이 하나님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광경은 찬란하였고 영광스러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사야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죽을까 걱정을 하였고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식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죽겠구나.” 그때 사람 중 하나가 불 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부정한 이사야의 입술을 지졌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보완해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는 그렇게 정결하게 해서 사용하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다 예하고 응답하면 그 후로는 하나님께서 씻으시고 능력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인생은 엄숙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응답한 후 내  삶에는 강력한 힘이 실리게 됩니다. 그것이 몇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발적 행동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는 이 자발적 행동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든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다 자발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강한 것입니다. 소명의 삶은 행복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행동과 결단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원 봉사자는 열심히 일해도 일당이 없습니다. 그 수고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합니다. 몸도 고달픕니다. 그럼에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잘 나가던 서울의 의사가 병원 문을 닫고 사할린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어느 대학교수는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검은 대륙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누가 시켜서 가겠습니까. 누가 돈을 준다고 그 오지로 스스로 떠나겠습니까. 자발적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발걸음이 행복한 것이고 가벼운 것이고 발걸음에 힘이 실리는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부름에 응답하니까 그런 파괴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위대한 것입니다. 

행동에 마음 실림 

이사야는 왕족출신입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름에 응답하면서부터 그는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험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입시 날 어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헌신의 길을 가겠다고 우깁니다. 철없어 보이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쉽고 화려한 길을 가라고 다그칩니다. 그래서 둘이 갈등했습니다. 그 갈등은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마음이 실린 자발적 행동에는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자발적 결단에는 마음이 실리게 되어 강력한 힘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발끝에 체중을 실어 걷어차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공이 멀리 날아가는 것입니다. 권투는 온 몸의 힘을 주먹에 싣는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주먹 한방을 맞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힘이 실렸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에나 마음이 들어가면 일이 다 아름다워집니다. 

음식에도 마음이 들어가면 맛이 울어 나옵니다. 그림에도 마음이 들어가면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명작은 마음이 들어가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짝퉁은 마음도 정성도 혼도 뜻도 들어가지 않은 물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강한 이유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능률이 나타나고 힘든 일도 기쁘게 하고 그 결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힘드십니까. 마음이 실리지 않아서 억지로 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면 그 일처럼 힘든 일도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변화도 기적도 성과도 감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신앙도 마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형식화 됩니다. 그래서 형식신앙은 깊이가 없고 열의가 없고 내용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의 일에는 모두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사야가 부름에 응답받고 나아가 외쳤습니다. 그가 나아가 외쳤다고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성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중에 시험도, 방해도, 고난도, 눈물도 많이 발생합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사야를 멸시하였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회의감도 왔을 것이고 도중에 포기할까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짓습니다. “속히 심판이 임하리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의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헌신의 삶에는 이런 인내가 필요합니다. 목적이 세워지면 참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은 인내가 부족한 시대입니다. 한꺼번에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은 무시합니다. 작은 일은 무시하고 하찮게 여깁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작은 것들입니다. 각종 사고의 원인을 보면 작은 것을 무시해서 일어납니다. 큰일을 이룬 사람은 작은 일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오늘 패자는 틀림없이 작은 일을 무시했을 것이고 소홀히 하였을 것입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을 보면 한결같이 한꺼번에 살을 빼려 덤벼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급히 살을 빼면 요요현상이 일어나 며칠 후 또 살이 찝니다. 

이유는 살은 뺏는데 생활이 바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살이 찌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 때문입니다. 밤에 밥을 먹고 잠자고 활동을 안 하고 누워있기를 좋아합니다. 당연히 살이 찔 수밖에 없습니다. 살은 서서히 빼야 합니다. 1달에 1kg 씩 빼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빼면 어느 세월에 살을 빼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1년이면 12kg을 빼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체중감량입니다. 1kg도 빼지 못하는 사람은 10 kg은 절대로 빼지 못합니다.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습관도 식생활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취미로 시간이 많아서 억지로 하는 분야가 아닙니다. 그러면 뜻이 없습니다. 그냥 대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다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영적 최후의 승리이고 부름의 목적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순교의 삶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순교의 심정이 다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가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더 부풀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치 보지 않고 선포하였고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며 천국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포 하였습니다.핍박받고 도피하고 쫒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핍박을 피하여 도피하다가 어느 나무통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를 쫒던 사람들이 그 통나무에 톱으로 반을 켰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통나무와 함께 반으로 쪼개져 죽는 순교를 하였습니다. 

성도의 목표는 천국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삶은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입니다. 안되면 되게 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은 쉽고 평안한 삶, 희락의 삶, 재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더 높은 영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힘써야 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솔개의 일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솔개는 장수하는 새입니다. 보통 40년을 살고 혹은 70년까지 생존한다고 합니다. 보통 솔개는 40년을 사는데 그것이 일반 수명입니다. 만일 솔개가 더 살려면 고민을 해야 하고 피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솔개론입니다. 솔개는 보통 40년을 사는데 40년을 살면 발톱이 노화되어 사냥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부리가 길게 자라 구부러져 사냥감을 줘도 먹지 못합니다. 깃털이 길게 자라 무거워져 하늘 높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솔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 태어날 것인가, 새로 태어나려면 6개월 코스의 고통스런 수행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30년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과정이 피눈물 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먼저 높은 절벽위에 둥지를 틀고 부리를 바위에 쪼아 빠지게 해야 합니다. 아니면 사냥이 불가능 합니다. 

그렇게 해서 빠진 부리는 두 달이 지나면 다시 솟습니다. 이번에는 돋아난 날카로운 부리로 묵은 발톱을 쪼아서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두 달 후면 또 자랍니다. 그때 다시 돋은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옷을 입고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6개월 후에 완전이 다시 태어나서 하늘 높이 비상하여 30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솔개의 이야기는 고통스런 재탄생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미래를 만들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사람도 노화 현상이 나타나면 몸이 비대해지고 안주에 빠지게 되어 병들게 됩니다. 신앙도 노화현상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이대로 살다 갈 것이냐 아니면 다시 태어나 새롭게 할 일 더 할 것이냐 고민해야 합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한결같이 부리를 바위에 쪼아 뽑아내는 마음으로 부단한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신앙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이 동기가 신앙인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에서 목숨을 던지는 신앙의 위인들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온갖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신앙인의 의지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심정으로 부름에 응답하였고 부름 받은 후에는 주어진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부단히 힘썼습니다. 신앙의 승리자들은 한결같이 이 강한 동기로 어려운 길을 걸어 마침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렇게 강한 동기를 지닌 신앙인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역할을 이루며 살아가려는 신앙의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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