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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두사미? 유종지미? (대하 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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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 유종지미? (대하 16:7~14)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11월 하순입니다. 이제 금년도 겨우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마음이 바빠지면서 만감이 교차됩니다. 연초에는 이런 저런 계획도 세우고 제법 그럴듯한 결심도 했었는데, 과연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 봅니다. 뿌듯한 마음이 들면 다행인데, 대개는 별로 한 것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는 자책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다시 한 번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좋습니다. 남은 기간을 어영부영 보내지 않도록, 더 나아가 남은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속담이 있죠. “마지막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He who laughs last, laughs best.)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마무리를 잘 하고 완주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는 세월이 갈수록 좋아지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어렵고 힘들어져도 성도의 삶은 갈수록 좋아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장 영광스런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8:7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또 고후4:16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처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용의 머리처럼 거창하게 잘 하는 것 같다가 나중에는 뱀의 꼬리처럼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을 갈수록 좋아지고 끝까지 잘 하는 ‘유종지미’(有終之美)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유종지미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용두사미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누구죠? 아사입니다. 그는 구약 이스라엘의 남북분단 시대에 남 유다 왕국의 3대 왕(B.C. 910~869)입니다. 그는 인생 초반에 정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후반에 가서 신앙이 변질되더니 결국에는 말년이 비참했습니다. 

여러분, 이건 정말 아닙니다! 차라리 인생 전반에 잘못 살더라도 후반에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운동경기와 전혀 다릅니다. 운동경기는 전반이든 후반이든 점수만 많이 따면 됩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에서 전반전에 점수를 많이 얻으면 후반에 가서 졸전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반에 잘 살았어도 후반에 가서 잘못 살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갑니다. 용두사미 인생은 절대 안 됩니다. 인생은 무조건 후반전을 잘 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유종미지 인생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통해 아사 왕의 인생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으심으로 이 한 해의 삶도, 인생 전체도 유종지미를 거두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용두사미 인생 : 유다 왕 아사

① 전반 인생 : 태평성대(역대하 14장~15장) 

이때는 그가 신앙생활을 잘 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그 기록이 역대하 14~15장에 나와 있죠. 그는 먼저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대하14:1~5,

15:8~17) 당시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우상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일제히 척결했습니다. 얼마나 철저했었는지, 태후가 우상숭배 한다고 폐위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구스(이디오피아)가 침략해 옵니다.(대하14:9~15) 100만 군사와 300대 전차가 새까맣게 몰려왔습니다. 당시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대규모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후에는 주변 나라들이 꼼짝 못하고, 전쟁이 그쳤습니다. 대하15:19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이 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 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수십 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② 후반 인생 : 실패와 멸망(역대하 16장)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야기가 반전됩니다. 오늘 본문인 역대하16장을 보면 분위기가 정반대입니다. 그의 후반 인생이 흔들리고 망가집니다. 거듭 실패하고 마침내 멸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남 유다를 침공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범상치 않은 겁니다. 아사의 신앙이 흔들리자 하나님이 신호를 보낸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럴 때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아사는 정반대로 엇나갑니다. 그는 과거 구스의 전쟁을 치를 때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힘을 의지합니다. 

주변의 강대국이었던 아람의 파병을 요청합니다.(대하16:1~6 참조) 그 결과 어떻게 되죠? 북 이스라엘의 침공을 격퇴합니다. 당장은 잘 된 것 같았죠. 하지만 그건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람이 가나안 땅 정복에 빌미를 제공합니다. 앞에서 남고 뒤에서 밑지는 결과가 된 겁니다. 9절 보면, 하나니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합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람과 동맹함으로 전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쟁이 계속되어 골머리를 앓게 된다는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사에게 중병이 생깁니다.(대하16:11~

14) 발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통풍 같은 병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결국 이 병으로 고생 고생하다 죽고 맙니다. 너무 비참한 말년의 모습입니다. 

③ 실패 원인 : 인본주의, 교만 

그러면 왜 아사의 인생이 이 지경이 됐을까요? 그 실패 원인은 인본주의(人本主義)와 교만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본주의(神本主義)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도움을 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인생 초반에는 신앙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은 그 마음속에 인본주의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본주의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북 이스라엘에 침공했을 때 어떻게 했다고요? 대하16:2절~3절. “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3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 ” 왕궁의 곳간에서, 심지어 성전의 곳간에서 은금을 내어다 아람의 벤하닷 왕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성전의 곳간에서까지 은금을 내다 바쳤다는 결국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갖다 이방 왕에게 바친 것이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전형적인 인본주의의 모습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당장은 잘 되는 것 같지만 종내는 실패합니다. 손해 보고 멸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절대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시146:3~4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아사는 말년에 병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12절.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의원들에게 구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의술은 무조건 불신앙적인 방법이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죠. 의술도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일반은총의 영역입니다. 문제는 의술을 사용하더라도 자세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의술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치료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병을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전적으로 의술만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적인 모습입니다. 

어쩌면 아사가 발병한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였는지 모릅니다. 고난이 있을 때 무조건 정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고난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젊은 집사님이 발병하셔서 병원에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 일할 때에 누워있는 데다가 병세도 잡히지 않아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튀어나왔습니다. “바쁘다고 평소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는데, 아마 하나님이 가까이 부르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감사하죠.” 그 고백을 들으면서 제 마음 속에서 됐다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병세가 호전되어 건강을 회복했고, 영적으로도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사는 이런 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사가 왜 그랬을까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형통하고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은 전적으로 은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줄 착각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겁니다. 아람과 동맹한 것을 지적하며 선지자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했을 때 어떻게 반응했죠? 10절 보세요.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의로운 선지자를 향해 분노하며 감옥에 가둔 겁니다. 그리고 직언을 하는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래서 성경은 늘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줍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교만해진 겁니다. 인간은 결코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셔서 서 있음을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자는 그 성공한 것으로 망한다.”(A. J. 토인비) 역사가 토인비는 세계 문명사를 연구하면서 하나의 법칙과도 같은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한 나라가 성공하면 그 후에는 반드시 교만해지고 마침내 그 교만 때문에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이 오히려 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공할 때 오히려 조심조심해야 됩니다.

[2] 유종지미 인생 : 사도 바울 

우리는 아사처럼 용두사미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승리하는 유종지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도 바울의 인생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흔들림 없이 정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인생을 마쳤습니다. 

① 아름다운 말년 : 유종지미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다 투옥되어 순교를 예감했을 때 고백한 말씀이 있죠. 유언적 서신인 디모데후서의 말씀입니다. 딤후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는 마라톤 선수가 완주하듯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최선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순교를 예감했지만, 천국에 들어가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마치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젠가 김득황 박사(94)의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입양 단체「동방아동복지회」의 설립자입니다. 본래 역사학자이며 공직자로 내무부 차관을 지내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전쟁 통에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으로 보고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3명의 고아를 친히 입양했습니다. 그리고 고아원 지원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다가 1973년에 동방아동복지회를 설립하게 된 겁니다. 지금까지 국내외에 6만명 입양시켰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한 것은 그 아이들을 입양을 보내면서 일일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도해 주고, 그 후에도 계속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겁니다. 그 연세까지 그 일을 감당하다 이제 후배들에게 맡기고 은퇴하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게 유종지미의 인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② 유종지미의 비결 : 신본주의, 겸손

이와 같이 유종지미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요? 아사의 실패 원인과 반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신본주의와 겸손입니다. 바울은 매사에 하나님의 의지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던 옛 사람(Old Self)은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새 사람(New Self)이 되어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이런 신앙 고백이 갈2:2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게 바로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자연히 하나님 앞에 겸손의 미덕을 갖추게 합니다. 바울은 세월이 갈수록 겸손해진 사람입니다. 대사도였지만 오히려 더 겸손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더할수록, 직분이 중해질수록, 높은 데로 올라갈수록, 범사가 형통할수록 오히려 낮아지는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고, 그 은혜가 유지될 수 있도록 더욱 더 하나님을 의미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별히 그가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육체의 가시’였습니다.(고후12:7~10) 그도 인간인지라 많은 능력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다 보면 혹시 교만해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시되지 않았지만,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심한 안질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대장간 식칼이 논다고, 남의 병을 다 고쳐주고 죽은 자도 살려내면서 자신의 병은 못 고치니까 괴로웠던 겁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 3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응답이 있었습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무슨 말입니까? 육체의 가시를 그냥 끼고 살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 있었지만, 주님의 뜻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합니다. 혹시 인간적으로 교만해지면 주님의 능력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 차라리 육체의 가시 때문에 불편하지만 겸손히 주님을 의지함으로 계속 능력을 나타내는 게 훨씬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여러분, 탤런트 김명민 씨를 아시죠. 얼마 전 「2009 대종상」남우주연상 수상했습니다. 영화「내 사랑 내 곁에」에서 루게릭 환자 역을 연기한 게 인정됐기 때문입니다. 환자처럼 되려고 밥을 안 먹고 두부와 야채만 먹고 20kg를 가량했습니다. 나중에는 물만 먹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대단한 노력파입니다. 작년에는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 강 마에스트로 역으로 「2008 MBC 연기대상」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때 수상 소감이 감동적이어서 메모했던 것을 소개해 드립니다. “나에게 연기할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지만 그걸 충분히 주시지 않아 열심히 노력하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재능이 적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노력하게 됐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겸손한 신앙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어떤 모습이었든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남은 기간, 그리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용두사미가 아니라 유종지미의 인생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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